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5장. 트로이 함락
1. 트로이 목마
2. 트로이 함락과 대학살
3. 카산드라
4. 라오콘
5. 프리아모스
6. 안드로마케--오늘 이야기
7. 아스티아낙스, 헬레노스
8. 폴릭세나
9. 헬레네 고향으로
10. 아가멤논의 죽음
11. 오레스테스의 복수
12. 고대 그리스의 불륜
6. 안드로마케
◆1. 아킬레스와 안드로마케의 악연
안드로마케. 갈색머리에 큰 키로 당당한 인상이었다고 전해지는 안드로마케의 인생을 들여다보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이렇게 기구(崎嶇)할 수가 있을까? 팔자가 드센 여자라는 말이 있다. 부모 밑에서 곱게 커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 낳고 살다 늙어 죽는 평범한 여인네의 삶이 아니라, 꼬부라지고 험준한 산길처럼 순탄하지 못한 세상살이와 가탈에 시달리는 여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어려서 가난하게 자라거나 부모없이 험하게 살더니 나이 들어서는 서방복도 없어 결혼이 늦어지거나 괴팍한 사람과 맺어져 고생한다. 자식농사도 잘 안되고, 건강을 잃는등 말년도 좋지 않은 그런 여인네. 한(恨)으로 점철된 한평생. "이렇게 박복한 년이 있을까?" 라고 신세 한탄하는 여인들은 안드로마케의 인생을 참고로 들여다 보는게 좋겠다. 물론 안드로마케의 인생이 처음부터 꼬인 것은 아니다.
병사와 아내의 이별.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장면은 감동을 전하는 명장면으로 손색없다. 루브르. ⓒ김문환
안드로마케는 트로이 왕자요, 트로이를 실질적으로 지도하던 헥토르의 아내다. 결혼하기 전 친정집부터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미시아 지방 테베의 왕이었다. 공주라! 얼마나 행복한 처녀시절을 보냈겠는가? 자라서는 단일국가로 동방 최고의 부국이던 트로이의 왕자, 그것도 차기 대통을 이어받을 왕세자 헥토르와 결혼했으니... 세상 여성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신분임을 눈치 챌 수 있다. 그녀의 불행은 트로이 전쟁과 함께 시작된다. 전쟁 9년째 미시아를 공략한 아킬레스는 트로이와 사돈 나라인 테베를 점령했다. 그냥 재물이나 약탈할 것이지... 아킬레스는 테베를 철저히 파괴하고 안드로마케의 친정 식구들 그러니까, 아버지 에티온은 물론 많은 형제들을 몰살시켰다.
불행은 시작일 뿐이다. 아킬레스는 전쟁 10년째 결투에서 마침내 안드로마케의 남편 헥토르 마저 죽였다. 안드로마케 입장에서 보면 친정 아버지와 형제들은 물론 남편까지 아킬레스에게 죽었으니 그 슬픔의 크기란... 그러나, 아직도 전주곡에 불과하다. 더 큰 고통이 기다린다. 부모나 남편이 죽으면야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한다. 안드로마케에게 그런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와 사이에서 한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름은 아스티아낙스. 아킬레스가 그를 죽였는가? 그렇지는 않다. 아킬레스는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어 트로이 함락시 아스티아낙스를 죽일 수 없었다. 아킬레스가 아니라면... 그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참전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참전하자 마자 아버지 아킬레스를 닮아 혁혁한 공을 세운다. 오디세우스와 함께 목마 안에 숨어 들었다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잔인한 학살이 그의 일거리였는데...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도 죽였다. 그러니, 트로이를 상징하는 프리아모스-헥토르-아스티아낙스로 이어지는 3대는 아카이아 연합군을 상징하는 아킬레스- 네오프톨레모스 2대에게 처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아! 간악한 일제(日帝)의 손에 징용으로 끌려가 오키나와에서 비행장을 닦다 미군 폭격으로 한쪽 팔을 잃은 박만도가 떠오른다. 약소민족의 일원으로 살던 박만도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의 불행이 아들 진수에게도 이어지는데... 진수는 6·25전쟁에 나가 동포와 싸우다 다리를 잃고 만다. 기차를 타고 귀향한 아들. 팔을 잃은 아버지와 다리를 잃은 아들이 역에서 집으로 돌아오다 아버지가 아들을 업고 개울을 건너는 장면에서 코끝은 물론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던 20c 민족 수난사의 축소판, 하근찬의 수난이대(受難二代)가 스쳐지난다.
