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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페넬로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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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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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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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오디세이아와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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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텔레마코스

2. 목욕 문화

3. 키클로페스

4. 세이렌

5. 스킬라, 칼립소, 키르케

6. 페니키아

7. 페넬로페--오늘 이야기

8. 상봉과 최후

7. 페넬로페

◆1. 돌아오지 않는 오디세우스와 기다리는 페넬로페

페넬로페는 한마디로 현모양처(賢母良妻)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아내인 동시에 아들 텔레마코스에게는 자상하고 따듯한 어머니, 시아버지 라엘테스 입장에서 보면 착한 며느리였다. 그러나, 페넬로페 역시 아카이아 연합군의 다른 장군 부인들처럼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 운명이었다.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어야 할 시기에 남편을 전장으로 내보냈으니 말이다. 그것도 아직 포대기에 싸인 젖먹이 아들을 곁에 두고서... 늙으신 시아버지도 보살펴야 하고, 남편이 떠난 집안을 이끌며 재산도 관리해야 했던 페넬로페. 힘에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페넬로페를 힘들게 했던 부분은 결혼하자고 추근대는 남자들. 남편이 멀리 떠난 가운데 연약한 아녀자의 몸으로 10년이나 정절을 지키며 산다는 게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트로이 전쟁이 시작된 처음 몇 년 동안은 큰 문제가 없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남편 오디세우스가 곧 돌아올 것으로 믿었다. 페넬로페나 주변 남정네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이 5년을 넘어 10년이 가까워 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전쟁이 과연 끝나기나 할 것인지, 오디세우스가 돌아올 것인지도 불분명해졌다. 이때, 주변의 유혹이 시작됐다. 더구나, 오디세우스 때문에 죽은 팔라메데스의 아버지 나우플리오스가 복수를 위해 페넬로페에게 인생을 즐기며 살라고 은근히 탈선을 부추기는데 이를 물리친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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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다소곳하게 앉아 무엇인가 고민하는 표정의 페넬로페 부조 작품이다. 페넬로페는 현모 양처의 전형을 보여준 여인이다. 또, 아카이아 연합군 장군들 부인 가운데 유일하게 20년간 수절한 여인이기도 하다. 알테스 박물관. ⓒ김문환

전쟁이 끝나면서 문제가 더욱 불거졌다.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많은 아카이아 연합군 장수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지는 못해도 죽었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 생사여부는 분명히 가려졌다. 그런데, 유독 오디세우스만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무소식이었다. 답답한 것은 페넬로페. 빨리 살아 돌아와 가정을 다시 일궜으면 좋으련만 무심한 남편은 도대체 어디로 가서 돌아올 줄 모른단 말인가? 차라리 죽었다는 얘기라도 있으면 마음이라도 후련하겠건만... 페넬로페는 남편이 살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믿음을 버린 것도 아니다.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변 남정네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이거 다른 장군들 다 돌아왔는데 안왔다면 오다가 물에 빠져 죽었거나, 다른 여자 만나 먼 곳으로 가 딴 살림 낸 게 틀림없어. 그렇다면, 아름다운 페넬로페는 재혼을 해야 하고... 우리 가운데 한명이 그녀를 맞이해야 돼. 그러면 오디세우스의 궁정과 재산은 모두 재혼한 남자 즉 우리 중 한명의 차지가 되는 거야. 생각만 해도 멋지군. 하하하" 모두들 만면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아름답고 돈 많은 페넬로페와 결혼하는 행운아가 자신일 것이라는 행복한 꿈에 젖었다. 우리식으로 김칫국을 마셨다. 한량들은 아예 페넬로페가 사는 오디세우스의 궁정에 거처를 마련했다. 이미 기력을 잃은 시아버지 라엘테스는 밖에 나가 살았고, 아들 텔레마코스는 이제 막 성년이 됐지만 혼자 힘으로 무뢰한들을 막아내기에는 무리였다. 하인들도 한계가 있고...

