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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옥타비아누스, 로마 황제정- 4권 연재 끝

BR 지중해 문명기 4권BR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7장. 아에네이드와 로마의 건국 BR 1. 베르길리우스와 아에네이드 2. 아에네아스, 트로이 탈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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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7장. 아에네이드와 로마의 건국


1. 베르길리우스와 아에네이드

2. 아에네아스, 트로이 탈출

3. 카르타고와 디도

4. 아스카니우스

5. 로물루스, 로마건국

6. 브루투스, 로마 공화정

7. 옥타비아누스와 황제정--오늘 이야기--<끝>

7. 옥타비아누스, 로마 황제정

◆1. 카이사르의 독재정 구축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흥하면 망하는 역설적인 역사의 법칙을 비켜간 민족이나 국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로마 역시 마찬가지다. 공화정을 바탕 삼아 지중해 최고의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그 절정에서 왕(황제)정이라는 독재정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영웅과 독재자는 백지 한장 차이. 국민들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을 좋아한다. 약간의 조작을 가할 경우 숭배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히틀러나 김일성도 이런 연장선에서 이해 가능하다.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에 따라 임기동안 일하던 로마의 집정관, 총독들은 늘 독재의 유혹에 빠졌다. 특히, 자신이 뛰어난데다 공이 많다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랬다. '탁월한 능력의 내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요즘 MBC '제 5공화국'에 등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도 이런 모습을 보여 준다.

공화정의 장점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인은 B.C 100년 경 마리우스와 그의 부관 술라에서 두드러진다. 로마는 이들의 싸움에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승리한 술라 역시 결국 B.C 79년 2년 만에 권좌에서 내려왔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의 70살에 25살 짜리 손녀같은 젊은 여자와 만나 새인생을 설계하는 것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실패한 사랑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천 9백년 뒤 74살에 19살 처녀 레베초를 사랑한 독일의 괴테에 견줄 수 있을까? 그래도 술라는 권력을 내던지며 사랑을 택한 비교적 낭만적인 독재자였다. 술라 이후에 폼페이우스와 크랏수스가 동시에 나타나 꺼져가던 독재의 불씨를 되살렸다. B.C 70년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뒤였다. 공을 세웠으니 세력을 노린 것. 여기에 뜻밖에 카이사르가 나타난다. 폼페이우스나 크랏수스에 비해 나이도 어리고, 출신도 미미하고, 돈도 없었던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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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알레지아. 오늘날 프랑스에 있다. 이곳에서 갈리아 총독 카이사르와 갈리아족 반란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이사르는 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 권력을 공고화 할 수 있는 명분과 실리를 얻었다. ⓒ김문환

1차 3두정치를 구축했던 카이사르가 단숨에 정적들을 제치고 1인자로 올라설 수 있었던 계기는 B.C 58년 맡은 갈리아 총독 자리. 불과 3만의 군대로 갈리아에 간 카이사르는 행운에 노력이 시너지 효과를 거두며 자신이 목표했던 이상의 성과를 올렸다. B.C 51년 갈리아의 반란을 최종적으로 진압하고,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도 원정하면서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자신에 충성하는 군대와 많은 전리품, 재보를 챙겼음은 물론이다. 이때 조국 로마가 내린 결정은 카이사르 군대의 해산령. 독재를 막고 공화정을 지켜야 하는 로마 입장에서 당연한 조치다. 군사 업무가 끝난 총독이나 장군은 군대를 해산하고 원로원으로 돌아와 평범한 의원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만 전념하는 게 공화정 로마의 전통이었다. 이제 수백년간 이어지던 민주적인 원칙이 깨질 위기에 놓였다.

독재에 눈먼 카이사르는 B.C 49년 루비콘강을 건넜다. 루비콘강은 로마 본토와 식민지 갈리아를 가르는 경계다. 누구든 원로원의 결정 없이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올 수 없었다. 반란. 'Alea iacta est' = 'The die is ca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는 말은 이때 나왔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2.12 쿠데타를 자행하면서 육군 본부 지휘부의 지시를 무시하고, 박희도 장군의 공수여단을 투입시킨 사건과 대비된다. 그때 박희도 장군은 육군 정식 지휘부가 통제한 서울시내 한강 다리를 넘을 수 없게 되자 한강 하류의 행주대교를 건넌다. 행주대교를 건넌 박희도 장군의 공수부대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점령하면서 쿠데타는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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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 1인 독재정치를 실현시켰지만, 종신 독재관 자리를 얻은지 두달만에 공화파 원로원 의원 14명의 손에 참살 당했다. 알테스 박물관 ⓒ김문환

