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명기 4권--
도자기로 읽는 트로이 전쟁과 로마의 건국
---글 싣는 순서--
3장. 트로이 전쟁의 전개 1(아카이아 연합군)
1. 헬레네 송환 협상
2. 아킬레스 1--성장
3. 아킬레스 2--참전
4. 아킬레스 3--사랑
5. 아킬레스 4--브리세이스
6. 아킬레스 5--헥트르와 대결
7. 아킬레스 6--죽음
8. 고대 그리스의 애정사
9. 파트로클로스
10. 올림픽 1
11. 올림픽 2
12. 올림픽 3
13. 올림픽 4
14. 大아이아스
15. 그리스, 직접 민주주의
16,17,18 민주주의를 이끈 사람들 1,2,3
19. 중우정치와 민주정치
20. 고대 민주주의와 현대민주주의
21.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22. 오디세우스
23. 디오메데스, 小아이아스
24,25 네오프톨레모스, 필록테테스
26, 27,28,29,30.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1,2,3,4,5--오늘 이야기
31. 테티스, 헤파이스토스, 아테나
28. 알렉산더와 아킬레스 3. 죽음과 장례
◆ 1. 헤파이스티온의 죽음
친구, 헤파이스티온. 아니 친구라는 설명이 부족한 동반자 헤파이스티온이 B.C 324년 10월 죽으면서 알렉산더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헤파이스티온은 인도원정을 마치고 돌아와 알렉산더가 주도한 페르시아 왕녀들과의 성대한 합동 결혼식을 수사에서 치른 지 8달 만에 죽었다. 아름다운 신부를 뒤로 하고, 메드 지방(이란 고원지대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 이란의 국경지방) 엑바탄(에크바타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30대 초반의 한창 나이. 헤파이스티온이 젊은 나이에 왜 죽었을까? 의학 기술 수준이 요즘 같지 않아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단 과음이 죽음의 한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추측이 우세하다.
닭고기 요리에 포도주를 즐긴 것으로 널리 알려진 헤파이스티온. 요즘 식으로 해석해 보자. 향연을 즐기던 그리스 문화에서 헤파이스티온은 매일 저녁 푸짐한 고기 안주로 포도주를 들이켰다. 안주가 좋으니 살이 쪄 비만이 됐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특히 복부 비만. 살이라는 게 한순간에 찌는 데... 원정기간에는 고생하며 행군을 해 살이 찔 가능성이 낮지만, 일단 원정을 끝내고 다음 원정을 준비하는 휴지기에는 푹 쉬면서 호의호식(好衣好食)에 음주가무(飮酒歌舞)를 이어 여색(女色)을 즐기는 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몸이 망가질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습관성 음주는 간에 부담을 줘 결국, 체력과 저항력이 크게 떨어지고... 고혈압이나 심혈관계 질환, 나아가 당뇨도 의심된다. 가벼운 질병에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고, 비교적 손쉬운 전염병이라도 악화돼 희생될 소지(素地)가 크다.
