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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3

지중해 문명기 4권BRBR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BR 글 싣는 순서 BR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BR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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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
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3,4,5,6,7. 아킬레스 1.성장, 2.참전,3.사랑,4.브리세이스,5.헥토르와 대결,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11,12,13. 올림픽 1,2,3,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31,32,33,34,35,36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6,7,8,9,10,11

37,38,39.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1,2,3--오늘 이야기

40.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39. 알렉산더의 자취를 따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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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B.C 334년 그리스 본토 펠라에서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알렉산더의 궤적을 직접 지도로 그려봤다. 손작업이다 보니 도시의 위치가 다소 정밀하지 않을 수 있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알렉산더는 흑해와 지중해를 가르는 헬레스폰트(다다넬즈)해협을 건넌 뒤 트로이에 들러 제를 올렸다. 이어 페르가몬, 에페스등 이오니아 지방과 할리카르나소스, 이수스를 거쳐 티레, 아코등 옛 페니키아 지역의 도시들을 점령했다. 나일강의 멤피스, 알렉산드리아등 이집트를 손에 넣은 뒤 다시 북으로 올라와 과가멜라 전투를 치르고,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등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들을 접수했다. 이어 페르시아의 동쪽 변방 소그디아나, 박트리아, 간다라 지방을 공략한 뒤 인더스 강 건너 강력한 인도의 코끼리 부대와 격전을 치렀다. 이후 퇴각을 결정해 인더스강을 따라 남하해 인도양에 닿았다. 서쪽 게드로시아 사막을 가로질러 파사르가드에 돌아온 때가 B.C 324년. 무려 10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수사에서 B.C 324년 합동 결혼식을 치르고 이듬해 B.C 323년 아라비아와 카르타고, 로마의 원정을 앞두고 제국의 중심부이자 수도 바빌론에서 숨을 거뒀다.

◆ 18. 아코, 카이사리아, 야파, 가자--B.C 332년

 페니키아의 본거지는 비블로스, 시돈, 티레였지만 그 남쪽, 그러니까 오늘날 이스라엘 영토로도 여러 도시를 건설했다. 이집트를 왕래하는 무역선들의 중간 기항지로 아코, 카이사리아, 야파, 가자등의 도시가 해안을 따라 들어섰다. 티레를 함락시킨 알렉산더의 다음 여정은 당연히 이집트다. 지구상 최고(最古), 최대(最大)의 유적을 간직한 나라요, 풍부한 곡물이 생산되는 역사와 풍요의 땅 이집트. 히타이트부터 앗시리아, 페르시아등 오리엔트 각국이 차지하고 싶어했던 영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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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 십자군시대 만든 성벽. ⓒ김문환

카이사리아 극장 유적. ⓒ김문환

 할리카르나소스와 티레의 페르시아 함대를 궤멸시켜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던 알렉산더는 말고삐를 조여 서둘러 이집트로 향했다. 먼저 들린 곳은 아코(Acre). 성서에 아코(Akko)라고 불리는 도시다. 페니키아 시절 양질의 모래로 유리산업의 주요 원료 공급지였던 아코는 B.C 332년 알렉산더 일행이 들이닥치자 아무런 저항 없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았다. 오랜 공방전 끝에 함락된 티레가 얼마나 가혹한 대가를 치렀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에서 마케도니아로 지배자를 바꾼 아코는 이후에도 큰 탈없이 순조롭게 중간 무역항으로 발전한다. 아코는 헬레니즘 시절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창시자 이름을 따 프톨레마이오스로 도시이름을 바꿨다. 아코라는 이름은 천여년 가까이 지난 636년 이슬람 세력이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이 도시를 빼앗으면서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그리스 문명권으로부터 이탈을 의미한다.

 알렉산더는 아코에 이어 카이사리아를 지났다. '카이사리아(Caesarea)'라는 도시명은 로마시대 카이사르(Caesar)의 이름을 딴 것이다. B.C 4c 처음 페니키아 인들이 만들 때는 스트라토의 탑(Strato's Tower)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오늘날 카이사리아를 찾으면 로마시대 총독이 거주하던 관저의 터를 비롯해 극장과 전차경주장등 많은 유적이 탐방객을 맞으며 유서깊은 역사도시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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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파. 뒤편 방파제 옆으로 물거품 이는 곳이 안드로메다의 바위다. ⓒ김문환

 카이사리아를 지나면 야파가 나온다. 야파 역시 페니키아가 만든 도시로 오늘날은 이스라엘의 신수도 텔아비브에 통합돼 있다. 야파는 그리스 신화와도 연결된다. 아름다운 안드로메다가 바다 괴물의 밥이 되기 위해 묶여 있다 구출됐다는 바위가 있다. 고르곤의 머리를 잘라 돌아오던 페르세우스가 발견해 괴물을 처치하고 안드로메다와 결혼했다는 전설의 바위는 생각보다 작아서 바닷물 위로 살짝 고개만 내민 풍경이다.

