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후, 저는 분당에 있는 성남아트센터를 가려고 일산의 집을 나섰습니다.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를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두 시간 여유를 두고 나왔는데도 일산에서 분당 가는 길은 험난했습니다. 경기 북부에서 남부로 가는 길이니,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비까지 내려 교통 상황은 더욱 안 좋았습니다.
분당에 아직 도착도 못했는데 공연 시각인 6시를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가면서 내내 ‘다시는 성남아트센터 가나 봐라’ 했습니다. 분당에 들어섰지만 처음 표지판에만 ‘성남아트센터’가 나왔을 뿐, 다음 표지판부터는 없어졌습니다. 처음 가보는 곳은 아니었지만,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데다 밤길이라 찾아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표지판 하나 제대로 못하나’ 하면서 혼자 투덜거렸습니다. 분당에 가지 말고, 같은 날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소프라노 안젤라 게오르규 리사이틀을 가는 건데, 후회도 밀려왔습니다.
헐레벌떡 공연장에 들어갔더니 6시 25분. 이미 2막이 시작된 뒤였습니다.막 중간에는 입장이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인터미션까지 기다렸다가 3막부터 봐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리허설 때 2막과 4막을 봤으니 2막은 그렇다 치더라도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영혼을 두고 계약을 맺는 1막은 아예 놓친 셈입니다.
이 날의 캐스트는 파우스트에 테너 김석철, 마르그리트에 소프라노 김혜진, 그리고 메피스토펠레스에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 윤이었습니다. 로비에서 공연 화면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데, 메피스토 역의 사무엘 윤이 우렁찬 목소리로 ‘금송아지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 윤은 올해 초 예술의 전당이 제작한 오페라 ‘라보엠’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사무엘 윤과 함께 독창회를 열었던 베이스 전승현, 한국인 최초로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출연한 서울 음대 강병운 교수, 얼마 전 서울 바로크 합주단과 함께 공연했던 베이스 연광철에 대한 기사를 ‘세계에서 인정받는 한국인 남성 성악가들’이라는 주제로 썼었습니다.
당시 저는 사무엘 윤이 이탈리아 트레비조 극장에서 메피스토펠레스 역으로 출연했던 ‘파우스트’ 공연 실황을 자료 화면으로 받아서 봤는데, 화면이 그리 선명하지 않았지만, 무대를 압도하는 그의 카리스마는 대단했습니다. 사무엘 윤으로서는 ‘파우스트’가 유럽 무대에서 자신의 출세작이기도 한 셈입니다.
그 사무엘 윤이 한국에서 전막 원어 공연으로는 처음이라는 이번 ‘파우스트’에 출연하기 위해 다른 공연 스케줄까지 모두 취소하고 온 것입니다. 제가 성남아트센터까지, 먼 길을 달려간 첫 번째 이유는 사무엘 윤의 메피스토펠레스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연출가 이소영-무대 박동우라는 이름이 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리허설 때는 다른 캐스트가 출연했었는데, 이 장면에서 온갖 산해진미의 영상이 휙휙 지나가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침 그 때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음식 냄새 때문에 더욱 실감 났습니다. 혹시나 음식 냄새도 의도적으로 연출된 것인가 생각할 정도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공연장 지하 식당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렇게 인상적인 장면을 정작 본 공연에서 놓치다니요. 더구나 메피스토펠레스의 주요 아리아인 ‘금송아지의 노래’를 사무엘 윤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말이지요. 저는 로비에서 모니터를 통해 공연 장면을 지켜보며, 무척이나 속이 상했습니다.