헥토르의 장례식에서 오열하는 안드로마케. 로마시대 석관을 장식하던 부조다. 안드로마케는 갈색머리를 휘날리는 키큰 여성으로 흔히 묘사된다. 루브르 ⓒ김문환
네오프톨레모스는 아버지에 이어 트로이 왕가 3대를 도륙낸 뒤 참 잔인한 짓을 하나 더 덧붙이는데... 헥토르의 아내이자 자신이 죽인 아스티아낙스의 어머니 안드로마케를 전리품으로 챙겼다. 자신의 여인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이런 비극이 있나!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었는데, 그 자식을 죽인 자를 밤마다 가슴에 안아야 하다니... 모진 목숨은 끊어지지도 않고... 안드로마케가 밤낮으로 흘려댔을 눈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네오프톨레모스는 보무당당 안드로마케와 기타 전리품을 가득 쌓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 잘 살았다는 설은 앞서 [46. 네오프톨레모스] 편에서 살펴봤다. 이제는 그가 행복한 삶 대신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는 즉 암살당했다는 설을 따라가 본다. 안드로마케의 운명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2. 지속되는 불운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를 데리고 화려하게 귀향했지만, 출발부터 앞날이 밝지 않았다. 여자문제로 불운을 겪을 참이었다. 화근은 트로이 전쟁을 유발한 헬레네의 딸 헤르미오네. 헬레네를 데리고 귀국한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에서 행복한 삶을 이어갔다. 그리고, 자신들의 딸 헤르미오네를 네오프톨레모스에게 결혼시키기로 했다. 네오프톨레모스에게는 트로이에서 데려온 안드로마케가 있었으니, 결혼 순서로 치자면 안드로마케가 첫부인이다. 그러나, 적국의 여자이니 포로로 잡은 첩의 수준으로만 여겼을 것이고... 당시 전쟁 뒤 시녀 차원에서 포로를 데려오는 것은 큰 흠이 아니었다. '오디세이아'에는 네오프톨레모스와 헤르미오네의 결혼식 준비로 바쁜 스파르타 왕궁을 묘사하고 있다.
프리아모스가 네오프톨레무스에게 죽는 장면. 프리아모스는 바닥에 깔려 있고, 네오프톨레모스가 손에 아스티아낙스를 잡고 프리아모스를 내리친다. 오른쪽 흰 피부의 여인이 안드로마케. 브리티시 뮤지엄 ⓒ김문환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른 네오프톨레모스와 헤르미오네 부부. 여기에 트로이에서 와 먼저 네오프톨레모스와 같이 살고 있던 안드로마케. 한지붕 세사람. 정확히 한 남자에 두 여자. 집안이 편할 리 없었다. 남녀관계에서 갈등의 골을 심화시키는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예나 지금이나 자식 문제. 안드로마케가 네오프톨레무스의 아들을 무려 3명(몰로소스, 피엘로스, 페르가모스)이나 낳은데 반해 헤르미오네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 첩실이 자식을 낳지 못하면 크게 흠될 일이 없지만, 정부인이 후사를 생산하지 못한다면 여간 긴장할 일이 아니다. 숙종비 인현왕후처럼 자식 낳은 장희빈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는 여인을 매번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 뭔가 비극이 싹터 올랐다.
안드로마케는 심하게 견제당하고 질투를 받았다. 마침내 시기심에 불타오른 헤르미오네는 무서운 계략을 꾸몄다. '네오프톨레모스를 죽이자.'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이런 끔찍한 일, 즉 남편 살상극을 저지르기 어렵다. 요즘 가끔 뉴스를 장식하는 치정에 얽힌 부부 살인극에서 봐도 그렇다. 누군가 공범이 가세한다. 공범이 아내의 애인이라면 거칠 것이 그 무예라. 남편의 사랑을 잃었다고 생각하거나, 남편 대신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인의 마음은 옛부터 근역(槿域)에서 '오뉴월 서리'에 비유해 왔다. 추워지는 겨울 문턱의 서리도 모든 생명력에 죽음의 그늘을 덮어 주는데, 한창 무더워지는 초여름의 신록에 서리는 흰색 비상(砒霜)가루 섞인 사약사발 만큼 강력하다. 아버지 아킬레스에 이어 아카이아 연합군 최고 용장으로 활약했던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렇게 죽었다.
