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2.이탈리아
1,2,3)로마(Rome) 1,2,3
4,5,6,7)바티칸(Vatican)
8,9,10,11)오스티아(Ostia)1,2,3,4
12)폼페이(Pompeii)
13,14)에르콜라노(Ercolano)1,2
15,16,17,18, 19, 20,21,22, 23,24,25)나폴리(Napoli)1,2,3,4,5,6,7,8,9,10,11
26,27, 28,29)팔레르모(Palermo) 1, 2, 3, 4--오늘 이야기
30,31,32,33,34,35,36,37,38,39)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오늘 이야기
30)피아짜 아르메리나 (Piazza Armerina) 1
◆1. 카잘레 빌라
애트나산을 지붕 삼아 아름다운 자연과 온화한 기후가 한데 어울어진 명소 시칠리아의 위상을 한껏 드높여 주는 유적이 여럿 있지만, 특히 주목받는 곳이 중부 내륙 산간 지역에 자리한 시골마을 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다. 뾰족 지붕을 가진 하얀 집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낡아 가는 아담한 마을 피아짜 아르메리나. 시내 중심지에서 남동쪽으로 3km 가면 만고네(Mangone) 산이 나온다. 울창한 숲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로마시대 카잘레(Casale, 이탈리아어로는 까잘레가 가갑지만 카잘레로 표기한다)빌라가 숨어 있다. 압도적인 모자이크로 피아짜 아르메리나는 물론 시칠리아의 명성을 드높이는 유적지 카잘레 빌라.
피아짜 아르메리나 탐방 사진--트리클리니움 외경. 유리집을 지어 모자이크를 보호하고 있다. 피아짜 아르메리나. ⓒ김문환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된 카잘레 빌라의 모자이크는 박물관이 아니라 로마 당시 초대형 별장 유적지에 그대로 남아있는 실생활 속의 모자이크여서 더욱 높은 가치를 인정 받는다. 로마인들이 어떤 장소에 어떻게 모자이크를 설치하고 살았는지를 한눈에 꿰뚫을 수 있는 견학코스로 손색없다. 거실, 침실, 화장실, 목욕탕, 회랑, 식당... 거대한 주택 내 공간별로 각각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설치한 모자이크. 로마인들의 호사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예술 감각을 숨김없이 보여 준다. 지중해 문명권 전체를 합쳐 지금까지 발굴된 그리스 로마 모자이크 가운데 키프러스의 파포스 모자이크와 함께 현장에 그대로 보존된 것으로는 으뜸으로 칭해도 모자람이 없는 백미(白眉)다.
카잘레 빌라 전경.--유적을 복원하고 모자이크를 보호하기 위해 지붕을 씌웠다. ⓒ김문환
로마의 귀족이나 대상인, 지방 귀족들은 도심지 저택에 살면서 시골에 수만에서 수십만 평에 달하는 장원(莊園)을 가졌다. 장원에는 수십 칸의 방을 가진 초대형 빌라(Villa)를 지었다. 3c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장원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장원 소속 농부들은 자손 대대로 장원을 떠날 수 없고, 또 장원에서 일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 사실상의 노예제다. 이런 노예경제를 근간으로 로마 귀족은 장원에서 부를 축적하고, 장원 속 빌라에서 초호화판 사치 생활을 누렸다. 카잘레 빌라는 로마제정 말기의 장원경제와 문화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2. 카잘레 빌라의 모자이크
모두 63개의 방으로 이뤄진 카잘레 빌라. 우리네 99칸 집보다 방의 수는 적지만, 호화롭기는 한참을 앞섰다. 발굴을 통해 보니 43개 방에서 바닥 모자이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모자이크로 덮인 면적만 3천 5백㎡, 천 평이나 된다. 천 평이라. 논 5마지기에 촘촘하게 모자이크를 깐다고 생각해 보자. 어지간한 경제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대작이다. 그렇다면 카잘레 빌라는 누구의 소유였을까? 누가 이렇게 호화로운 궁전 같은 대저택을 짓고 살았을까? 이를 찾아내는 유효한 방법이 있다. 카잘레 빌라가 만들어진 시기와 연계해 추정해 보는 것.