휴식 시간이 되자마자 관객들은 로비로 쏟아져 나오는데, 저는 거꾸로 입장했습니다. 곧 3막이 시작됐습니다. 리허설에서도 이미 봤지만, 흰 벽을 주요 장치로 삼은 무대는 현대적이고 상징적이었습니다. 무대 오른편에 높게 세워진 사다리는 마치 천상으로 통하는 ‘좁은 길’ 같기도 했고,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소망을 은유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현대의 파우스트’는 체크무늬 웃옷에 면바지, 그리고 스니커즈 차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눈에 설었지만, 계속 보다보니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마르그리트가 대사 중에서도 파우스트를 평범한 집안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좋은 집안 자제’로 묘사하고 있는 만큼, 좀 더 ‘고급스러운’ 느낌이었으면 했습니다.
(하지만 1막에서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 박사에게 스니커즈를 건네줬다는 얘기를 나중에 듣고 나니, 1막부터 봤더라면 생경한 느낌이 덜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스니커즈는 이를 테면 노쇠한 파우스트 박사가 누릴 수 없는 젊음과 열정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치이기도 한 셈이니까요.)
성악가들의 기량은 훌륭했습니다. 3막에서는 파우스트가 마르그리트 집 앞에서 부르는 ‘정결한 집’, 메피스토펠레스가 놓아둔 보석 상자를 발견하고 마르그리트가 황홀해 하며 부르는 ‘보석의 노래’ 같은 유명한 아리아들이 나옵니다. 음반이 아닌실연으로 듣는 감동이 컸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 사무엘 윤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아래 위 흰 양복을 입고 ‘느끼한 제비’ 같은 분위기로 나왔습니다. 노래 실력도 빼어나지만, 능수능란한 연기는 그에게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했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마르그리트를 짝사랑하는 지벨이 놓아둔 꽃다발과 자신이 갖다놓은 보석함을 비교하며, ‘황금의 힘’을 자신하는 대목은, 괴테의 시대보다 오늘날 더해가는 물신주의, 황금만능주의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또 중년의 여인을 꾀는 호색한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가 나누는 사랑의 밀어보다, 오히려 이들의 ‘뜨거운 수작’에 눈길이 갈 정도였습니다.
다시 한 번의 휴식을 가진 뒤, 4막과 5막이 시작됐습니다. 마르그리트가 광란에 빠져 아기를 낳자마자 죽이는 장면은, 리허설에서 이미 봤지만, 실연으로 보니 압권이었습니다. 무대 전면,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쓰러진 마르그리트. 조명은 출산을 앞둔 듯 불러있는 배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죄의식과 출산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르그리트 뒤로 흰 벽이 열리면, 마치 야간 야구경기의 관중석 같은 무대장치에 합창단이 빼곡하게 앉아있습니다. 눈부시게 비추는 ‘경기장 조명’이 인상적입니다. 이 장면은 마치 넓은 경기장 한가운데 마르그리트를 놓아두고 합창단이 그녀의 고통과 광란을 구경하는 듯한 모양샙니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 ‘경기’의 총감독이요 연출자입니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합창단을 지휘하며 마르그리트를 마음껏 조롱합니다. 마르그리트는 결국 광란에 빠져 자신이 낳은 아기를 목 졸라 죽이고, 시신마저 무대 밑바닥으로 버립니다. 그리고 울려퍼지는 메피스토펠레스의, 득의만면한 박수 소리.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장악하듯 뒤편에 꼿꼿이 서 있는 메피스토펠레스와 앞쪽에 쓰러진 마르그리트의 실루엣이 강렬했습니다.
