(* 2월 6일자로 문화과학부 발령을 받아 다시 영화를 맡게 됐습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이전보다 자주 글을 통해 여러분들을 찾아뵐 것 같아 기쁩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 부탁드립니다. 복귀해보니 2년 전이나 지금이나 일 많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문화 분야 뉴스 비중이 많이 커진 것이 가장 큰 변화 같습니다. 2주일 동안 기자 시사회가 많았지만 딱 한번 이 영화 ‘음란서생’만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시간 남짓 보는 동안에도 어찌나 쉴 새없이 핸드폰이 울려대던지.......기쁨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스포일러 많습니다. 주의하세요.)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은 ‘반칙왕’, ‘정사’, ‘스캔들’로 이름을 날린 시나리오 작가 출신입니다. 감독으로 데뷔해 작업하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명동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기분’이라고 느낌을 밝혔는데 방에 틀어박혀 글 쓰는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이 수십 명의 배우, 스탭들과 함께하는 영화감독으로 코드 변환하기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성리학의 영향으로 법도와 예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사헌부 장령 김윤서(한석규)는 명문가의 장손으로 당대의 쟁쟁한 문장가로 불리는 훌륭한 인재입니다. 당파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동생이 희생당하자 집안 어른들과 아내까지 상대 당파를 공격하는 상소를 올릴 것을 주장하지만 소심한 성격의 김윤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맡겨진 조정 일만 할 뿐입니다.
임금의 하명을 받는 자리에서 잠깐 마주친 정빈(김민정)의 눈이 부실만큼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을 하지만 역시 마음 뿐입니다. 당쟁의 반대편인 정적 계열의 의금부 도사 이광헌(이범수)과 힘을 합쳐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연한 기회에 황가(오달수)네 유기 가게에서 사대부로서는 입에 올리기조차 부끄러운 음서 제작현장을 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망측하였지만 호기심 반 심심풀이 반으로 음서 집필을 시도하고 그 반응이 장안의 폭발적인 반응을 얻자 탄력을 받아 아예 전문 작가로 나서게 됩니다. 기존 작품들과 차별화를 위해 그림에 재능이 있는 이광헌을 꾀어 해괴망측한 남녀 모습을 그리는 삽화가로 활용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던 와중 정빈은 김윤서에게 유혹의 손길을 건네는데 김윤서는 주저하다가 더 나은 작품을 위해 결국 유혹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 유혹은 치명적인 불행이 되어 김윤서에게 되돌아옵니다.
성욕이나 식욕같은 욕망을 저열하고 비루한 것으로 취급하며 고고한 척 하지만 그보다 더 추악한 욕구인 권력욕을 위해 당쟁이라는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자행하는 이중성을 가진 양반 사회는 김윤서를 병풍처럼 가두는 답답한 현실로 작용합니다. 규범과 규제 속에서 김윤서라는 인물은 사대부로서 기대되는 사회적 역할에 부응해야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음란소설을 통해 해방감과 자유를 만끽합니다.
한석규는 더할 나위없이 안정된 연기로 점잖은 사대부에서 소심하면서도 노골적인 음란 작가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쉬리’의 흥행대박 이후 출연작에서 흠잡을 데 없는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공교롭게 흥행에서는 별로 재미를 못 봐온 그가 ‘이번만큼은......’ 하면서 심혈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김윤서가 밤을 지새우는 고통 속에서 음란 소설을 써서 황가에게 조심스럽게 보여주며 수줍어하고 또 독자들의 반응을 애타게 궁금해 하는 점 등은 요즘의 작가와 출판업자 관계를 연상시킵니다. 고통의 결과물인 글이라는 작품을 생산해 온 감독 자신을 포함한 글쟁이 세계의 특성을 솔직하면서 객관적으로 묘사합니다. 특히 황가역 오달수의 능청맞은 연기와 대사가 어우러지며 가장 많은 웃음을 만들어내는 장면입니다. 시간 배경은 조선시대로 사극의 형식이지만 내용이나 유머 코드는 현대적이고 젊은 감각에 맞춰져 있습니다. 댓글 문화나 안티 팬들이 이미 그때 시작됐다거나, 점잖은 체통에 갓을 쓴 선비가 음란한 표정이나 언동을 입에 올리는 것 등 신선하고 기발한 웃음도 안겨줍니다.
아역 배우로 시작해 드라마와 영화에서 주목받고 있는 김민정은 이 작품에서 완전한 성인이 되었다고 할 정도의 농염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의상과 조명, 분장의 극대화된 시너지 효과로 그녀가 등장하는 다양한 구도와 사이즈의 화면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정빈과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품, 정빈의 거처나 왕의 목욕탕 등의 미술과 디자인도 꼼꼼한 고증을 토대로 독창적인 재창조를 거쳤습니다. ‘스캔들’이나 ‘왕의 남자’도 화면의 ‘때깔’이 좋았지만 ‘음란서생’은 한단계 더 높은 성취를 이뤄냈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코믹과 멜로의 두 요소가 중반까지 적절한 비중으로 배합되어 조화를 이뤄나가다가 클라이막스 부분에서 멜로의 비극이 부각되면서 각각의 요소가 엉키면서 내러티브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어느 한가지에 집중하다가 해소되는 구조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김윤서가 정빈을 진짜로 사랑했는지 여부, 또 정빈을 모시던 내시와의 갈등과 파국, 서슬 퍼렇던 왕의 태도 돌변 등은 개연성이 다소 떨어져 몰입에 방해가 됩니다.
특히 김윤서와 정빈의 멜로 부분과 김윤서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합니다. 2시간 20분의 상영시간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부분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결말 부분에서 어색한 진지함을 털어버리며 헛헛하게 처리하면서 이런 아쉬운 점을 다소 보완해줍니다. 왕의 남자에 이어 또 하나의 신선한 사극으로 한국영화 강세를 이어나가는데 일조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제목부터 그렇고 포스터도 빨간색 일색인데다 홍보 컨셉도 야하다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고 더더구나 18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으니 ‘허 이거 오랜만에 정말 화끈한(?) 영화 한 번 보겠구려.’ 했다가는 적잖이 실망할 것 같습니다.(뭐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요...^.^;) 바꿔 말하면 어디가 심히 야하다고 18세 등급을 받았나 의아할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