수도 로마에는 군대가 없었다. 군사독재를 염려해 상비군을 본토 안에 두지 않는 평화적인 제도를 운영한 탓이다. 전두환이 동원한 박희도 공수부대에 대한민국의 운명이 갈렸듯이, 쿠데타군을 이끌고 들어온 카이사르 군대에 로마는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어느 쿠데타나 마찬가지지만, 국가의 지휘부만 장악하면 상황은 종료된다. 쿠데타에 성공한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올랐다. 이듬해인 B.C 48년 그리스의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군을 무찌른 뒤에 권력은 더욱 공고해 졌다.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장군이 제멋대로 승진하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광주 시민군을 박살낸 뒤 대통령에 올라 통치권을 쥔 것과 비슷하다.

52살의 중늙은이 카이사르는 이때 뜻밖의 사랑에 빠진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21살짜리 물오른 금발왕녀 클레오파트라가 상대였다. 9개월을 같이 살며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잠시 제쳐 두고 소아시아 국가 폰투스의 저항을 진압하러 떠났다. 여기서, '베니(VENI), 베디(VEDI), 베키(VE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원로원에 보내 누구도 자신을 꺽을 수 없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강조한 카이사르. 이베리아 반도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마저 정리한 카이사르는 B.C 47년 임기 5년의 독재관, B.C 46년 임기 10년의 독재관, 드디어 B.C 44년엔 종신 독재관이란 기막힌 자리에 오르며 공화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박정희의 유신대통령은 이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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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 카이사르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었고, 또 원로원의 지지를 얻었지만 카이사르의 쿠데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집트로 도망갔던 그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그를 기려 만든 동상 앞에서 카이사르가 암살 된것은 역사의 아니러니다. 루브르 ⓒ김문환

자신의 이름 율리우스(Julius)를 따 7월(July)을 만들고, 신전에 자신을 봉안했지만, 왕으로 추대되는 것은 일단 거부했다. 실질적인 임금이면 됐지, 형식이야 나중에 갖춰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백년 내려온 로마의 공화정이 그리 쉽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이 된지 한달 뒤인 B.C 44년 3월 15일 공화정을 지키려는 브루투스와 카시우스 일파에게 암살당했다. 무려 14명의 의원들이 칼을 들고 폼페이우스 회랑에서 카이사르를 찔러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카이사르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패한뒤 이집트에서 암살당한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 나뒹굴었다. 원로원의 카이사르에 대한 분노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로마의 아버지로 불리는 키케로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뒤 떨고 있는 원로원 의원들을 격려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대목 한가지. 에트루리아 상인왕을 몰아내고 공화정을 창시한 인물과 카이사르를 죽이고 공화정을 살리려 한 인물의 이름이 모두 브루투스다. 로마 역사에서 브루투스는 공화정의 상징으로 손색없다.

◆2. 옥타비아누스의 황제정

카이사르가 암살될 때 38살이던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그림자였다. 그가 카이사르 암살 뒷처리를 마무리한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였다. 한국식 3일장을 따랐는지, 암살 뒤 48시간 만에 장례식을 치렀다. 이어 공화파들에게 유화 제스처로 종신 독재관 자리를 폐지하고, 암살자 브루투스 역시 예정대로 속주 총독으로 내보내는 관대함을 보였다. 이렇게 주변을 신속하게 정리한 안토니우스. 서둘러 베스타 신전에서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꺼냈다. 후계자 이름에 자신이 올라 있을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18살짜리 애송이 옥타비아누스가 적혀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누구인가? 카이사르 누나의 손자였다. 피는 물보다 진한 것인가! 카이사르가 죽기 1년전 그러니까 B.C 45년 유언장을 작성할 때 옥타비아누스의 나이는 겨우 17살이었다. 물론 카이사르가 자신이 그렇게 일찍 갑작스럽게 죽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20-30년 더 산다고 보고 취한 조치는 아닌지... 어쨌거나,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사선을 넘어 권력을 쥔 독재자에게 믿을 곳은 자기 혈육 밖에 없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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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 젊은날의 모습이다. 19살에 40살 나이규정을 어기고 집정관에 오른 그는 공화파를 모조리 숙청하고 황제정을 구축했다. 루브르 ⓒ김문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길을 그대로 따랐다. B.C 43년 19살 나이로 40살 나이제한 규정을 어기고 집정관에 당선됐다. 카이사르가 풋나기로 거장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을 눌렀듯이 옥타비아누스도 열세를 딛고 정적들을 차례로 격파했다. 우선 카이사르의 유산을 군인들에게 분배해 인심을 얻고, '로마의 아버지'로 불리던 키케로와 원로원 의원등 수많은 공화파 인사를 죽였다. 속주로 나가있던 브루투스와도 싸워 승리를 거뒀다. 공화세력의 씨를 말린 셈이다. B.C 43년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2차 3두 정치를 열면서 옥타비아누스는 유럽, 안토니우스는 그리스와 동방,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나눠 가졌다. 공화국을 멋대로 찢어 사유화한 셈이다.