잠시 후 시작된 5막. 저는 과연 ‘발푸르기스의 밤’이 어떻게 연출될지 궁금했습니다. 연출가 이소영은 인터뷰 때 ‘오페라에서 이런 장면까지 할 수 있을까, 하는 데까지 밀고 나갔다’고 했고, 사무엘 윤은 ‘솔직히 (아직 보수적인) 국내 오페라 풍토에서 이렇게 ’야한‘ 연기를 한다는 것이 조금 걱정도 된다’고 했었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메피스토펠레스가 보여주는 향락과 퇴폐의 왕국입니다. 무대 중앙에 거대한 천을 수직으로 꼬아놓은 듯한 장치가 물결치듯 핏빛으로 흔들리고 있었고, 파격적인 차림의 무용수들이 붉은 조명 아래 야한 몸짓으로 ‘향락의 밤’을 연출했습니다. (‘파우스트’의 안무는 잘 알려진 무용가 박호빈 씨가 맡았습니다.) 전라의 출연자도 있었습니다. 상체를 드러낸 사무엘 윤은 관능적인 몸짓의 무용수들과 어울리며, 그가 말한 대로 ‘야한’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과연 파격적이었지만, 과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발푸르기스의 밤은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마르그리트의 환상 때문에 흥이 깨져 버립니다. 이 장면은 머리카락을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마르그리트의 얼굴을 커다란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처리됩니다. 1막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에게 마르그리트의 모습을 보여주며 유혹하는 장면도 이런 식으로 처리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옥외 전광판 광고를 연상하게도 하는, 현대적인 연출이었습니다.
이제 장면은 마르그리트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바뀝니다. 감옥이라는 좁은 공간은 무대 오른쪽에 흰 벽을 맞대고 조명을 집중해서 표현했습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이 마지막 장면은 출연자들의 연기가 빛났습니다. 특히 짧은 머리의 죄수 모습으로 나온 마르그리트 김혜진의 연기가 좋았습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도움을 받아 마르그리트를 탈출시키려는 파우스트의 권유를 뿌리치고 마르그리트가 죽음을 택하는 순간, 저는 숨을 쉴 수도,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습니다.
‘마르그리트는 심판받았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선언을 뒤집으며 ‘마르그리트는 구원받았다’는 천상의 합창이 울려 퍼지고, 메피스토펠레스가 괴로워하는 가운데 막이 내립니다. 저는 한동안 손뼉을 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오페라를 보며 이런 감동과 전율을 느껴본 게 언제였던가 생각하며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안젤라 게오르규의 공연을 보지 못한 아쉬움도 후회도 접기로 했습니다.다만 늦게 도착해 앞부분을 놓친 것만이 원통할 뿐이었습니다.
‘파우스트’를 일부를 발췌한 음반으로만 접하다가 전막 공연을 처음으로 본 저는, 이 오페라 자체가 갖고 있는 매력을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순간도 지루하지 않은 감미로운 선율에다, 극적인 구성 또한 뛰어났습니다. 연출가 이소영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도 개막 기념 공연으로 구노의 '파우스트'를 무대에 올렸다고 했습니다. ‘오페라의 매력’을 그만큼 넘치게 담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원작을 이렇게 무대 위에 형상화한 것은 이 공연의 출연자와 스태프들의 힘일 터입니다. 나승서-김성은-강순원이 출연한 다른 날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이 팀도 안정된 가창과 훌륭한 연기로 좋은 공연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한국 오페라의 저력을 보는 것 같아 관객인 저도 뿌듯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사무엘 윤을 잠깐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번 공연에 혼신의 힘을 다한 그는,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에 행복해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했던, 저처럼 일산에서 분당까지 오느라 늦어 역시 3막부터 공연을 봐야 했던, 타 언론사의 문화부 선배도 ‘오늘 파우스트와 메피스토는 오페라 연기의 진수를 보여줬다’며 극찬했습니다.
성남아트센터는 8억 원을 들여 전 5막 공연에 3시간이 걸리는 이 대작 오페라를 제작했습니다. 성남아트센터의 개막 기념 공연 중에서도 돋보이는 공연이었습니다.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공연장들이 대부분 거창한 개막 공연들이 끝나고 나면 지지부진한 경우가 많습니다. 성남아트센터는 이런 선례를 따르지 않고 계속해서 이렇게 좋은 공연을 기획 제작해 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봤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의 ‘성남아트센터 행 고행길’은 어쩔 수 없이 계속되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