오디세우스의 기름진 농장에서 재배하고 기른 곡식과 고기를 마음대로 꺼내 먹으며 연일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는 자신들 가운데 신랑감을 고르라고 생떼를 썼다. 이들의 위압적인 기세에 눌려 함부로 거절도 못하고, 그렇다고 정말 고를 수도 없고... 고민하던 페넬로페는 꾀를 냈다. 늙으신 시아버지 라엘테스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돌아가신 뒤 입을 수의(壽衣)라도 지어드리는 게 며느리로서 마지막 도리를 다하는 것"이라면서 수의를 다 지을 때까지만 말미를 달라고 요청했다. 한량들은 그러라고 했다. 그까짓 수의 좀 짜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랴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수의가 완성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낮에 페넬로페는 청혼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베틀에 앉아 열심히 수의를 짰다. 그러나 밤이면 도로 풀러 냈다. 그러니, 달이 가고 해가 가고 3년이 넘도록 수의 짓는 일은 제자리 걸음. 뒤늦게 알아차린 청혼자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험악한 상황을 연출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명분이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2. 페넬로페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국한 아카이아 연합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바람난 아내 클리템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죽었다. 불륜이 저지른 끔찍한 남편 살해극. 그것도 아카이아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자, 그리스 문명권에서 가장 부유한 왕국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왕비의 부정 때문에 죽다니...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참지 못한 고통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클리템네스트라나 페넬로페 둘다 마찬가지였건만... 바람나 남편을 죽이는 여인이 있는가 하면 전쟁 나간 남편을 20년이나 기다리며 온갖 유혹을 물리치는 여인도 있다. 아니 아카이아 연합군 장군 부인 가운데는 페넬로페가 유일한 수절 여인이었다.

페넬로페의 이런 품성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하나. 헬레네의 아버지 틴다레오스는 페넬로페의 작은 아버지다. 헬레네와 결혼하기 위해 스파르타에 갔던 오디세우스는 헬레네와의 결혼을 포기하는 대신 틴다레오스에게 점수를 따 헬레네의 사촌인 페넬로페와 결혼하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이 작전이 먹혀들어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를 차지한다. 일설에는 페넬로페의 아버지 즉 틴다레오스의 형인 이카리오스가 동생의 추천에만 의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경주를 벌여 기량을 겨룬 뒤 여기서 우승한 오디세우스에게 딸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카리오스는 사위가 마음에 들었는지, 오디세우스에게 이타카로 가지 말고 자기 곁에서 살라고 권했다. 딸가진 부모 마음이야 다 그렇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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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우스. 大아이아스와 죽은 아킬레스의 무구를 차지하기 위해 다투는 모습이다. 아이아스는 머리가 좋아 수많은 작전을 짜냈지만, 무예도 뛰어났다. 아내 페넬로페를 차지하기 위한 경주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성정도 곧아 장인과 다투면서까지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루브르. ⓒ김문환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한국의 성리학적인 윤리에 집착한 사람이었다. "보리 서말이 있으니 처가살이는 안됩니다. 아내를 데리고 제 고향으로 가겠습니다." 장인과 사위 사이에 다툼이 벌어지고. 급기야, 오디세우스는 새색시 페넬로페에게 최후 통첩을 보냈다. "아버지와 남편 가운데 한명을 고르라." 아! 잔인한 오디세우스. 착하고 여린 페넬로페가 무슨 말을 하라고... 페넬로페는 얼굴만 붉히고 말았다. 그래도 부부간 사랑보다 자식사랑이 더 진한가 보다. 이카리오스가 딸의 미래를 생각해 오디세우스와 떠날 것을 허락해 줬다. 그렇게 시작된 이타카에서의 신혼 살림이 전쟁으로 일그러져 버렸으니... 20년 독수공방의 페넬로페.