헤파이스티온이 죽자 알렉산더는 크게 상심한 나머지 제정신이 아니었다. 여기서 먼저 알렉산더의 우상 아킬레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파트로클로스가 죽은 뒤 어떻게 행동했는지 부터 들여다 보자.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는 여자만 빼고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며 누가 누구 것을 더 가져도 서운하지 않은 진정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우정을 나눴다. 그런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일리아드'의 묘사만으로 보면 아킬레스는 이성을 잃었다고 보는 게 옳다. 흙바닥에 뒹굴고,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질러대고, 밤새 울부짖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지만 빼앗긴 여인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이 돌려준대도 화를 풀지 않고 귀향을 결정했던 아킬레스였건만... 파트로클로스가 헥트로에게 죽임을 당하자 철군 결정을 뒤집고 재참전한다. 복수를 위해서였다. 파르토클로스를 죽인 헥토르를 반드시 죽이고, 나아가 트로이군을 박살 내겠다는 복수의 일념. 사랑보다도 우정이 앞섰나?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 ⓒ김문환
이런 우정이 곧 자신의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예언을 알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애인 브리세이스, 처가에 남아있는 아내와 자식, 전쟁 뒤 고국으로 돌아가 아버지가 정해줄 처자와 치를 새장가의 부푼 꿈, 아직도 한창 남은 삶...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킬레스는 죽음을 향해 달려갔다. 오로지 친구의 원수를 갚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다. 헥토르를 죽이면 자신도 죽는다는 예언은 귓전에 머물다 사라질 뿐이었다. 헥토르를 죽이고 잔인하게 시신을 훼손했다. 이것도 모자라 다른 트로이 군사도 무지막지하게 죽였다. 원수를 갚았다고 생각한 뒤에는 그 동안 모아온 전리품을 내걸고 파트로클로스의 장례 추모경기를 성대하게 치렀다. 엄청난 노력과 돈을 들여 장례식을 마친 뒤 그의 유골을 가매장했다. 자신이 죽으면 함께 묻기 위해서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끼고 다니며 아킬레스를 가슴 깊이 품었던 알렉산더가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뒤 무슨 생각을 어떻게 실천으로 옮겼을지 연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헤파이스티온이 죽고 난 뒤 알렉산더의 행동을 들여다 보자. 친구의 죽음이 마치 주변 사람에 있는 것으로 여겼다. 엉뚱한 보복을 펼치는데... 이게 앞뒤가 맞지 않는다. 파트로클로스야 적에게 죽어 보복할 수 있다지만, 제 탓에 죽은 헤파이스티온의 경우 누구에게 보복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알렉산더는 아킬레스 처럼 보복을 해서 친구에 대한 우정에서도 자신이 아킬레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음악연주를 금지한 것은 그런대로 봐 줄만 한데... 엉뚱하게 말들에게 까지... 모든 말의 꼬리와 갈기를 잘랐다. 죄없는 말들에 이어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엑바탄 지역의 노인과 어린애를 모조리 죽였다. 일종의 희생의식으로 여겼을 것이다. 아킬레스도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화장할 때 트로이 사람들을 죽여 함께 화장하는 순장(殉葬)의 예를 갖췄다. 알렉산더는 거금을 들여 초호화판 장례식을 치렀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리스 최고의 신탁소가 자리했던 델피. 델피의 극장과 그 아래로 아폴론 신전 잔해가 보인다. 아폴론 신전의 여신관 피티아가 신탁을 전했던 장소다. 알렉산더는 원정에 나서기 전 델피에 들러 자신이 최고라는 말을 듣기 위해 완력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문환
알렉산더는 이미 자신을 신으로 승격시켜 놓은 상태였다. 이제는 먼저 떠난 친구 헤파이스티온도 신으로 승격시켜야 했다. 그래야 동반자로서 격이 맞는다. 알렉산더가 헤파이스토스 신전 건축명령을 내린 것은 예정된 순서였다. 이어 신이 지상에 살다가 죽는다고 가정할 때 지을 법한 거대한 석조 묘소를 화려하게 만들었다. 다행히, 이집트의 아몬 신전에서 헤파이스티온을 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말씀이 나와 알렉산더의 부담을 덜어 줬다. 아니면 칼부림이 났을지도 모른다. 지난날 알렉산더를 신의 아들이라고 인정했던 아몬 신전의 신관들. 알렉산더를 인정했던 똑같은 이유로 같은 답을 낸 것이다. 인정하지 않을 경우 닥칠 후환을 신관이 모를 리 있겠는가? 이미 알렉산더의 행동은 이성을 잃은 것인데... 알렉산더가 원정을 시작하기 전 그리스 본토를 출발하기에 앞서 델피 신전에 들렀을 때 신탁을 받아 주기를 거부했던 여신관 피티아를 알렉산더가 완력으로 끌고 신전으로 들어가려 시도한 전례가 이미 바람 따라 이집트 땅에도 벌써 퍼진 터였다.