 야파를 지나 알렉산더가 들린 곳이 가자. 오늘날 팔레스타인 난민과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비극적인 살상이 지속되는 슬픔과 눈물의 땅. 현시점으로만 보면 힘없는 팔레스타인 이슬람교도들이 막강한 이스라엘의 군사력에 억눌려 언제 죽을지 모를 공포 속에 신음하고 있는 한맺힌 땅이다. 그러나, 페니키아 전성기 가자는 시돈이나 티레에서 이집트로 가다 들리는 중간 무역거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도시로 알렉산더 이후 헬레니즘 시대에도 번영을 누렸다. 가자를 통과한 알렉산더는 성공적으로 이집트로 들어갔다.

◆ 19. 멤피스--B.C 3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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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 ⓒ김문환

 오늘날 해안선 개념으로 보면 터키와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의 지중해안을 모두 점령한 알렉산더는 보무당당 이집트를 접수했다. 이집트에서는 저항세력이 없었다. 이미 2백여년 전부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오던 이집트는 새로운 지배자를 환영하면 그만이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는 멤피스. 카이로 남부에 위치한다. 멤피스에서 그는 파라오로 대접받았다. 이어 신화속에서 페르세우스와 헤라클레스가 신탁을 받았다는 서부의 사막 한가운데 시와 오아시스로 갔다. 태양신 아몬의 신전으로 가서 신의 아들임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이집트 최고 태양신의 아들. 제우스의 아들이 된 것이다. 아몬신의 아들이라고 말해준 신관들은? 알렉산더로부터 큰 상금을 받았다. 원래 신탁소의 예언가들에게는 두둑한 복채를 던져주는 게 관행이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주팔자나 관상을 봐주고, 묘터를 잡아주는 사람은 용하다고 소문날 경우 엄청난 복채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마련이다.

◆ 20. 알렉산드리아, 나일강--B.C 331년

 나일강은 이집트의 선물. 지금이야 아스완에 댐을 만들어 홍수가 사라졌지만 그전만해도 매년 대홍수가 새로운 토사를 가져다 줘 나일강이 범람한 주변 지역은 비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곡물이 잘자라고 그만큼 풍요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나일강에서 목격한 재미있는 현상. 낮에 너무 덥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 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대신 달밤에 나와서 밭을 갈고 일을 한다. 나일강 주변으로 펼쳐지는 비옥한 농토는 왜 일찌기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싹텄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신의 아들로 인정받은 알렉산더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첫 작업은? 나일강이 메마른 사막을 달려와 지중해에 닿으며 삼각주를 만드는 지역. 여러 갈래로 갈라진 강줄기 가운데 맨 왼쪽 해안가에 신도시를 건설했다. 오늘날도 이름이 남아있는 알렉산드리아다. 이후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가 되면서 헬레니즘을 상징하는 국제적인 학문, 문화, 예술, 산업의 교역도시로 성장한다. 알렉산드리아 건설을 지시하고 총독을 남겨 둔 채 알렉산더는 이제 북으로 기수를 돌려 페르시아 본토로 진군해 들어간다.

◆ 21. 수사--B.C 3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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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파로스 등대터. 지금은 마물루크 시대 요새가 들어서 있다.ⓒ김문환

 이집트에 간 길을 되돌아 올라온 알렉산더는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과 니네베 근처의 과가멜라에서 B.C 331년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최종적으로 괴멸시켰다. 다리우스 3세는 도주했다가 부하들 손에 죽음을 당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이제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다리우스 3세가 전열을 재정비해 한판 승부를 벌일 여지가 있었지만, 과가멜라 전투로 모든 것은 결정됐다. 페르시아 제국은 문패를 내리고 새로운 알렉산더의 제국이 간판을 올렸다. 승리한 알렉산더 부대는 개선행진을 벌이며 바빌론에 입성했다.

