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새봉'이 뭐야?"
"새봉? 새봉이 뭐지? 잘 모르겠는데? 너 이 말 어디서 들었니?"
"아이 참, 있잖아, '새봉 많이 받으세요' 할 때 '새봉' 말이야."
제 딸은 평소에는 어른 뺨치게 말을 잘해서 얄미울 정도인데, 가끔 이렇게 예상 밖의 질문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어리긴 어린가 봅니다. 저는 웃음을 참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건 '새봉'이 아니고, '새해 복'이란 말이야. 복 많이 받으라는 말은, 좋은 일이 많이 생기라고 하는 말이고."
이제 제 딸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무슨 뜻인지는 안 것 같은데, 여전히 발음은 '새봉'입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설날이니, 제 딸은 또 한동안 '새봉'을 입에 달고 다니겠지요.
어쨌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그 동안 제가 둘째를 낳고 쉬느라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 딸에게 여동생이 생긴 겁니다. 아직 출산휴가 기간이 조금 남아서 이 글은 집에서 쓰고 있습니다. 출산휴가 석 달이 굉장히 긴 것만 같더니(첫째 때는 두 달이었거든요), 이제 거의 다 지나버렸습니다. 직장에 복귀하고 나면, 이렇게 온전하게 아이들에게 시간을 바칠 수 있는 날이 적을 것 같아 아쉽습니다.
하지만 매일 직장 일로 바쁘게 지내다가 집에만 있으니, 이제는 슬슬 갑갑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동안 병원에 간 것을 제외하고는 집밖으로 한 발짝도 안 나가고 지냈으니까요. 그러다 어제 오랜만에 아기를 맡기고 외출을 했습니다. 영화 '오페라의 유령'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기억하시죠? 제가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열성 팬이었다는 사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오페라의 유령'은, 흉측한 외모 때문에 파리 오페라 하우스의 지하에 숨어사는 '오페라의 유령', 유령이 사랑하는 소프라노 크리스틴, 그리고 크리스틴의 연인 라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가스통 르루의 원작 소설은 공포물과 로맨스를 결합한 매력적인 소재로 여겨져 여러 차례 영화화됐습니다. 이번에 개봉된 영화는 1986년 런던에서 발표된 이후 이제는 전설이 돼 버린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독은 아시다시피 '배트맨 포에버'나 '8mm' 같은 영화로 유명한 조엘 슈마허가 맡았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의 존재감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작까지 맡은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실제로 이 영화의 원제는 'Phantom of the Opera' 앞에 'Andrew LLoyd Weber's'라는 단서를 달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영화는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을 아주 충실하게 스크린으로 옮겨왔습니다. 영화의 진행은 뮤지컬의 흐름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대사도 별로 바뀐 게 없습니다.
오케스트라 음향이 훨씬 더 강력해지긴 했지만, 음악도 거의 그대롭니다. 15분 분량의 음악이 추가됐다고는 하지만,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Learn to be lonely'라는 신곡은 기존 뮤지컬 넘버들에 비하면 영 흡인력이 덜합니다. 이것도 그나마 엔딩 타이틀곡이라서 극의 진행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기존의 뮤지컬을 별 고민 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혹평도 나왔습니다. 저도 조금은 불만스러웠던 부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충분히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무대의 제약에서 벗어난 영화가 선사하는 스펙터클은 대단합니다. 영화는 1억 달러에 육박하는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여 파리 오페라 하우스를 무대에서보다 더욱 눈부시게 재현했습니다. 화려한 세트와 의상을 보고 있노라면 '눈이 호사를 누린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또 뮤지컬에는 없었던 몇몇 장면들을 추가해 이야기를 좀 더 구체화합니다. 유령의 어린 시절이 등장하고, 유령과 라울의 박진감 넘치는 칼싸움 장면 등이 추가됐습니다.
영화는 이 작품의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1870년에서 수십 년이 흐른 시점에서 노신사 라울의 회상으로 시작되고, 끝납니다. 이를테면 액자식 구성이지요. (뮤지컬은 라울의 현재 모습을 프롤로그로 잠깐 삽입하는 데 그칩니다.) 가라앉은 흑백 화면으로 묘사되는 영화 속 '현재'는 영화 중간 중간에 잠깐씩 삽입되면서, 화려한 컬러로 표현되는 과거의 사건들과 함께 진행됩니다. 그리고 영화 속 '과거'와 '현재'의 교차는 상당히 매끄러운 솜씨로 이뤄집니다.
