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천진한 호기심을 한껏 만족시켜주면서 동시에 미 중앙정보국의 이해마저 충실히 수행하는 박물관이 있다면 지나친공상일까.하지만 스미소니언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 보면 그런 상상이 아주 터무니 없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
어느 잡지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다.자연사 박물관에 지원되는 정부 각 기관의 후원금은 사실 다른 부처의 이름만 빌려온 CIA 돈이라는 것이다.실제로 지난 2004년 박물관 예산 내역을 들여다 보면 미 국무부, 국방부, 상무부, NASA 등연방 기관의 이름들이 거액 후원자 목록에 줄줄이 올라 있다.잡지 기사는 또 이렇게 이어진다.CIA 돈 뿐 아니라거대 정유회사와 자원개발 회사들도 자연사 박물관에 큰 돈을 기증하는데 그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득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도대체 희귀한 곤충들과 기이한 물고기 화석들을 잔뜩 전시해 놓은 이 박물관이 어떤 비밀 임무를 띠고 있길래 그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해답은궁전 같은 전시관보다도 더 넓고 깊은 박물관 산하 연구 시스템에 숨어 있다.동식물학은 물론 광물학, 해양학, 그리고 인류학까지 모두 7개 분야에 걸쳐 고급 인력과 시설을 갖춘 이 박물관의 연구 시스템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수준이다.돈 씀씀이 만 봐도 그렇다.
지난 2004년박물관 한 해 예산 670억원 가운데 490억원이 연구와 자료 확보에 투입됐다. CIA가 됐건 거대 다국적 기업이 됐건 이 정도 돈을 쓰도록 자금을 지원해 주는 이유가 단지 어린이들에게 쓸만한 시청각 자연 교육장 하나를 유지하자는데 그칠 것 같지는 않다.
자연사 박물관이 운영하는 연구 조직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세계 구석 구석에 대한 지식을 모으고 분석하고 분류하는 일이다.저 멀리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서 온 관광객이전시실을 돌며 열심히 기념 사진을 찍고 있는 사이그 뒷 방에 자리 잡은연구원들은 나이지리아 오지의 지질과 식물 생태와 토양 성분을 샅샅이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분석의 결과는대부분 전시실 안내판이나 박물관이 발행하는정기 간행물에 공개되기 마련이다.하지만 대중의 흥미를 넘어서는 깊이 있는 데이터가 가는 곳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바로 연방 정부 관련 부처들이나 나이지리아 개발 사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기업들이다.자연사 박물관의 연구가 팍스 아메리카나를 지탱하는 자양분이 되는 셈이다.식민 제국주의 시절 오지를 찾아나선 선교사와 인류학자들이 본국에 보내온 정보들이 제국의 팽창에 일조했던 역사의 반복이다.
그저 재밋거리로넘어가면 될 박물관 구경을 너무 지나친 해석으로 덧씌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어쨌든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은 그 규모나 전시내용에 있어서 며칠을 투자해 관람하고 다녀도아깝지 않을 만큼 훌륭한 구경 거리다.자연의 역사,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교류사를 이렇게 잘 정리해 놓은 시설을 보기 드물다.
이런 자연사 박물관에 머지 않아 한국실이 새로 문을 연다.한국 국제교류재단의 후원으로 준비가 진행되고 있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우리쪽은 미국의 수도 한복판의 박물관 안에 한국실이 생긴다니까반만년 역사의 정수들을 뽑아 전시하고 싶은 욕심이 들었을 게 분명하다.헌데 자연사 박물관의 학예사들은 어떤 뜻이었는지 50, 60년대 한국의 생할상을 보여주는 전시물들, 예컨데 낡은 고무신 같은 것들을 전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들 눈에는 다 그게 그것 같아 보이는 백자나 청자보다야걸음을 옮길 때마다 곧 벗겨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발에 붙었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면서도 험한 산길, 미끄러운 물길을편하게 걸어 다니게 해주는 고무신이 더 가치있어 보였을 수도 있다.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란 우리쪽의 설득으로 박물관측의 이런 발상은 일단 철회됐다는 후문이다.
아이들에게 최고의 놀이터이자 학습장인 자연사 박물관을 두고
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듯이 서 있는 거대한 석상이 하필이면옛 에스파냐 군대가 무참하게 짓밟아 버린 멕시코 고대 문명의 무사 두상이라는 점이 그렇다.꼭 전쟁에 진 상대 장수의 목을베어다 전리품 삼아 자기 성곽 앞 풀밭에 세워 놓은 느낌이다. 유럽 식민주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건지뭔지 영 어색하기 그지 없는 박물관의 보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