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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부는 아직도 '고문 가해자'들을 숨겨주고 있다

[대한민국이 사과하는 방법 ①] 독재자들 모두가 죽을 때까지, 그들은 자신을 고문한 자들을 모른다.

Interrogating A Torturer - REWIND / Aljazeera 다큐 中
헤라르도 브루쎄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 고문 피해자)
"난 내가 마침내 당신(고문 가해자)을 찾아냈을 때의 상상을 하며 27년을 보냈소. 난 당신이 나에게 했던 걸 당신에게 하는 방식으로 복수를 하고, 그러고는 당신을 죽여버리려 했었소. 난 가라데를 배우고, 운동을 하고 모든 걸 했소. 알겠소? 복수를 하기 위해서. 근데 그러다 난 깨달았지. 난 보복은 무용하다는 걸 깨달은 거요. 복수라는 게 무용하고, 신체적인 거든 정신적인 거든 뭐든 난 보복을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됐소.
내가 원하는 걸 복수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그들을 다시 만나는 것일 뿐. 나를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파괴하려 했던 자들을 대면하는 것 말이오. 나의 유일한 의도는 당신들에게 '당신들은 날 파괴시키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오."

지난 2009년 카타르 방송사인 <알 자지라>는 아르헨티나 군사정부 치하에서 고문을 받았던 피해자가 고문 가해자를 찾아가 대면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자신을 고문했던 이들 중 한 명을 찾아간 피해자. 고문실에 있던 다른 2명의 가해자 이름을 알려달라고 끈질기게 설득하지만, 노인이 된 고문 가해자는 끝끝내 고문 사실 자체를 부인합니다. 고문 가해자들의 이름을 알아내려는 피해자의 시도는 결국 실패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는 끝납니다. 그러나 이들의 조우는 고문 피해자가 가해자를 대면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보여줍니다.

박정희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김순자 씨
김순자 (박정희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얼굴 보고 싶어요. 나와 정면을 마주보고 싶어요. 그 사람들 만나, 지금 만나면요 쳐다보고 웃고 싶어요. 어느 때는, 아, 내가 저놈들 원수를 어떻게 갚아? 이랬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들도) 너무 불쌍하죠."

▶[취재파일] 간첩 조작 기술자와 피해자들 ① - "나를 고문한 자를 마주보고 싶다"

아르헨티나와 비슷한 시기, 마찬가지로 군사 정권의 폭정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고문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 이제 몸 가누기도 쉽지 않고,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밤에 잠을 이루기 어려울 만큼 쇠약해진 고문 피해자들을 만났습니다. 지구 반대편의 공간을 살아온 고문 피해자들은 모두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들을 대면하고, 인간으로서 사과를 받고 싶다."

그러나 민주화가 되고 정권이 바뀌어도, 국가는 이들에게 마지막 소원을 풀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독재정권 시절,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하는 데 앞장섰던 권력기관들이 특히나 강경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형제복지원 사건 관련 훈장을 받았다가 취소된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데 동의한 것과 달리, 경찰·국정원·국방부 등 사정기관들은 이들의 명단을 공개하는 게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3년의 소송전, 판결이 나와도 스스로 움직이지 않는 대한민국 정부


고령의 피해자들은 시민단체 <인권의학연구소>의 도움을 받아 행정소송을 냈습니다. 행정안전부의 고문 가해자 명단 공개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3년 동안의 지리한 법정 다툼. 국가 안보를 이유로 명단을 공개할 수 없다는 정부 논리에 대해 재판부는 이렇게 판시했습니다.
 
서훈 취소 대상자들의 성명과 그 취소사유에 대한 공개는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 과거에 발생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에서 나아가 다시 같은 유형의 국가폭력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이 사건 서훈취소 대상자들의 성명 및 그 취소사유를 공개함으로써 얻는 공익과 피해자들의 권리구제 이익 등이 이로 인하여 침해되는 이 사건 서훈 취소 대상자들의 사생활의 비밀에 관한 이익보다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서울행정법원 제1부 판결문 中 (재판장 안종화 부장판사, 장성욱 판사, 고준홍 판사)

혹한의 추위에도 3년간 법정을 찾았던 고령의 고문 피해자들은 승소 판결이 난 순간, 죽기 전 마지막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까 싶은 기대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하지만 판결 확정 후 한 달이 지나도록 고문 가해자들의 이름은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문 받고 복역하느라 청춘을 날리고, 출소 후 먹고 사느라 닥치는 대로 일하며 살아온 고문 피해자들은 세세한 행정절차를 알 턱이 없었습니다. 삶의 대부분을 무너뜨린 조국이지만, 그래도 법원의 판단이 있었으니 국가는 응답할 거라 믿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판결 확정 후에도 정부는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원종진 취재파일용