역사상 권력을 나눠 가진 뒤 평화를 지킨 예는 찾기 어렵다. 내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사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에게는 당시 공통점이 있었다. 새여자에게 푹 빠진 것. 24살이던 옥타비아누스는 이미 2번 결혼해 딸 하나를 가진 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들 하나 딸리고 다시 뱃속에 한 명을 더 가진 19살짜리 임산부 리비아에게 인생을 걸었다. B.C 38년 리비아의 남편을 설득해 이혼시키는데 성공했다. 리비아의 남편은 철저한 공화주의자였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를 좋게 볼리 없었겠지만, 독재자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이후 네로나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남의 아내를 가로채는 전통을 지켰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가 거쳐가며 여왕으로 앉힌 20대 중반의 클레오파트라에 빠졌다. 옥타비아누스와 제휴하기 위해 결혼한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를 버리고 클레오파트라 곁으로 갔다. 카이사르는 이혼까지 가지는 않았는데, 안토니우스는 그만큼 계산 없이 순수한 사랑을 한 것인지, 무책임한 일을 저지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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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아누스. 만년의 옥타비아누스. 황제정을 세습하기 위해 몰두했다. 자식을 낳으려 했지만, 안되자 손자에게 기대를 걸었다. 루브르 ⓒ김문환

사랑을 손에 넣은 두 사람은 B.C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맞붙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를 물리쳤고, 안토니우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클레오파트라도 아들 카이사리온이 옥타비아누스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안토니우스의 뒤를 따랐다. 안토니우스와 함께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클레오파트라는 2명의 남자를 사랑했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카이사르는 그녀와 정식결혼하지 않았고, 카이사리온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아기를 낳은 사실을 알고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와 이혼한 뒤 클레오파트라와 재혼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유언이 그녀의 생각을 드러내 주는 것일까?

옥타비아누스는 B.C 27년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존경할만한 자)의 칭호를 받았다. 여기서부터 그는 카이사르의 독재를 넘어선다. 반 강제로 얻어낸 호칭과 함께 국가의 모든 권한을 넘겨받았다. 로마의 전권을 가진 자. 즉, 실질적인 왕의 자리에 올랐다. 카이사르가 못다 이룬 꿈을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늘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고 공언했다. 이를 순수하게 받아들인 원로원 의원들. 언제 자신들에게 권력이 돌아올까 기다렸지만, 헛된 일이었다. 민정이양을 소리 높여 외치다 점점 권력을 강화해 나가던 군사 체제를 경험해본 현대 한국인들은 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속임수에 익숙하지 않던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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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의 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 결혼해 낳은 큰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옥타비아누스는 그를 예정 집정관이라는 초유의 자리에 앉혀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했다. 그러나, 가이우스는 그만 23살 나이에 할아버지에 앞서 죽고 말았다. 루브르 ⓒ김문환

