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안은 이렇습니다. 지난 2000년 7월, 대구에 있는 한 대학교에서 교수가 제자인 여학생을 성추행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이 교수는 제자와의 합의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을 하다가 나중에 강제 성추행 혐의가 인정돼 구속 기소되기에 이르렀는데 수사가 이뤄지기 전에 대구 여성의 전화가 나섰습니다. 대구 여성의 전화측은 이 교수를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렸습니다. 소식지에도 그 성명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 성폭력 교수 실명 공개했다가 명예훼손 고소 당해
그런데 그 성명서에는 이 교수의 학과와 실명이 그대로 공개되었는데 이번에는 이 교수가 자신의 실명을 공개한 것과 관련해 대구 여성의 전화 전현직 대표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게 된 겁니다. 자신이 성추행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명을 공개하는 바람에 명예를 훼손당했다는 것이지요. 여성단체들은 성폭력 행위자가 거꾸로 이 문제를 거론한 사람을 고소한 사건이라며 아예 '성폭력 역고소 사건'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비록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에 따른 형사적 처벌이나 민사적인 책임과는 별개로 실명을 공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게 된 것은 심하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고 교수가 제자를 성추행 했다니 그렇게 매장되는 것이 오히려 마땅하다고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
대구지방법원은 유죄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사건도 하나 같이 끼어 있습니다만 단독 판사가 맡은 1심에서는 벌금 2백만원, 항소부에서 맡았던 2심에서는 벌금 1백만원이 선고됐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당사자의 실명을 공개한 것은 명예 훼손에 해당한다는 것이지요.
■ 1, 2심은 유죄... 대법원은 무죄 판결
지난달 29일에 이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 선고됐는데 결론은 무죄였습니다. 대법원은 이런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먼저 대상이 되는 사건이 공인의 공적 활동에 관련된 것인지, 일 자체가 공적인 관심사에 해당하는 것인지, 또 문제가 된 사건이 당사자가 스스로 초래한 것인지, 표현 등이 객관적이며 주관적인 비난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이 그것입니다.
이 사건의 경우 현직 대학교수가 제자를 연구실로 불러서 성추행을 한 만큼 교육행위와 관련이 있어 공인의 공적 활동에 관련된 것이고 스스로 성추행을 함으로써 비난을 자초했고 학교 내에서의 성폭력은 공적인 관심사에 해당하는 것이고 당시 인터넷에 공개된 내용은 단순히 사실관계를 적시한 것으로 비방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 대법원, "공인의 공적 활동 관련한 진실 공표는 공익성 인정해야"
더구나 이 단체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을 방지하는 것을 주된 활동 목표로 하여 설립된 것으로 학내 성폭력을 방지하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실명을 공개한 것인만큼 원칙적으로 공익성이 인정된다는 판단도 했습니다. 공익적 목적에 따라 행해진 활동을 유죄로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체가 사건이 다 끝난 뒤에 성폭력 행위자의 이름을 공개하는 등 일종의 '처벌'을 하려 했다면 아마 판결이 다르게 나왔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 발생 초기에 진상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실명을 공개했다고 하더라도 명예훼손이라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이 판결의 기본 취지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언론 보도에서라고 한다면 특별히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유명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실명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한가지 덧붙일 것은 다른 한 교수의 성폭행 사건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이 교수는 술에 취한 제자를 성폭행했는데 대구 여성의 전화측은 피해 학생의 말을 인용해서 "술에 마취제를 탔다"라든가 "상습범일 가능성이 높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대법원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관계에 대한 확인 없이 일방적인 진술을 그대로 옮겼고 추측까지 해서 "상습범일 가능성이 있다"고 까지 한 것은 비방에 해당한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공익성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본 것이지요.
■ "비방 목적의 발표는 공익성 인정 안 돼"
제가 이 판결을 소개해 드리는 건 우리 사회에서 공인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공적인 사안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해도 되는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조금씩 구체화되고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일단 이번 사건에서 대학교수는 공인임에 분명해졌고 대학교수가 학생 지도 과정에서 벌인 일은 일단 공적 활동에 관련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게 되었군요. 그리고 학내에서의 성폭력 문제는 공적인 관심사라는 것도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판례가 계속 쌓이면서 이런 문제에 대한 기준이 좀 더 구체화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