아킬레스와 파트로클로스,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의 관계는 왕과 신하의 충성과 복종을 넘어 우정이 한데 버무려진 독특한 성격을 띤다. 요즘 인기를 모으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와 이를 극화한 KBS의 '불멸의 이순신'. 여기서 임금과 신하 사이에 성은(聖恩)을 베푸는 자와 견마지로(犬馬支路)를 다하는 자 사이의 상하 수직관계만 설정될 뿐, 우정(友情)을 나누며 보듬는 수평관계는 찾기 힘들다. 왕과 신하가 대등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왕정제의 특징, 나아가 마케도니아의 전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물론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는 민주정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하와 왕의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지만...
◆ 2. 알렉산더의 죽음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뒤 날로 악화된 건강! 아킬레스를 모방한 광기의 학살, 신격화에 이어 알렉산더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폭음도 일삼아 건강을 해쳤다. B.C 324년 초 아름다운 페르시아 왕녀들과 새장가를 들어 단꿈에 젖을 시간도 없이 그해 가을 헤파이스티온이 죽으면서 이성을 잃어가던 알렉산더. 그러나 예정됐던 아라비아 침공 준비만은 그대로 진행시켰다. 원정준비라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제국의 심장부가 이동하는 중대사다. 준비하고 챙길 게 한둘이 아니다. 뭔가 냄새가 난다. 건강과 이성을 잃으면서 무리하게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으니, 더욱 쇠잔해졌을 것이고...
알렉산더. 루브르. ⓒ김문환
아라비아 원정이라! 아라비아를 거쳐 이집트로 들어가고, 이집트에서 리비아를 지나 서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를 정벌한 뒤 새롭게 세력을 키워가던 로마도 평정한다는 야심찬 원정 계획. 로마를 거쳐 그리스 본토 고국인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면 원정의 큰 그림이 완성될 참이었다. 줄잡아 몇년이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페르세폴리스를 떠나 박트리아를 거쳐 인도를 돌아 다시 페르세폴리스와 바빌론으로 돌아오는데 무려 5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아라비아의 호전적인 사막부족과 서지중해의 강국 카르타고를 제압하고, 시라쿠사가 버티고 있는 시칠리아와 로마를 정벌하는 데 글쎄 빨라야 5년? 아니면 10년? 장군들은 다시 그 지긋한 원정을 떠나야 하는 것인가? 이제 막 새장가 들고 재미있게 살 판인데, 여인네 거느리고 기나긴 대장정에 올라야 한다니... 아라비아로 출정 예정일은 B.C 323년 6월 20일-23일 사이에 잡힌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이때 예정대로 출정해 성공을 거뒀다면? 로마와 카르타고의 3차례에 걸친 혈전도 로마제국이란 이름도 생겨날 일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출정을 20여일 앞둔 6월 3일 저녁 이런 한가로운 가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건이 터졌다. 아주 평범한 장소에서 너무 특별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스인들이 늘상 즐기던 저녁 향연 석상에서 과음하던 알렉산더가 갑자기 쓰러졌다. 측근들은 단순한 취기로 여겼지만, 왠지 그 날만은 증세가 달랐다.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정신을 잃고, 다음날이 돼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열이 오르락 내리락. 때로 정신이 드는가 하면 때로는 헛소리에 말도 제대로 못하는 혼수상태. 그러면서도 잠깐씩 결재 보고, 사절 만나고. 이런 일이 반복되기 열흘 만인 6월 13일(일주일만인 10일 이라는 설도 있음) 마침내 당대까지 최고의 정복왕이던 알렉산더가 숨을 거뒀다. 너무 이른 생의 마감이었다.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아킬레스가 헥토르를 죽여 원수를 갚은 뒤 바로 죽었듯이, 알렉산더 역시 헤파이스티온이 죽고 8달만에 숨을 거두었으니... 알렉산더와 아킬레스는 우정과 죽음에서도 같은 궤적을 그려냈다.