네오프톨레모스가 아스티아낙스를 안드로마케로부터 빼앗는 장면. 미코노스 박물관. ⓒ김문환
헤르미오네가 끌어들인 애인이 누구인지 궁금해 진다. 오레스테스. 아가멤논의 아들로 헤르미오네와는 4촌이다. 그는 일찌감치 헤르미오네의 정혼자로 정해졌고,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갑자기 메넬라오스가 헤르미오네를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시집보내면서 오레스테스는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았다. 분개하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네오프톨레모스와 갈등을 겪으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이어가던 헤르미오네, 즉 죽도록 사랑하던 옛 연인으로부터 연락이 온게 아닌가! "그대를 잊지 못하노니 다시 와서 나를 행복하게 해주시오" 사랑하는 여자에게서 버림받은 남자가 가슴 쓰라린 실연의 고통을 겪고 일어나 가장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바로 이 말 아닐까? 지금 돌이켜보니 당신만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그 말에 물불 가릴 남자는 찾기 어려우리라.
오레스테스가 앞 뒤 재지 않았을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 천하의 명장 네오프톨레모스를 죽이는 일이라도... 오레스테스가 네오프톨레모스를 죽이는 과정은 2가지 설로 전한다. 오레스테스가 네오프톨레모스를 에페이로스에서 죽였다는 것과 델피에서 살해했다는 것. 델피에서 암살했다는 설이 좀더 극적인 얘기 전개구조를 갖는다. 사연은 이렇다. 안드로마케와 달리 헤르미오네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네오프톨레모스는 델피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신탁을 구하러 갔다. 정비가 아이를 낳아야 하는데... 그러나, 그 길은 황천길이 되고 말았다. 헤르미오네의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오레스테스가 네오프톨레모스의 숨통을 끊었다.
델피. 아폴론 신전. 네오프톨레모스는 델피에서 암살돼 어딘가에 묻혔다고 한다. ⓒ김문환
다른 설도 전하는데, 델피에 온 네오프톨레모스가 제물을 배분하는 문제로 아폴론 신전 여사제 피티아와 다퉜다는 것이다. 화가 난 피티아가 델피 사람들에게 그를 죽이도록 명령해 네오프톨레모스가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이설을 믿는 사람들은 아폴론의 앙갚음이라고 덧붙인다. 아폴론은 트로이 전쟁에서 줄기차게 트로이를 응원했는데, 아킬레스가 트로이 사람들을 숱하게 죽인데 대해 무척 감정이 상해 있었다. 그런 차에 자신의 신전인 델피 아폴론 신전 신탁소에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오자 그를 해치도록 일을 꾸몄다는 것이다. 델피 암살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네오프톨레모스가 델피 어딘가에 묻혔다고 믿는다.
◆3. 말년의 안드로마케
안드로마케와 그 아들 3명은 가까스로 죽음의 덫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다시 한번 남편을 잃은 안드로마케. 기막힌 그녀의 인생은? 네오프톨레모스는 헥토르의 동생이자, 카산드라의 쌍둥이 형제, 즉 안드로마케의 시동생인 헬레노스를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헬레노스는 파리스가 죽은 뒤 형제 데이포보스와 헬레네를 놓고 다투다 진 뒤 앙심을 먹고 조국을 배반했다. 이다산으로 들어가 자청해서 반역을 했다는 설과 아카이아 연합군의 포로가 돼 어쩔 수 없이 아카이아 연합군을 위해 충성했다는 2가지 설로 나뉘어 전한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헬레노스를 살려 귀국시 대동했다. 그의 예언능력에 여러 번 효험을 봤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내 헤르미오네의 배반으로 최후를 맞게된 네오프톨레모스는 죽으면서 자신의 왕국과 또 다른 아내 안드로마케를 헬레노스에게 줬다. 이렇게 해서 안드로마케는 다시 시동생과 결혼하는 운명으로 이어진다. 참...
페르가몬.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가 죽은 뒤 시동생 헬레노스와 다시 결혼한다. 그러다, 헬레노스가 죽은 뒤 아들 페르가모스와 함께 오늘날 터키땅 서부연안으로 와서 나라를 세운다. 나라이름은 아들 이름을 따서 페르가몬으로 불렀다. 페르가몬 유적지에서 터키인과 함께. ⓒ김문환
훗날 베르길리우스가 적은 [아에네이드]에는 아에네아스가 트로이를 떠나 유랑할 때 에페이로스에 우연히 들렀다가 결혼해 사는 4촌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 부부를 만나는 것으로 기록된다. 안드로마케는 헬레노스와도 해로하지 못한다. 헬레노스가 먼저 죽자 늙은 안드로마케는 막내 아들 페르가모스를 따라 에페이로스를 떠났고, 이들은 오늘날 터키 서부연안의 한 지역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새로 나라를 일궈 다스렸다. 아들의 이름을 딴 페르가몬. 안드로마케는 페르가몬에서 죽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