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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나폴리 9-이탈리아

지중해 문명기 5권BR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BR(At of Mosaic and G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BR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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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 문명
(Art of Mosaic and Greco-Roman Civilization)

--고대의 삶과 사랑--


2장. 테세라 모자이크의 세계

2.이탈리아

1,2,3)로마(Rome) 1,2,3

4,5,6,7)바티칸(Vatican)

8,9,10,11)오스티아(Ostia)1,2,3,4

12)폼페이(Pompeii)

13,14)에르콜라노(Ercolano)1,2

15,16,17,18, 19, 20,21,22, 23,24)나폴리(Napoli)1,2,3,4,5,6,7,8,9,10--오늘 이야기

25,26)팔레르모(Palermo)

27,28,29,30,31,32,33,34,35,36)피아짜 아르메리나(Piazza Armerina)

23)나폴리(Napoli) 9

◆9. 모자이크 전시실 4번방 2

위대한 알렉산더를 위한 희생양. 다리우스. 알렉산더가 최고의 정복왕에 오를 수 있도록 패배자의 역할을 맡아야 했던 그것도 처자(妻子)까지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며 비운에 죽어야 했던 다리우스. 다리우스와 그를 끝으로 문을 내린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王朝)에 대해 간략히 살펴본다. 사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는 같은 해 그러니까 B.C 336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암살이 개입된 것도 같다. 알렉산더는 아버지 필리페 2세가 암살 되면서 왕이 됐다. 다리우스는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던 신하 바고아스가 전왕 아르타 크세르크세스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린 일종의 허수아비 왕이었다. 그러다, 바고아스를 처형하면서 자신이 권력을 움켜 쥔 그런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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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3세--알렉산더의 결연한 모습과 달리 겁을 잔뜩 집어먹은 표정의 다리우스 3세의 표정이 뚜렷하다. 승자의 위세와 오만함이 잔뜩 배어있는 표현 기법이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왕위에 오를 때 둘의 위상은 천지(天地) 차이보다 컸다. 알렉산더는 그리스 민족이 세운 수백 개 도시국가나 왕국 가운데 하나인 마케도니아의 왕에 불과했다. 그러나, 다리우스는? 당시까지 세계 최대의 제국. 서남아시아와 오리엔트를 관장하는 제국의 왕이었다. 그러나, 페르시아 제국과 다리우스는 세계사의 주인공이 될 운명이 아니었다. 제국은 이미 서산에 지는 태양이었고,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의 빛에 가릴 비운을 타고 났다. 다리우스. 그러니까 정확히 다리우스 3세가 내적인 통치권을 막 확보해 나가던 그 무렵. 역시 그리스 내부의 반란을 제압한 알렉산더는 B.C 334년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을 이끌고 페르시아 정벌에 나섰다.

다리우스와 알렉산더의 운명의 일전은 B.C 333년 오늘날 터키 남부로 시리아와 국경을 이루는 이수스에서 펼쳐졌다. 여기서 예상을 뒤엎고 알렉산더가 대승을 거뒀다. 다리우스는 어찌나 급했던지 아내와 딸들도 팽개치고 도망가고 말았다. 알렉산더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 해당하는 오리엔트의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을 장악한 데 이어 찬란한 문명의 보고 이집트도 손아귀에 넣었다. 이어 다리우스가 도망간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 깊숙이 즉 메소포타미아 내부로 들어갔다. 다리우스도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았다. B.C 331년 티그리스 강변 그러니까, 우리의 자이툰 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이라크 북부 지방. 과가멜라에서 알렉산더와 다리우스는 다시 일전을 벌였다. 결과는 페르시아 대군의 궤멸. 간신히 목숨을 구명해 도망친 다리우스. 박트리아로 도망가 재기를 노렸지만, 이듬해 B.C 330년 그 지역 사트라프(총독) 이자 사촌인 베수스에게 암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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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의 패배 장면--창에 찔리고 말은 쓰러진 페르시아군 진영.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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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는 비운에 갔지만, 그에게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와 그의 부장들에게는 행운이 넝쿨 째 굴러들어왔다. 페르시아라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면서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고, 덤으로 아름다운 페르시아 왕녀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다리우스의 아내로 페르시아 최고의 미녀라는 스타티라는 B.C 333년 이수스 전투 뒤에 포로로 잡힌 뒤 알렉산더의 진중에 들어왔지만, 그만 다리우스의 마지막 아이를 낳다 죽고 말았다. 그러나, 미인이 한 명 죽었다고 마케도니아인들이 슬퍼할 필요는 없었다. 스타티라에게는 그녀를 꼭 빼닮은 딸이 있었고, 인도원정을 마치고 돌아온 알렉산더는 B.C 324년 페르시아 제국의 겨울 궁전이던 수사에서 그녀와 결혼식을 치렀다. 수사는 오늘날 이란 남부로 이라크와 국경을 이루는 비옥한 평야지대다. B.C 538년 페르시아 키루스 2세(Cyrus the Great, 키루스 대왕)가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하면서 바빌론에 있던 커다란 돌비석을 수사로 가져왔는데... B.C 18c 바빌로니아 1왕조 함무라비 왕이 만든 최초의 성문법전이다. 프랑스 고고학팀이 수사에서 함무라비 법전을 발굴한 것은 20c가 막 문을 연 1901년.