◆ 3. 알렉산더의 사인(死因)
알렉산더가 죽은 이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말라리아(학질)를 꼽는다. 말라리아는 모기와 관련있다. 모기가 활동하는 여름철에 널리 유행한다. 25℃ 이상의 기온이 2주간 이상 계속되지 않으면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춥고 떨리는 오한전율(惡寒戰慄)로 시작해 얼굴이 창백해지다 햇볕에 덴 것처럼 벌겋게 달아오르고... 체온은 39-41℃까지 치솟는다. 알렉산더의 증상은 일단 말라리아와 비슷해 보인다. 시기도 무더운 6월로 말라리아가 기승을 부리는 시점과 일치한다. 몸이 쇠약해진 가운데 모기에 물렸고, 말라리아에 감염돼 사망했다는 가정은 일견 그럴듯해 보인다.
이슈타르 성문 복원 모형. 멀리 뒤로 보이는게 이슈타르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제3왕조 시대(B.C 2112년-B.C 2004년)부터 점토판에 등장하는 유서깊은 고대 도시 바빌론의 이슈타르문에서 마르두크신을 모셔 놓은 에스길라 신전까지 도로가 나 있다. 바빌론은 함무라비왕 치세(B.C 1792년-B.C 1750년)에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통치하는 제국의 수도로 번성했다. 이후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느부카드네사르 2세(B.C 604년-B.C 562년) 때 부흥기를 맞았다. 알렉산더가 이슈타르 성문앞 도로를 지날 때 까마귀 떼가 날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알렉산더가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에 걸렸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페르가몬 박물관. ⓒ김문환
그러나, 다른 질병설도 최근 제기됐다. 한 학자가 조류독감(鳥類毒感) 감염설을 내놓은 것. 닭이나 야생 새들에게 걸리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분비물을 통해 인간에게도 전염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이슈타르(Ishutar,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미와 전쟁의 여신. 그리스에서는 아프로디테 여신과 동일시 됨)성문을 지날 때 수많은 까마귀가 머리위로 날았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때 분비물의 일부가 알렉산더에게 떨어져 감염됐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웨스트 나일 바이러스. 1938년 우간다의 웨스트 나일 지역에서 처음 발견돼 붙은 이름이다. 뇌염의 일종으로, 건강한 성인에게는 감기 증세만 보이지만, 면역 체계가 약한 사람들에 감염되면 바이러스가 뇌의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사망할 수도 있는 질병이다. 주로 모기에 물려 걸리지만, 까마귀같은 조류를 통해서도 감염된다. 처음에는 감기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나지만, 심해지면 뇌염으로 발전한다. 고열에 두통, 근육통의 증상은 알렉산더의 증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과연 질병 탓일까? 죽음에 대한 여러 설이 있지만, 일부에서는 독극물 중독사(中毒死)설을 제기한다. 알렉산더가 암살됐다는 주장이다. 알렉산더는 생전에 여러차례 암살 음모 사건에 휘말리곤 했다. 그때 마다 사전에 발각해 일당을 처벌하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실제 암살 음모가 있었는지, 아니면 알렉산더가 위협적일 만큼 세력을 키워가는 정적을 견제하기 위해 암살 음모죄를 씌워 숙청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사실은 알렉산더가 휘하 장군들과 원정 강행 문제나 페르시아 스타일의 도입을 놓고 여러 차례 갈등을 겪고, 숙청을 지속했다는 점이다. 이런 암살 음모나 원정 갈등으로 볼 때 또다시 장기간 원정을 가야하는 일에 부담을 느낀 누군가나 알렉산더의 독재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그를 중독사 시켰다는 주장이다.