  바빌론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알렉산더는 동쪽으로 이동해 수사도 접수했다. 유서 깊은 고도 수사. 수사는 페르시아왕국의 겨울 수도였다. 위도상으로는 수사나 페르세폴리스나 비슷해 보이지만 기온차는 크다. 3월에도 수사는 낮기온이 섭씨 30도가 넘는다. 반면 여름 수도 페르세폴리스는 3월에 겨울 옷을 입어야 한다. 알렉산더는 그동안 데리고 다니던 다리우스의 딸들을 이곳에 남겨뒀다. 알렉산더는 훗날 인도원정에서 돌아와 B.C 324년 초 이곳에서 마케도니아-페르시아 합동 결혼식을 치렀다. 자신은 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티라와 또 한명의 공주, 한꺼번에 둘을 아내로 맞았다. 참고로 수사는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 비석이 20c 초 발굴된 장소다. B.C 18c 바빌론에서 만들어진 것을 B.C 6c 키루스 대왕이 신바빌로니아 왕국을 무너트리면서 전리품으로 챙겨 수사로 가져온 결과였다.

◆ 22. 페르세폴리스--B.C 330년

 수사에서 페르세폴리스로 온 알렉산더. [페르세폴리스(Persepolis)]라는 말은 '페르시아의 수도'라는 그리스어다.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는 처음 수도를 메드지방 에크바타나로 잡았다가 파사르가드, 수사로 옮긴 데 이어 최종적으로 페르세폴리스를 택했다. 거대한 암벽산을 배경으로 만든 계획도시 페르세폴리스는 동으로 인도에서 서로 터키, 남으로 이집트, 북으로 박트리아에 이르는 대 페르시아 제국의 심장부였다. 페르세폴리스를 접수하므로서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정벌은 사실상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알렉산더 점령 기간에 페르세폴리스는 화재로 불탔는데... 방화라는 설이 있다. 페르시아인들의 가슴에서 페르시아의 영광을 간직한 페르세폴리스의 추억을 지울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데... 그 덕에 인류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 산산이 조각 났다. 그러나, 지금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해 폐허를 접해도 그 웅장하고 장엄한 규모에 모두 탄복을 금하지 못한다. 페르시아를 접수한 알렉산더는 기수를 다시 북으로 돌려 다리우스 3세 생포와 인도정벌을 위해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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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알렉산더는 이곳에서 다리우스 3세의 딸 스타티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김문환

페르세폴리스. 알렉산더 점령기간에 페르세폴리스는 불타 폐허로 변했다. ⓒ김문환

◆ 23. 이스파한--B.C 3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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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파한의 모스크. ⓒ김문환

 다리우스 3세를 추적하러 북쪽 카스피해 방면으로 올라가면서 알렉산더가 들린 곳이 오늘날 이란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 이스파한이다. 고대에는 아스파다나로 불렸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남쪽으로 405km 지점에 위치하는 대도시로 고지대다. 1598년에 사파비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하면서 큰 번영을 누린 곳이다.

  다리우스 3세는 부하들에게 버림받고 죽은 시체로 발견돼 그를 사로잡고 싶어했던 알렉산더를 실망시켰다. 그러나 알렉산더를 더욱 실망시키고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다리우스 3세가 죽었는데도 알렉산더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는 중앙 아시아 지역의 과거 페르시아 총독과 토착 세력들이다. 알렉산더는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토착세력을 모두 일소한다는 목표아래 중앙 아시아로 들어갔다. 카스피해를 돌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타지키스탄땅인 소그디아나와 박트리아 지방을 무려 3년 넘게 훑고 다녔다.

◆ 24. 탁실라--B.C 3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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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실라 불교유적. ⓒ김문환

 오랜 기간 원정을 다녔지만,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저항하는 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기 어려웠다. 알렉산더는 대안을 모색했다. 박트리아 공주 록사네와 B.C 327년 정략결혼 한 것이다. 결혼으로 동맹을 맺어 알렉산더 제국에 대한 반항을 잠재운다는 계책이었다. 알렉산더는 아름다운 록사네와 결혼하고, 평화와 지역 안정을 이끌어 낸 뒤 인도 공략을 위해 남으로 내려왔다.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지방인 간다라를 거쳐 인더스 강 너머 인도 북부의 부족들과 전투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그리스문명의 씨를 뿌리게 됐고, 간다라 미술은 그 결과물이다. 탁실라는 그 중심도시다.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이 곳에서는 부처를 동상으로 만드는 예술이 발전했고, 불교관련 유적들이 즐비하다. 1913년부터 영국 고고학자 마샬등이 발굴해 낸 덕분이다. 사진은 파키스탄 북부에 자리한 수도 이슬라마바드 북쪽에 있는 탁실라의 불교 관련 유적이다. 돌로 거대하게 쌓아올린 모습이 인상적이다.