SBS 취재진이 왜 판결 승소에도 정보가 공개되지 않는지, 정부에 대신 질의했습니다. 돌아온 답변은 "다시 정보공개를 청구하면 검토해 공개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해당 판결은 정보공개거부 처분을 취소한 것일 뿐, 우리 행정법에 정보 공개를 강행하는 규정은 없기 때문에 판결 승소 이후 자동으로 명단을 공개할 의무는 없다는 것입니다. 행안부의 이러한 답변은 매우 '합법적인' 답변입니다. 하지만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수십 년 보안관찰을 받으며 인생을 유린당한 이들은 다시 한번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정부의 답변을 기자를 통해 전해 들어야 했습니다. 정부의 답변을 전해 들은 이들은 기자가 감히 어떻게 묘사하기엔 어려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눈물 닦는 김양기 씨
김성주 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소속/고문 피해자 행정소송 대리)
"행정안전부의 답변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동안 3년간 우리가 그 명단을 요청을 해왔고, 행안부는 이미 그 명단을 다 알고 있거든요. 명단을 수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고. 그런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런 태도는 피해자들로서는 사실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죠."
 

대한민국이 고문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는 방식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 (사진=연합뉴스)

명단 공개를 두고 피해자와 정부가 소송전을 벌이던 시기, 명단 공개에 반대했던 경찰청과 국방부, 국정원이 별안간 사과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제발 알려달라'는 가해자들 이름은 알려주지 않던 기관들이 사과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못 미더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과의 방식 또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서한문'이라는 제목의 경찰서장 사과문이 A4용지 한 장에 인쇄되어 전달되었습니다. 전두환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당한 기억 때문에,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군복이나 군화 비슷한 것만 봐도 놀란다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군복 입은 군인이 집으로 찾아와 "사과받을 의향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 고문 피해자에게 불쑥 나타나 "사과하면 받을래요?"

김양기 씨
김양기 (전두환 군사정권 고문 피해자)
: 옛날에 내가 고문을 당할 때 그 지하실에서 내려오는 '쿵쿵쿵' 하고 고문하려고 내려오는 그 군홧발 소리. 일언반구도 없다가 무죄 판결 받은 지 10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뜬금없이 느닷없이 하루아침에 나타나서 '사과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정부의 입장을 물었습니다.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종료된 이후, 행안부는 산하에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을 설치해 국가기관들에게 10년간 사과를 권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독려'하는 수준이라 장관 차원의 의지가 없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습니다.

독재정권 시절 국가폭력을 저질렀던 기관들도 나름의 딜레마가 있다고 말합니다. 전두환 정권 보안사령부의 후신인 군사안보지원사령부 관계자는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기관으로 거듭나 기관명도 바꾼 상황인데, 보안사 시절의 잘못을 사과하는 것에 대해 고민이 있는 것도 사실" 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문 가해자와는 일면식도 없는 지금 세대의 기관원들이 '사과하라'는 상부 명령을 이행할 때, 자신의 일이라 여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시간은 흐르고, 역사의 물줄기는 상처의 발원지로부터 더 멀리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 강물 위에 사과와 화해의 종이배를 띄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져가고 있습니다.
 

천수를 누린 독재자, 고문 피해자들은 아직도 가해자 이름을 모른다

전두환, 노태우/12.12 쿠데타

지난달 23일 전두환이 죽었습니다. 박정희, 노태우에 이어 국가 폭력을 저질렀던 정권의 수장들은 이제 저 세상 사람이 됐습니다. 가장 큰 선거판을 앞둔 시점. 정치인들은 각자의 이해득실에 따라 과거를 평가하는 발언을 쏟아냅니다. 차기 국가 수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두 사람은 "전두환이 다른건 몰라도 정치는 잘했다", "전두환, 경제는 성과...박정희는 눈에띄는 정치인" 이라는 헤드라인으로 매스컴에 오르내렸습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이용만 당하며 살아온 이들은 90이 넘어가는 삶의 후반부에서도 사과와 위로의 말 대신, 또 한 번의 연극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문 피해자 김철 씨
김철 (노태우 정권 고문 피해자)
그래도 내가 태어난 조국이니까. 어떻게 해보려고. 조국이라고 생각해 보려고 하더라도...정치하는 사람들의 속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고...

또 한 번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말들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수십 년간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못하는 나라가 과연 '나라다운 나라'로 거듭날 수 있을까요?

고령의 고문피해자들은 지난 20일 '다시 정보공개청구를 하면 검토하겠다'는 행안부 입장에 맞춰 다시 한 번 공문을 띄웠습니다. 피해자들은 해가 바뀌기 전인 오늘까지 답변을 달라는 호소를 공문에 적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한민국 정부로부터의 대답은 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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