뉴질랜드 국립 독극물 센터의 레오 수 박사는 독극물의 정체를 마케도니아 지방에 널리 자생하는 유럽산 미나리 아재비과(科) 식물 헬르보어(Hellebore)로 꼽았다. B.C 11c부터 헬르보어 즙은 그리스 지역에서 치료제로 사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미량의 헬르보어는 약이 되지만, 다량의 헬르보어는 치명적인 독약으로 바뀐다. 모든 약이 그렇지만... 다량의 헬르보어는 혈압을 떨어뜨리고 고열을 일으키며 서서히 사람을 죽이는데... 누가 이런 일을 꾸몄을까? 알렉산더의 원정기간동안 마케도니아 통치를 위임받은 안티파테르 장군 일가가 범인으로 지목됐다. 훗날 바빌론으로 소환당한 안티파테르의 아들 이올라스가알렉산더의 음식을 담당했는데, 앙심을 품고 알렉산더의 술잔에 헬르보어를 짜 즙을 내 섞어 마시게 했다는 것이다.
이슈타르 문. 구운 벽돌에 청색, 황색, 백색의 유약으로 표면을 처리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문이다. 이슈타르문의 높이는 약 14.3m. 상상의 동물을 그려 넣었다. 1899년부터 1917년에 걸쳐 독일인 콜데바이가 이끄는 발굴단이 바빌론을 탐사한 뒤 이슈타르문을 해체해 1930년 베를린으로 옮겨 페르가몬 박물관에 복원해 놓았다. 현재 복원된 문은 함무라비 치세가 아닌 느부카드네사르 2세때 건축물이다. ‘이슈타르’는 사랑과 전쟁의 여신을 말한다. 페르가몬 박물관. ⓒ김문환
일부에서는 중독사를 인정하면서도 독살 보다는 헬르보어등의 약물과용(藥物過用)으로 중독사했다는 가설을 만들어 낸다.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더는 예정된 아라비아 출정을 위해 빨리 병석을 털고 일어나고 싶어했고, 그래서 약을 과다하게 썼다가 중독 됐다는 설이다. 이설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알렉산더가 이전에도 말라리아에 걸려 혹독하게 고생을 했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B.C 333년 알렉산더는 다리우스 3세와의 첫 일전인 이수스 전투를 앞두고 오늘날 터키 남부의 타르수스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무려 2달간 사경을 헤맸다. 그러니, 출정을 10흘 정도 남긴 시점에서 다시 말라리아에 걸린 알렉산더는 초조함에 전의(典醫)에게 좀더 강한 약을 부탁했고, 이것이 과거보다 현격히 약해진 신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죽기 직전 알렉산더는 많은 술을 마셨던 게 분명하다. 헤파이스티온을 잃은 슬픔이 너무 커 주벽(酒癖)이 도를 더해 갔고, 술이 깨면 모든 게 허무해지면서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다시 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지속됐을 것이다. 그러면서 점차 체력이 약화됐고, 질병이나 독극물에 쉽게 노출돼 죽었을 것으로 보인다.
◆ 4. 알렉산더의 묘소는?
알렉산더는 죽기 전 자신이 신으로 축복받은 이집트 서부 사막 시와 오아시스를 매장지로 택하고 유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뜻대로 됐을까? 알렉산더의 묘소는 과연 어디인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알렉산더가 죽은 뒤 제국이 붕괴된 것도 아니고 알렉산더의 위업을 이은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통치했다면 알렉산더를 기려 묘소를 만들었을 텐데... 결론적으로 알렉산더의 묘소는 알렉산드리아 있었다. 70개나 되는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어디일까? 이집트 지중해 연안의 살기좋은 도시, 알렉산드리아다. 오늘날 까지도 알렉산드리아라고 불리는 도시다. 알렉산더가 원했던 시와 오아시스는 아니지만 그에 근접한 도시, 알렉산드리아로 오게 된 과정을 들여다 보자.