사실, 우리네 현대사를 돌아보면 이보다 더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이 줄을 선다. 6.25로 아니 그 이전부터 월남과 월북으로 생이별한 남편과 아내가 상봉하며 50년, 60년만에 금강산 일만 이천봉 앞에서 쏟아내는 눈물은 더 이상 눈물이 아니다. 수십년 한이 녹아 든 핏물이다.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겨 주는 가르침의 큰 말씀이다. 참고로 [오디세이아]를 비롯한 주류 전승과 달리 페넬로페가 정조를 지키지 않았다는 설도 전한다. 129명이나 되는 청혼자 모두에게 돌아가면서 몸을 내맡겼다는 것인데... 참 전하기도 뭐한 내용이다. 그사이에서 둘째 아들을 낳았다는 설도 있고... 그래서 오디세우스가 페넬로페를 내쫓아 버렸다고도 하고...

◆3. 개가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다

이타카에 도착해 처음 산중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 거처를 정했던 오디세우스. 목장지기를 통해 자신의 궁정 내부 사정을 소상히 전해 들었다. 아내를 괴롭히며 자신의 재산을 축내는 청혼자들을 생각 같아서는 당장 쳐들어가 끝장 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은 외톨이 신세. 무력으로 제압할 상황이 안됐다. 지혜를 모아야 한다. "어쩐다." 고민하는 오디세우스 앞에 스파르타에 갔던 아들 텔레마코스가 나타났다. 아버지의 생사에 관한 소식을 물으러 떠났다가 결정적인 단서도 찾지 못한 채 귀국한 텔레마코스지만, 아버지 오디세우스는 어른으로 자란 아들의 씩씩한 모습에 가슴 끝이 찡해졌다. "애비 없이도 잘 컸구나. 고맙고도 기특한 녀석."

마침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궁정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건축해 애정을 쏟으며 다듬었던 궁정. 그러나,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남루한 차림의 거지 행세.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청혼자들도 하인들도. 오직 하나의 생명체만이 오디세우스를 알아보는데... 오디세우스가 기르던 늙은 개 '아르고스'. 개가 사실 20년을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 치면 백살을 훨씬 넘겨 산다는 것인데... 움직일 힘조차 없이 늙어 땅에 쭈그리고 엎드려 있던 아르고스. 인간이 외면한 주인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주인을 반기려 일어나다 그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태국의 불교식이라면 죽어서 오디세우스가 됐을까? 오디세우스는 나중에 개가 되고? 사실, "개만도 못한 00." 라는 험한 말을 종종 쓴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와 아르고스의 일화를 보면 개를 그리 낮춰 볼일도 아니다.

청혼자들의 박대를 물리치고 간신히 아내 페넬로페와 마주 앉은 오디세우스. 아내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자신을 몰라보는 게 아닌가! 늙은이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에게 "당신의 남편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습니다. 반드시 돌아옵니다."는 말을 전했다. 페넬로페는 앞에 앉은 노인네가 남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왠지 측은해 보이는 오디세우스에게 방을 내주고 쉬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워낙 품성이 고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당시 관행대로 주인집 행랑채에 여장을 풀었고, 하녀가 그를 목욕시켜줬다. 그런데, 손님 오디세우스의 몸을 닦아 주던 늙은 하녀. "악!" 소리를 지른다. 오디세우스의 발에 난 상처를 본 것이다. 주인 어른 오디세우스임을 알아챘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재빨리 하녀의 입을 손으로 틀어 막았다. 아직은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면 안되는 일. 청혼자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를 잡기 전까지 진실이 공개되면 안됐다. 자신이 돌아왔다는 것을 청혼자들이 알 경우 자칫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청혼자들은 지금 착하고 아름다운 페넬로페를 차지하고 오디세우스의 재산까지 손에 넣기 위해 혈안이 돼 있다. 미인과 재산이라는 인생에서 찾기 어려운 두마리 토끼를 손에 쥐려는 순간 그 꿈을 결정적으로 깨트릴 남편이 돌아왔다면... 청혼자들은 제정신을 잃고 말 것이다. 합심해 오디세우스를 처단할게 틀림없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좀더 확실한 계략을 세워 청혼자들을 처단할 시점까지는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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