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내가 식물인간이 돼도 날 사랑하고 지켜 줄거야?” “거럼” “하지만 난 그런 추한 모습으로 삶을 연명하고 싶지 않아. 내가 만일 그렇게 된다면 그냥 죽게 내버려 둬야 해.” “됐네. 배고프다 밥이나 먹자.”
플로리다에 사는 테리 시아보와 마이클 시아보 부부도 신혼 시절 비슷한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아내가 지나치며 한 말을 남편도 그냥 흘려 들은 정도 아니었겠나 싶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 말 한마디에 무거운 책임을 지워 버렸습니다. 어느 날 테리에게 심장발작이 찾아와 15년을 식물인간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던 아내였기에 병실에 누워있든 의식을 찾지 못하든 남편은 하루라도 더 살려보려고 애썼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버린 순간 마이클은 언뜻 아내와의 옛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아내의 마지막 소원일지도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마이클은 법원에 아내의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선인 영양공급 튜브를 제거하게 해 달라고 청원합니다.
그러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죽게 된다는 사실을 들은 테리의 부모들 역시 마이클의 시도를 막아달라고 청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테리를 중심으로 똘똘 뭉쳤던 가족은 풍비박산나고 지리한 법정공방이 이어졌습니다. 법원의 판단에 따라 영양공급 튜브를 연결했다 끊었다를 반복하기를 8년. 지난 3월 18일 최종 판결로 튜브는 완전히 제거되고 미 의회와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 막판 뒤집기를 시도했지만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테리는 결국 지난 1일 영양공급 중간 13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제 개인의 감정은 테리를 살리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테리에게 의식이 있다면 강제로 숨지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의식이 없다면 어차피 죽으나 사나 다를 게 없는데 가족이 나서서 일부러 죽일 이유는 없지 않냐는 판단이었습니다.
미국의 방송들도 연일 테리의 참담한 처지를 전하면서 튜브 제거 반대 시위 등을 보도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론은 달랐습니다. 의회가 영양공급 튜브 제거를 지연시키는 법안을 통과시킨 일이나 부시 대통령이 이 문제에 개입하는데 다수가 반대했습니다. 개인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것이었습니다. 테리가 숨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건국 정신인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침해하게 할 수는 없다는 논리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좀 무리해서라도 강제로 상황을 뒤바꿀 수 있었던 부시 형제가 안타깝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결국 손을 놨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튜브 제거에 반대하는 것으로 보수세력의 지지를 얻고 동시에 행동에 나서지 않는 방식으로 다수 유권자들의 경계심을 풀어 보자는 두 마리 토끼 잡기였던 것입니다.
테리의 시신은 곧 부검을 받을 예정입니다. 논란의 중심이었던 의식 존재 여부를 판단하려는 시도지만 의사들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라고 합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을 강제로 죽였다는 비난과 이미 죽은 사람에게 영양을 공급해 억지로 신진대사를 유지하는 것은 존엄성 침해라는 반박 사이의 논란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딱한 사람들은 결국 테리의 부모들입니다. 그들의 처지를 곱씹어 생각해 보면 억장이 무너질 일입니다. 저는 제 딸이 어느 날 시커먼 사내 녀석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결혼하겠다는 말만 해도 은근히 분통이 치밀지 않을까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 녀석이 정말 우리 딸을 사랑해 줄까? 저거 어디서 나쁜 짓 하고 다니는 놈은 아닐까? 내가 어떻게 키운 아이인데 이렇게 불쑥 나타나서는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하물며 식물인간이 된 불쌍한 딸을 남편이라는 자가 말 그대로 죽이겠다고 나선다면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더구나 온갖 청원이 다 무산된 뒤에 딸의 마지막 길을 임종이라고 하겠다고 부탁하는데 이 작자가 그것마저 거부했다면 말입니다.
이런 부모의 처지를 미국인들이라고 몰랐을 리 없는데도 다수가 튜브제거를 막으려는 의회와 행정부의 시도에 반대한 것은 아마도 다른 변수가 작용한 결과 아닌가 싶습니다. 남편의 주장과 부모의 심정을 비교하고 내린 판단이라기 보다는 공화당 정부가 도덕을 명분으로 개인의 생활에 간섭하려고 한다는 의심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었나 추측해 봅니다. 영양공급 중단에 반대했든 찬성했든 미국인들은 깊은 아쉬움과 애도로 테리의 마지막 길을 환송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해 전 안락사 논란이 번진 적이 있습니다. (테리의 경우는 엄밀히 말하면 안락사는 아닙니다. 안락사란 의식이 있는 사람이 마지막 길을 평화롭게 떠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게 보다 정확한 뜻입니다.) 의사 협회가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규정을 만들겠다고 나서면서 불거진 논란이었습니다.
“의학적으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의 자율적 결정이나 가족, 대리인이 진료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할 경우, 의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있다. 환자나 가족이 회생 불가능한 환자에 대해 의학적으로 무익한 진료를 요구할 경우, 의사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의사 협회의 논리는 무의미한 생명 연장은 가족에게 금전적으로나 정신, 육체적으로 무의미한 부담만 가중되고 다른 생명을 살리기 위한 장기이식에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 죽은 환자를 돌봐야 하는 가족들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통계를 봐도 전체 의료비의 30%가 죽기 전 3개월 동안에 지출되는 것으로 미뤄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위해 “허비”되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종교 단체들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습니다. 일부 사회학자들도 새겨들을 만 한 지적을 했습니다. 소극적 안락사의 희생자는 극빈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부터라는 주장이었습니다. 병원비용 부담이라는 게 가난한 사람일수록 더 무거울 테니 안락사가 허용된다면 항상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먼저 죽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었지요.
안락사를 둘러싼 논란은 역사를 관통하며 계속돼 왔습니다. 기록에는 16세기에 토마스 모어가 자신의 저서 유토피아에서 안락사 허용을 처음 주장했다고 하지만 아마도 논란은 그 이전부터 시작됐을 것이고 앞으로도 끊이지 않을 수 밖에 없을 듯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제 마음은 테리의 부모쪽, 그리고 안락사 반대 쪽에 조금 더 기울어 있습니다. 하지만 감히 한쪽을 선택하는 만용은 자제하려고 합니다. 대신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안락사 논쟁 당시 법주사 석지명 스님이 한 매체에 기고한 견해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맺을까 합니다.
“불치병에 걸렸을 때 의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고통을 견디며 오래 살아 다겁생의 악업을 녹이겠다고 하는 것 두 쪽 다 용기 있는 결단이다. 반면 보살피는 우리는 환자가 주변에 폐를 끼치는 것이 미안해 죽음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제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