알렉산드리아. 헬레니즘 시대 조성된 알렉산드리아의 한 지하 묘지다. 알렉산더의 시신은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 의해 알렉산드리아에 최종적으로 묻혔다. ⓒ김문환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자 장군들은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장례절차는 차분히 진행됐다. 우선 이집트의 미이라 전문가를 불러 그의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었다. 알렉산더가 이미 이집트의 파라오이자 신이었기 때문에 이집트 식으로 장례가 준비된 것이다. 그리고, 미이라를 운구할 관을 만들었다.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불러도 좋을 화려하고 장엄한 석관이었다. 제작기간만 무려 2년이 걸렸으니 규모와 화려함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석관을 운송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노새와 낙타가 동원돼야 했다니...
그러나, 알렉산더의 시신은 알렉산더의 소망대로 운구되지 않았다. 그가 죽은지 2년 뒤 B.C 321년 석관은 알렉산더의 고향인 마케도니아로 보내졌다. 왜 그랬을까? 알렉산더의 시신은 이미 알렉산더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곧 권력의 정통성을 의미했다. 제국을 갈라 통치권을 확보하고 있던 장군들은 자기 관할 지역으로 시신을 옮기려 했던 것이다. 마케도니아 왕실 묘지에 묻히는 것을 그대로 두면 장차 헬레니즘 제국의 주도권은 마케도니아로 넘어간다. 당시 이집트 총독이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은 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로 가던 영구차를 시리아에서 강탈해 이집트로 가져가 버렸다. 전혀 엉뚱한 이유로 알렉산더의 시신은 그가 소망했던 나라로 갈 수 있었다.
멤피스.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 멤피스. 알렉산더는 이곳에서 살아생전 파라오로 즉위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지기전 이곳에 묻혔다. ⓒ김문환
프토레마이오스 장군은 우선 당시 이집트의 수도이던 멤피스에 알렉산더의 관을 안치했다. 멤피스는 고대 이집트 고왕국의 수도였다. 알렉산더는 살아생전 이곳에서 파라오로 즉위했다. 수천년 내려오는 이집트의 파라오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는 이집트의 다양한 신전과 파라오 묘소들을 참배하는 것으로 자신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됐음을 신고했는데... 시와 오아시스를 방문한 것도 멤피스에서 즉위한 뒤, 델피처럼 이집트 최고의 아몬신 신탁소로 알려진 시와의 아몬 신전에서 신(아몬, 즉 제우스)의 아들임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멤피스는 알렉산더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이집트의 수도를 B.C 311년 알렉산드리아로 옮기면서 알렉산더의 묘소도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이전됐다. 알렉산드리아는 B.C 332년 알렉산더가 처음 입성한 뒤 B.C 331년부터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도시로 재건축한 곳이다. B.C 306년 프톨레마이오스 1세로 등극한 프톨레마이오스 장군. 그는 신도시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더의 새로운 묘비 제마(Sema)를 만들면서 이장(移葬)도 마무리 지었다. 알렉산드리아로 옮겨진 알렉산더의 묘소. 사실, 알렉산더는 헤파이스티온이 죽은 B.C 324년 이미 알렉산드리아에 헤파이스티온의 신전 2곳을 건축하도록 명령해 놓고 있었다. 그러니, 알렉산더는 친구 헤파이스티온의 영혼이 깃든 알렉산드리아에서 영면을 취하게 된 셈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 5. 알렉산더 석관?