목욕탕쪽 전경--앞쪽으로 불을 때던 아궁이가 잘 보인다. ⓒ김문환
카잘레 빌라는 한때 4c 말 건축설이 우세했다. 그러나, 요즘은 2c 말에서 3c 초까지 건축연대 추정치가 내려간다. 1950년대 발굴에 참여한 G.V 젠틸리(Gentili)는 카잘레 빌라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사냥터였다는 가설을 내놨다. 그렇다면 B.C 3c다. 이때 로마 제국에는 2명의 황제(아우구스티)가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 밑에는 부황제(카이사르)가 한명씩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갈레리우스, 막시미아누스에게는 콘스탄스. 이렇게 4명의 황제와 부황제가 제국을 4분할해 다스렸다. 당시 막시미아누스가 맡은 지역이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카잘레 빌라를 지을 정도의 재력이라면 황제일 것으로 보고, 막시미아누스의 별장으로 추정한 것이다. 그러나, 젠틸리의 주장이 확실한 사실로 인정될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 없다. 황제가 아니라 민간인 소유였을 텐데... 대지주나 대상인이되, 시칠리아는 물론 지중해 건너 북아프리카에도 장원을 소유한 인물이었을 것이라는데는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모자이크가 대부분 북아프리카 풍이기 때문이다.
목욕탕 구들--테피다리움을 덮히던 바닥의 구들 구조. ⓒ김문환
빌라가 건축된 시기와 달리 붕괴된 연대는 밝혀졌다. 4c 중엽인 346년 이 지방을 강타한 지진으로 무너진 뒤, 1161년 산사태로 완전히 땅에 묻혔다는 것이다. 땅속에서 깊은 잠을 자던 빌라는 19c 일부 발굴이 시작됐다. 이후 1950년대부터 50여 년에 걸친 발굴로 전체 윤곽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1950년대 많은 유물이 쏟아지자 마음만 앞서 무계획적이고 비전문적인 발굴에 나서 유적을 다수 훼손시킨 사실이다. 특히 마피아가 지배하던 시칠리아 특유의 늑장과 뒤죽박죽 행정이 큰 원인이었다. 여기다, 1991년 대홍수가 유적지를 덮치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지금까지도 제대로 복구가 제대로 안된 상태다.
카잘레 빌라 모자이크는 매표소를 지나 우거진 소나무 숲속 경사진 길을 남쪽 방향으로 내려가야 나온다. 2백여m를 걷는 동안 수많은 관광객과 마주친다. 2번 방문했는데, 2번 다 일본 관광객들을 만났다. 단체나 개별 방문... 지중해 주변 유적지 어디서도 느끼는 일이지만, 일본인들이 참 많다. 역사 여행 하나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일본의 경제력과 여행 문화는 현재의 우리시각에서 한 단계 달리 볼 대목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일본을 생각하다 문득 복원된 빌라 앞에 서있음을 느낀다. 어찌나 많은 관광객이 몰리는 지 혼자 자유롭게 다닐 수 없는 게 아쉽다. 정해진 코스를 따라 돌아야 한다.
모자이크--야외에 남아있는 모자이크. 강력한 햇빛에 노출돼 날로 원형을 잃어 간다. ⓒ김문환
카잘레 빌라 모자이크는 헬레니즘 전통과 북아프리카 스타일의 영향이 뒤섞였다. 그리스 로마 신화와 에로틱한 소재를 화려한 컬러 테세라 모자이크로 표현한 것은 헬레니즘 전통 안에 들어있다. 반면, 밀림의 사냥장면을 3단 화면으로 나눠 표현하는 특징은 3c 이후 북아프리카에서 생겨난 새로운 경향을 반영한다. 카잘레 빌라의 방대한 모자이크는 어떤 재료로 만들었을까? 규모 만큼이나 다소 놀랍다. 돌조각은 21 종류의 색을 가졌을 정도로 다양하다. 찬란한 색이 일품인 유리도 16종류나 된다. 다음 글부터 카잘레 빌라 탐방 코스에 따라 모자이크를 자세히 들여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