◆ 25. 인더스강(모헨조다로)--B.C 3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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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헨조다로. 알렉산더가 인더스강을 따라 내려갈 때는 모래에 묻혀있었다. ⓒ김문환

 코끼리 부대를 앞세운 인도 부족들의 강력한 저항에 알렉산더는 최대의 위기에 빠졌다. 전투도중 화살에 맞아 죽을 고비까지 넘겼다. 이 사건을 겪은 뒤에야 알렉산더는 마침내 퇴각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회군을 주장한 장군들을 숙청하고 오직 전진만을 내세웠지만, 본인이 직접 쓴맛을 본 뒤에야 주변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의 퇴각 방법은 독특했다. 그동안 점령하거나 화친을 맺은 지역을 거쳐 안전하게 돌아가는 게 아니라 전혀 새로운 코스를 택했다. 아직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 인더스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인도양으로 내려가 귀환하는 코스였다.

 B.C 2500년 경 꽃핀 인더스 문명의 터전 인더스강은 멀리 히말라야 산맥에서 녹은 물이 인도양으로 흘러든다. 인도남부 진격을 포기하고 배를 만들어 인더스강을 따라 인도양으로 내려간 알렉산더. 그가 지나간 지역에는 인류역사 최고(最古) 문명지의 하나인 모헨조다로가 있었다. 물론 알렉산더는 모헨조다로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지나기 무려 2천 2백년 전 꽃폈던 인더스 문명 유적지는 폐허로 변해 모두 모래 아래 묻히고 대신 그 위에 새로운 불교도시가 들어서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모헨조다로 대욕장(大浴場) 유적이다. 하수구 시설까지 잘 갖춰져 있다.

◆ 26. 파사르가드--B.C 324년, 죽음--B.C 3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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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르가드의 키루스 대왕 무덤. 아렉산더는 파괴된 무덤을 복원했다. ⓒ김문환

 인더스강을 타고 내려간 알렉산더 부대는 페르시아만으로 향하는 오늘날 파키스탄 최대의 무역도시 카라치에 다다랐다. 여기서 알렉산더 부대는 바닷길과 게드로시아 사막길을 지나는 2패로 나뉘어 복귀했다. 알렉산더는 게드로시아 사막 횡단길에 올라 숱한 고생을 치른 뒤 많은 군사를 무더위와 목마름에 잃고, 간신히 파사르가드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사르가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최고 정복왕 키루스 대왕이 새도읍으로 삼은 도시다. 키루스 대왕은 B.C 538년 신바빌로니아 왕조를 멸하고 바빌론을 차지한 뒤 종살이 하고 있던 유대인(바빌론의 유수)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등 제국을 최전성기로 이끌다 죽은 뒤 파사르가드에 묻혔다.

 알렉산더가 오랜 원정을 마치고 6년만에 파사르가드에 도착해 보니 말이 아니었다. 키루스 대왕의 무덤은 도굴당하고 총독들은 백성들을 수탈하는등 질서가 무너져 있었다. 분노한 알렉산더는 총독들을 숙청하고 키루스대왕의 무덤도 복원했다. 파사르가드에서 페르세폴리스를 거쳐 수사로 들어간 알렉산더는 B.C 324년 3월 수사에서 대규모 합동결혼식을 치른다. 그리고 제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대규모 원정, 즉 아라비아 사막과 카르타고와 로마를 정벌하는 대원정을 떠나기 열흘 전 급작스럽게 병에 걸리더니 B.C 323년 6월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오늘날 파사르가드는 건물 유적은 거의 무너져 내린 채 터만 남아 있다. 알렉산더가 복원한 키루스 대왕 무덤만이 우뚝 솟아 있다. 사진 뒤편의 건물이 키루스 대왕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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