알렉산더 석관. 알렉산더가 안치된 석관은 아니고 알렉산더의 전투장면을 묘사한 석관이어서 '알렉산더 석관'으로 부른다. 이스탄불 박물관. ⓒ김문환
1887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 관할 아래 있던 오늘날 레바논의 지중해안 도시 시돈항에서 특별한 무덤이 발굴됐다. 시돈은 페니키아의 주요 본거지요, 오랜 문명의 발상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집트의 궁궐이나 신전 건축에 필요한 삼나무를 수철하던 수요 수출항이기도 했다. 시돈에서 헬레니즘 시대 초기 그러니까 알렉산더가 죽고 난 직후 B.C 4c 말 마케도니아 귀족이나 왕실, 혹은 토착 왕실의 공동묘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아주 인상적인 석관 하나가 나왔다. 알렉산더와 다리우스의 B.C 333년 이수스(이수수에서 승리를 거두고 이어 해안을 따라 옛 페니키아 영토인 시리아 연안의 시돈과 티레를 차례로 정복했기 때문에 이수스 전투라는 설이 우세)나 혹은 B.C 331년 과가멜라 전투 현장을 세밀하고 현란한 기법으로 새긴 석관이었다. 이름하여 '알렉산더의 석관(Alexander Sarcophagus)'. 그러나 이 석관이 알렉산더의 시신을 담은 관이라는 증거는 없다. 알렉산더의 전투가 그려져 있어 이름만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누구의 관인지에 대한 명문이 없기 때문이다.
높이 1.95m, 너비 3.18m, 옆길이 1.65m의 석관은 동양의 기와집을 연상시킨다. 제작연대는 B.C 325-B.C 311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고 보면 동양의 기와집도 서양의 건축에서 넘어온 것이 아닌지... 삼각 페디먼트 신전 스타일의 석관은 4면에 크게 2종류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알렉산더와 페르시아 병사의 전투와 알렉산더의 사냥 장면. 그리고 부조 위에는 다양한 색을 입혀 화려한 컬러의 세계를 연출했다. 지금은 많이 지워져 일부 채색 흔적만이 남아있다. 화려한 금속이나 보석 장식은 도굴돼 남아있지 않지만, 석관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빼어난 제작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거의 원형 그대로 남은 석관은 약간의 보수를 거쳐 발굴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수도이던 오늘날 이스탄불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제2의 영면을 취하고 있다.
알렉산더 석관의 알렉산더. 알렉산더가 헤라클레스처럼 네메아 사자 가죽 모자 달린 망토를 입고 페르시아 병사를 죽이고 있다. 이수스 전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탄불 박물관. ⓒ김문환
가로로 길게 파노라마 형식을 취하는 한쪽 면에는 알렉산더와 페르시아의 전투장면이 새겨져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터번을 두르고 긴소매 옷을 입고 있다. 알렉산더는 헤라클레스 복장으로 나온다. 네메아의 사자가죽 외투를 입고 싸우는 헤라클레스의 복장으로 명마 부케팔로스를 타고 페르시아 병사를 참살하는 장면이다. 알렉산더의 손에 들려 있던 창은 도굴된 상태다. 시돈 지역에서 헬레니즘 시기 만들어진 동전에는 종종 이렇게 헤라클레스 복장을 한 알렉산더가 등장하곤 한다. 알렉산더의 귀에는 양의 뿔이 달려 있는데, 이는 이집트의 태양신 아몬을 상징한다.
알렉산더 석관 부조. 그리스 병사들과 페르시아 병사들이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스탄불 박물관. ⓒ김문환
그 반대편에는 사자와 사슴을 사냥하는 알렉산더의 모습이다. 알렉산더와 헤파이스티온이 오리엔트의 방식대로 사자를 사냥하는 장면을 그렸다. 여기에는 알렉산더의 지시로 헤파이스티온이 임명한 시돈의 새로운 왕(책임자) 압달로니모스와 페르시아 복장의 사람도 등장한다. 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시돈은 이수스 전투 이후 알렉산더에게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어 알렉산더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고 협조자가 될 수 있었다. 알렉산더의 석관이 남아있지 않은 가운데 그래도 이 정체 모를 '알렉산더 석관'이라도 볼 수 있는 게 다소나마 아쉬움을 달래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