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는 “예술은 기호의 두께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공연에 적용시켜 생각해 보면 극작가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기호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관객들은 극작가가 전달한 그 기호들을 읽어내는 일종의 소통의 과정입니다. 기호들이란 배우들의 동작과 표정, 대사와 노래 등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극작가와 관객들의 코드가 일치해 기호를 잘 읽어낸다면 다시 말해 메시지를 잘 이해하고 해석해 낸다면 소통은 성공하겠지만 만약 서로 코드가 다르다면 엉뚱한 해석을 낳게 될 것이고 소통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뮤지컬 ‘헤드윅’은 시종일관 저의 머리를 물음표로 가득한 혼돈 속으로 빠뜨렸습니다. ‘헤드윅’을 창조해 낸 두 주역-존 카메론 미첼, 스티븐 트래스크-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성도 여성도 아닌 제3의 성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본주의와 록앤롤을 좋아했던 한 인간의 기구한 삶의 여정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아니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일까?
뮤지컬 ‘헤드윅’의 메시지를 파악하기 위해 저는 먼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 나서야 했습니다. 자, 이제부터 헤드윅이 그가 사랑하는 토미 그노시스의 공연을 쫓아다녔듯이 저와 함께 생각의 여정을 동행해 보시겠습니까.
존 카메론 미첼과 스티븐 트래스크 콤비는 이 작품의 아이디어를 그리스 철학자인 플라톤의 저서 '향연(Symposium)'에서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리진 오브 러브(Origin of love)'라는 노래로 구체화 됐습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양성설화'가 주된 내용으로 원래 인간은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 붙어있는 3가지 존재였는데 제우스가 번갯불로 그들의 몸뚱이를 서로 갈라놓아 남자와 여자라는 2개의 존재만 있게 됐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인간은 떨어져 나간 반쪽을 찾아 다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의 기원이라는 것입니다.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스스로 게이라고 커밍 아웃했던 존 카메론 미첼은 플라톤의 철학 서적 ‘향연’에 나오는 이 ‘양성설화’로 스스로의 성 정체성을 합리화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문은 여전히 남았습니다. 남성과 여성, 2개의 성만을 인정하는 사회에서 제3의 성이 엄연히 존재함을 ‘헤드윅’을 통해 알리고자 했던 게 과연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전부였을까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기호는 바로 토미 노시스가 쥐고 있었다고 봅니다. 노시스라는 이름을 지어준 사람은 바로 헤드윅입니다. 그리고 헤드윅은 노시스란 그리스어로 ‘지혜’라고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줬습니다. 제우스가 번갯불로 한 몸뚱이를 갈라놓았듯 헤드윅은 토미 노시스에게 버림을 받고, 스타가 된 토미가 공연하는 곳을 끊임없이 뒤쫓아 다닙니다. 왜? 노시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헤드윅은 지혜(노시스)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리스어로 철학자를 의미합니다. 결국 헤드윅은 단순히 드랙퀸이라는 소재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무대에서 잘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토미 노시스(지혜)를 따라 무언가를 찾아 다니는 일종의 ‘로드 무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플라톤의 ‘향연’에 대한 몇가지 논문들을 살펴봤습니다. ‘향연’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얘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잃어버린 반쪽을 꼭 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단지 잃어버린 반쪽이기 때문인가? 잃어버린 반쪽만 찾으면 그것이 최고의 선(善)인가? 만약 잃어버린 반쪽이 엄청난 병에 걸려 썩어 문드러졌어도 단지 찾아서 한 몸뚱이로 합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인가?
소크라테스의 반론에 대해 존 카메론 미첼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중간자, 불완전한 정체성의 긍정적인 면을 생각하지는 않았을까요? 이츠학은 ‘테어 미 다운(Tear me down)’이라는 노래에서 헤드윅을 베를린 장벽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물리적 측면에서 베를린 장벽은 내가 서독인인지 동독인인지를 분명히 구별해 주는 기준물입니다. 불완전한 인간 헤드윅은 자신이 확실한 남성인지, 또는 확실한 여성인지 구별해 주는 성 정체성의 분명한 기준점입니다.
이 생각에 다다르자 몇 가지 의문점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헤드윅은 왜 분단된 독일에서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1961년에 태어났을까? 그리고 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묘한 감정을 전해줬는지도 이해가 됐습니다. 또 왜 1인치만을 남겨 놓은 성전환에 실패한 인물로 설정했을까? 완벽하게 성전환을 한 트렌스 젠더가 아니고 말입니다. 헤드윅은 바로 성 정체성을 확연히 구별해 주는 인간임을-마치 베를린 장벽처럼-보여주는 상징성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은 일종의 복선이 아니었을까요? 베를린 장벽은 곧 헤드윅이었고 그 헤드윅의 존재 가치가 무너져 내린 것 말입니다.
이제 플라톤의 ‘향연’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논리전개의 끝으로 가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무조건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보다는 ‘좋은 것’ 즉 최고의 선(善)을 추구하는 게 사랑, 즉 에로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사랑은 언제가는 없어지는 것이지만 선(善)을 추구하는 사랑은 영원하다고 가르칩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사랑은 영원한 것이라고 했던 헤드윅의 대사가. 토미 노시스로부터 용서의 노래를 듣고 헤드윅은 여장의 탈을 벗어던져 버립니다. 브라 속에 넣었던 가짜 가슴도 던져 버립니다. 슬라이드에 비친 동그라미는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묘한 원을 만들어 갔습니다. 헤드윅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다니면서 했던 여장을 던져 버리고 한셀의 모습으로 돌았습니다. 하지만 헤드윅이 애초의 남성성인 한셀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외모만 여성으로 꾸미지 않는 한셀로 돌아갔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플라톤의 ‘향연’이 이 작품으로 아이디어였고 그 작품대로 변증법적 발전을 했다면 ‘한셀’은 이제 세속적인 차원이 아니라 정신적인 차원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은 합(合)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 이 글은 뮤지컬 잡지 '더 뮤지컬' 6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