노신사 라울은 오페라 하우스의 물품 경매에 참가해 유령의 은신처에 있었던 원숭이 모양의 뮤직 박스를 사들입니다. 이 경매에는 오페라의 유령이 추락시켰던 거대한 샹들리에도 나오는데, 이 샹들리에에 다시 불이 켜지면서 영화의 시점은 과거로 돌아갑니다. 거미줄과 두텁게 쌓인 먼지 같은 '세월의 때'가 순식간에 벗겨지면서, 낡고 쇠락한 오페라 하우스가 과거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되찾는 겁니다. 뮤지컬에서도 같은 상황이지만, 영화에서 느끼는 시각적 즐거움이 몇 배는 더 큽니다.
이 거대한 샹들리에가 분노한 유령에 의해 바닥으로 떨어지는 장면은 이 작품을 특징짓는 아주 유명한장면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영화와 뮤지컬은 차이를 보입니다. 뮤지컬에서는 1막의 마지막에, 그러니까 극의 중반부에 샹들리에가 추락하지만, 영화에서는 샹들리에의 추락이 후반부에 배치됐습니다.
뮤지컬에서는 샹들리에의 추락이 이렇게 진행됩니다. 오페라 '일 무토'가 유령이 일으킨 사고들로 잠시 중단되자, 크리스틴과 라울은 오페라 하우스 지붕에 올라가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 유명한 노래 'All I ask of you'가 불려집니다. 유령은 지붕 위의 거대한 석상 뒤에 숨어서 이들의 밀회를 목격하고는 깊은 슬픔에 빠집니다.
"나는 너에게 내 음악을 주었는데, 네 노래에 날개를 달아주었는데, 너는 나를 부인하고, 배신했어......"
이 슬픔은 차츰 분노로 바뀌지요.
"너는 이 날을 저주하게 될 거야! 유령의 뜻을 어긴 날을!"
그리고 유령은 악마 같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GO!!!!!"
이 때쯤이면 무대는 '일 무토'의 공연장으로 다시 바뀌어 있습니다. 유령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샹들리에는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있던 크리스틴의 발치에 떨어집니다. 뮤지컬에서는 이것이 1막의 끝이고, 2막은 샹들리에 사고 이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영화에서는 유령이 작곡한 오페라 '돈 환의 승리'가 상연되던 도중 샹들리에가 떨어집니다. 크리스틴과 약혼한 라울은 유령을 유인하기 위해, 망설이는 크리스틴을 설득해 '돈 환의 승리'를 공연하게 합니다. 공연장은 총을 든 경찰관들로 둘러싸였습니다. 유령이 나타나기만 하면 체포하거나 사살하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령은 공연 도중 출연자로 가장하고 나타나 무대 한복판에서 크리스틴을 납치합니다.
샹들리에가 떨어지는 것도 바로 이 때입니다. 그야말로 '클라이맥스'입니다. 사람들의 날카로운 비명이 귀를 찌르고, 샹들리에가 바닥에 떨어지고 나자, 이내 불이 붙어 번지기 시작합니다. 불길이 타오르는 극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물론 뮤지컬에서도 샹들리에의 추락은 이 작품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장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뮤지컬과는 다르게 배치해 더욱 사실적이고 강렬하게 묘사함으로써 영화적 리듬과 감각에 충실했고, 의미를 확장시켰습니다.
유령은 흉측한 외모 때문에 어머니로부터도 버림받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괴물로 여기고, 잔인한 호기심만을 보였습니다. 그는 크리스틴을 사랑하지만, 세상은 그 사랑을 허락하지 않으려 합니다. 크리스틴에 대한 유령의 갈망이 간절해지는 만큼, 그의 광기도 심해집니다. 파괴의 본능이 꿈틀거립니다. 샹들리에의 추락이 뮤지컬에서는 크리스틴의 배신에 대한 분노를 나타낸 것이었다면, 영화에서는 세상 전체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폭발시킨 셈입니다.
(아기가 잠든 새 틈틈이 쓰는 글이 쉽지만은 않군요. 개봉한 지 꽤 된 영화라서 지금 제 글이 '뒷북'이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하고 나니, 글을 쓰고 싶었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남은 이야기들은 잠시 미뤄두고요.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