순진한 원로원 의원들을 더욱 놀라게 만든 옥타비아누스의 위업은 또 있다. 자식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세습제의 도입. 초기 농민왕시절이나 에트루리아 상인왕 시절에도 세습은 존재하지 않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자기피를 이어받은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애썼다. 처음엔 직접 자기가 아들을 낳으려 했지만, 재혼한 아내 리비아가 더 이상 아기를 낳지 못하자 포기했다. 대신, 유일한 혈육인 첫부인의 딸 율리아가 아들 낳기를 기다렸다. 율리아의 첫 남편인 조카 마르켈루스가 죽자 율리아를 자신의 오른팔 아그리파와 결혼시켰다. 다행히 율리아는 여기서 아들 3명을 낳아 줬다. 사생활로 아버지 속을 썩였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부분도 있는 효녀였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2명의 손자가 옥타비아누스의 사랑을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이 소년으로 자라자 유벤투스라는 소년단을 만들어 가이우스를 단장, 루키우스를 부단장으로 삼고 심신을 단련하도록 했다. 가이우스가 15살 때 예정 집정관이라는 초유의 직책을 만들어 차기 권력 계승자임을 선포했다. 원로원은 그때서야 옥타비아누스가 공화정 복귀를 말로만 외치고 실제로는 세습왕정을 굳힐 작정이었음을 깨달았다. 물론 옥타비아누스의 뜻대로 일이 돌아가지는 않았다.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각각 23살과 18살의 나이로 죽은 것이다. 실의에 빠졌지만, 굴하지 않고 76살까지 당시로서는 기록적으로 오래 살다 A.D (Anno Domino) 14년 죽은 옥타비아누스는 결국 리비아가 데려온 양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제위를 넘겼다. 통치권의 세습.

◆3. 로마의 멸망

로마가 쇠망해진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절대권력의 세습을 들여다 본다. 로마는 공화정을 견실하게 운영하던 B.C 2c말 지중해 제국을 완성했다. 누구나 공화국의 건전한 규칙을 따랐다. 그러나, 제국을 이루고 적이 없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마리우스와 술라,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로 이어지는 동족상잔이 벌어졌고, 마침내 옥타비아누스가 B.C 27년 1인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1인 지배의 독재는 절대권력을 낳고, 절대권력은 사유화로 이어진다. 사유화에서 빚어지는 최악의 권력이양 형태가 세습이다. 능력 검증이 없는 세습제는 무능해질 수 밖에 없다. 합리적 국정운영이 자취를 감추고, 아부와 부패만이 어지럽다. 이런 현상을 타파하자는 명분아래 힘을 가진 군인이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러나, 한 사람이 쿠데타에 성공하면 누구나 힘으로 권력 잡겠다는 유혹에 빠지기 마련. 국가질서가 무너지고 왕조는 누란의 위기에 처한다.

옥타비아누스에 이어 첫 세습 계승자가 된 티베리우스 황제때 부터 모든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났다. 공화정 시절 원로원과 민회가 최고 권력을 만들어 내는 창구였지만, 황제정으로 오면서 음모와 칼만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강탈하는 유일한 도구가 됐다. 옥타비아누스 이후 96년 12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살해될 때까지 123년동안 11명의 황제 가운데 8명이 암살되거나 자살했다. 자연사한 사람은 옥타비아누스와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3명에 불과하다. 네로가 죽고 난 69년에는 무려 4명의 군인황제가 나타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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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두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트라야누스 황제 이후 반짝 살아났던 로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자신의아들 코모두스에게 황제를 넘겨줘 세습제를 부활하면서 다시 암흑기를 맞는다. 코모두스는 자신을 헤라클레스라고 여겼다. 검투경기 매니아였던 그는 12년간 폭정을 일삼다 암살당했다. 헤라클레스 특유의 사자가죽 외투를 머리에 쓰고, 올리브 나무 몽둥이를 손에 든 모습이다. 카피톨리나 박물관 ⓒ김문환

로마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은 예외는 있었다. 96년 원로원의 지명으로 황제가 된 네르바부터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거쳐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와 9년간 공동 황제)까지다. 이때 로마 제국이 황금시대로 불린 이유는? 세습이 아니라 황제가 검증된 후보자를 양자로 삼아 원로원의 추인 아래 즉위시키는 그나마 합리적인 방식의 왕위 계승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친아들 코모두스에게 권력을 물려 주면서 무능력과 음모와 협잡이 되살아났다. 이후 로마제국은 사실상 건강을 잃었다. 3c 이후 황제는 노예, 농민, 직공계급 출신에서 많이 나왔다. 정상적인 공화정의 절차로 그랬다면 얼마나 소망스러운가? 그게 아니라 군에 들어가 공을 세운뒤 적당한 때 칼로 권력을 쥐었으니 문제다. 제국은 분할되고,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으면서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에게 서로마를 물려 주면서 제국의 중심은 동로마 제국으로 옮겨졌다.