이미 박트리아에서 록사네와 결혼했던 알렉산더. 스타리라를 얻는 김에 미모가 빼어난 다른 왕녀 한명을 더 취해 2명의 여성과 결혼식을 치르는 진풍경을 연출했으니... 그의 부인은 3명인 셈이다. 그보다 천 5백년 뒤 나타나 그의 정복왕 타이틀을 갈아 치운 징기스칸에 비하면 무척 점잖은 축에 들지만... 알렉산더가 결혼할 때 그의 장군들도 페르시아 제국 귀족과 왕족 여성들을 한 명씩 차지하는 대규모 합동 결혼식이 치러졌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형제 같던 동지 헤파이스티온에게 스타리라의 여동생을 줬다. 동서지간의 연을 하나 더 맺은 것이다. 동서(東西) 융합 정책.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했다고는 하지만, 지역 주민 모두를 죽인 것은 아니고, 언제든 지역 귀족들이 반란을 꾀할 수 있었다. 이를 막고 알렉산더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케도니아 출신 장수들과 페르시아 출신 여성들을 결혼시켜 아이를 낳는 혈연적인 유대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페르시아는 여성들로 인해 마케도니아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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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케메내스 왕조의 페르시아군--페르시아인 특유의 검은머리 긴 콧수염과 머리에 둘러 쓴 두건이 인상적이다. 나폴리 박물관. ⓒ김문환

여기서 간략히 아케메네스 왕조를 들여다 보자. 페르시아(Persia)라는 이름은 지금도 이란 남서부 지방의 명칭인 파르스(Fars)에서 유래한다. B.C 815년 쯤 그러니까 그리스 문명권이 오랜 혼란기를 지나 잠에서 깨어나던 아르카이크기를 맞아 막 호메로스등을 탄생시키려 할 무렵. 페르시아 민족의 한 일파가 수사 근처에 자리했고, B.C 700년 쯤 아케메네스가 왕이 되면서 아케메니스 왕조가 시작됐다. 역사상 첫 페르시아 제국이다. 물론 제국의 위상을 갖춘 것은 아케메네스의 고손자인 키루스 2세가 B.C 550년 메디아를 정복하면서 부터다. 이후 오리엔트 각지로 정복의 발길을 돌린 키루스 2세는 마침내 B.C 538년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멸하고 메소포타미아 최고의 문명도시 바빌론을 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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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잠시 혼란기를 거쳐 B.C 522년 다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국력은 최절정기에 오른다. 이집트 원정을 완성한 그는 스키타이인의 침략도 물리치고, 인도의 펀잡 지방과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도 손아귀에 넣었다. 그러나, 재임기간 중 그리스 본토를 침략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하는 실패도 맛본다. 그는 광활한 제국을 20개의 행정 단위로 나눠 사트라프(총독)가 다스리는 제도를 만들어 냈다. 제국의 왕은 사트라프로부터 세금만 거뒀고, 현지통치는 사트라프가 맡았다. 중앙 제국의 권력 강화를 위해 도로를 만들고, 효율적인 통치와 의사소통을 위해 역전(驛傳)제를 실시했다. 이런 시스템은 이후 각국의 통치제도에 원용됐다. 그는 화폐제도를 확립하면서 산업과 교역도 발전시켰다. 아후라 마즈다를 신봉하는 조로아스터교(조로아스터가 체계화한 배화교)도 그의 지배아래 발전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 이후 세가 약해지고 지방에서 반란이 생기면서 차츰 기울어 갔고, 마침내 B.C 330년 알렉산더의 침공 때 다리우스 3세가 죽으면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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