여기다 이민족의 침입이 격화되면서 영화를 누렸던 도시들이 하나 둘 파괴됐다. 410년 서고트족 알라릭의 로마 약탈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동서 로마의 무능한 황제들이 하는 일은 서로를 헐뜯으면서 로마를 위해 충성하던 이민족 출신의 유능한 장군들을 암살해 명줄을 앞당기는 정도였다. 호노리우스는 스틸리코 장군을 죽였고, 발렌티아누스 3세는 갈리아에서 악명 높던 훈족 지도자 아틸라를 물리친 아에티우스 장군을 죽였다. 장군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야수처럼 달려들던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야금야금 자신의 영토로 만들었다. 갈리아는 프랑크와 부루군트, 알레마니족. 이베리아반도는 고트와 수에비족. 브리타니아는 앵글로-색슨족, 북아프리카는 반달족이 차례차례 집어 삼켰다. 그렇게 20여년이 흐른 뒤 476년 9월 용병대장 오도아케르는 16살짜리 서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유폐시키고 서로마 제국의 문을 내렸다. 백만명이 북적이던 제국의 상징 로마의 인구는 불과 3만으로 줄었다. B.C 753년 로물루스로 시작해 천 2백29년만에 로물루스로 끝난 인연이 기이하다. 물론 동로마 제국이 이후 천년간 더 이어졌지만...

◆4. 지중해 문명기 4권을 마치며

2004년 6월. 연초부터 마음도 몸도 지쳐 무척 힘들 때. 언제나 처럼 필자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는 강장제는 있었다. 초심자의 미력이지만, 새로운 것을 탐구하며 글을 쓰는 것. 그때 청춘스타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 안젤리나 졸리 같은 초호화 배역의 영화 '트로이'가 개봉됐다. 영화 내용에 대한 이런 저런 감상과 트로이 전쟁, 그리스 로마 문명, 서양문명의 근간에 대해 몇 마디 적어본 게 6월 4일 '아킬레스, 파틀로클로스, 헥토르'라는 글이었다. 이후 7차례에 걸쳐 관련된 글을 실었다. 그러다 새로운 호기심에 빠져 들었다. 그 동안 필자가 유럽 각지를 탐방하며 촬영한 사진 가운데 도자기 사진의 경우 상당수가 트로이 전쟁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순간 머리에 무엇인가 스쳤다. "그래,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이다."

그러나 왠지 부족해 보였다. 당시 흑백 사진으로 도자기 그림을 소개하며 트로이 전쟁을 얘기하던 책이 번역 출간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트로이 전쟁에 머물지 말고 하나 더 붙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의 건국'. 트로이 전쟁이 결국 로마의 건국으로 이어진다는 게 로마인들의 믿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여름 휴가를 조금 일찍 길게 내 유럽에 갔다. 전에 들렀던 주요 박물관들을 다시 돌며 아쉬우나마 부족한 사진을 보충했다. 그리고, 7월 27일 '1. 신이 만든 도시 트로이'라는 글을 시작으로 필자가 써오던 지중해 문명기 시리즈의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지난해 연말까지 마칠 예정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게을러지는 데다 '2004 그리스 올림픽'이나 영화 '알렉산더'에 맞춰 이런 저런 글을 추가하다 보니 예정을 반 년 넘겨 오늘에서야 '104. 옥타비아누스와 로마의 독재정'을 마지막으로 붓을 놓게 됐다.

글을 마치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올 들어 취재가 바빠지면서 추가 탐방에 나서지 못한 채 부족한 사진으로 글을 메운 아쉬움이 크다. 또, 전문 연구자가 아닌 입장에서 충분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해 전달한 오류도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무엇보다 시의적절하게 시사적인 문제를 고전속의 얘기와 결부시켜 전달하자는 취지에서 이런저런 내용을 넣었지만, 역사발전에 대한 가치관을 달리하는 독자들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모든 점들에 대해서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한 점,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 숙여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동시에 서양 고대사에 대한 평범한 독자로 머물 수도 있지만, 서양의 어제와 오늘을 우리시각에서 바르게 이해하는데 혹시 작으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소박한 바람으로 더 열심히 현장을 발로 누비며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말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한다. 이제 다음주부터 좀더 다양한 사진을 갖고, '지중해 문명기 5권' [모자이크로 읽는 그리스 로마문명]으로 독자 여러분을 다시 만나 뵐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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