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도 취재파일로 설명해 드렸던 내용이긴 한데요, 국내에서 대형 공연들은 기업의 후원 없이는 열리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후원’의 대가로 다량의 초대권을 제공하는 게 관행이죠.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약간의 초대권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서, 후원 받은 금액만큼 공연 표를 제공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후원 기업은 이 표를 자기들의 VIP고객들에게 제공하지요. P석 같은 옥상옥 등급이 자꾸 생겨나고, 액면가도 올라가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공연기획사 입장에서는 액면가가 비쌀수록 초대권 제공 수량을 줄일 수 있습니다. 초대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특별해 보이는 등급에 높은 가격을 매긴 표를 받는 게 기분 좋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때로는 후원 기업 측에서 공연기획사측에 최상등급 표 가격을 높이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몇 년 전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의 내한공연을 주최했던 기획자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이 공연의 최상등급 표 값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높은 금액이었는데, 당초에는 이보다 낮은 가격을 생각했지만, 초대권을 받아가는 후원 기업에서 요구해 와서 계획보다 크게 높였다는 겁니다.
제가 P석을 취재하던 도중, 예술의전당은 VVIP석, P석 같은 옥상옥 좌석이 공연 가격과 좌석등급 거품의 원인이 된다고 보고, 주요 대관단체들에게 공문을 보내 자제를 요청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대형 공연이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상황에서, 대관 공연이라고 해서 예술의전당이 팔짱만 끼고 바라보기에는 문제가 심각해졌다는 판단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 보도가 나간 지 몇 달 후, 다시 P석 공연이 등장했습니다. 오는 7월로 예정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내한공연 ‘지젤’이 바로 그 공연입니다. P석이 무려 40만원이나 하니 아무리 유명 단체라 해도 손이 떨리는 가격입니다. 이미 많은 발레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다시 취재에 나섰습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2008년에도 세종문화회관에서 ‘돈키호테’와 ‘갈라 프로그램’으로 공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는 최고가가 각각 20만원, 15만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공공 기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주최해서 대관료 부담이 없었고 수익에 목매달지 않아도 됐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4년 만에 같은 단체의 내한공연 가격이 두 배 이상으로 오른 것은 납득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번 공연 기획사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가 주 단위로 개런티를 받고, 호텔도 대부분 1인 1실을 사용하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악장을 데려온다면서 가격이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습니다. 그러나 세종문화회관에서 당시 공연을 기획했던 사람들을 직접 접촉해 알아본 결과, 이런 조건은 그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는 한국 뿐 아니라 대만에서도 공연할 예정인데, 대만에서는 ‘라 바야데르’와 ‘갈라 프로그램’을 선보입니다. 2000석의 대만 공연장에서는 최고가가 우리 돈으로 30만원 정도로 책정됐습니다. 물론 단순 비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만, 대만에서는 프로그램도 두 개로 선택의 폭을 넓혔는데, 한국에서는 ‘지젤’ 하나로 8번이나 공연하면서 이렇게 가격도 비싸니 도대체 공연 계약을 어떻게 한 건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지젤’보다는 ‘라 바야데르’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장기를 훨씬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게 발레 전문가들의 얘깁니다. ‘지젤’만 8번 공연하겠다고 한 것은 지난해 김연아 피겨 프로그램과 국립발레단의 지젤 첫 매진 등으로 지젤의 인기가 높아졌던 것에 편승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발레를 잘 아는 기획자라면 이런 식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단순히 표값이 비싸다는 것만 갖고 문제를 삼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의 P석 역시 기업의 후원을 염두에 두고 액면가를 높인 좌석입니다. 후원 문화와 초대권 관행이 역시나 작용한 것이죠. P석과 VIP석이 1층의 중앙은 다 차지했고, R석은 역시나 구석자리로 밀려났습니다. 2층은 VIP석과 R석으로 구성됐고, 15만원인 S석은 3층입니다. 가장 싼 티켓은 만 6천 5백원으로 매우 저렴하다지만, 평소 공연에서는 개방하지 않고 닫아두는 경우도 많은 4층 객석의 가장자리입니다. ‘생색 내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 공연은 예매 오픈 초기에 조기예매 할인 혜택을 제공하면서도 P석은 제외했습니다. 가장 비싼 좌석인데도 할인에서 제외했던 이유는 기업 협찬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미리 할인가의 티켓이 나오면 곤란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연 기획사 관계자는 “P석은 우리도 못 사요. 어차피 P석은 기업 마케팅용으로 만든 좌석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취재를 시작하면서 예술의전당 측에 또다시 P석 공연이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리고(이 공연은 예술의전당이 아닌 다른 티켓구매 사이트를 통해서 예매를 일부 오픈했기 때문에, 예술의전당도 예매 시작 초기에는 좌석 배치나 구체적인 좌석 배정 수 같은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공문 발송 정도로 그쳐선 안될 것이라고 조언했습니다. 마침 신임 모철민 사장이 공공성 강화에 관심이 많아 예술의전당은 아예 대관 제도를 개선하기로 하고 정책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또 다시 초고가의 P석이 등장했다는 내용과 함께 P석 VVIP석 같은 등급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예술의전당의 제도 개선 방침까지 일부 취재해 5월 12일 8시 뉴스에 보도했습니다.
이날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공연 예매 사이트에서는 P석이라는 명칭이 사라졌습니다. P석은 VIP석으로, VIP석은 R석으로, 이런 식으로 한 등급씩 좌석 명칭을 변경한 것입니다. 예술의전당이 공연 기획사에 요구한 것이죠. 이미 예매를 시작한 지 꽤 시일이 지나 가격까지 조정하지는 못했다고 예술의전당은 밝혔습니다.
그리고 5월 15일, 예술의전당은 신임 사장 취임 간담회에서 P석과 VVIP석 같은 등급은 앞으로 허용하지 않고, 표준 좌석등급제를 시행하겠다는 내용의 대책을 공식 발표했습니다. 표준 좌석등급제는 R석을 최고 등급으로 하되, 등급당 좌석 수도 고무줄처럼 늘리지 못하도록 한도를 두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내용도 취재해 8시 뉴스에 다시 보도했습니다.
예술의전당이 대책을 발표하자 반향은 컸습니다. 거의 모든 신문들이 예술의전당의 정책 발표 내용을 다음날 기사로 다뤘고, 몇몇 신문들은 P석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기사에서 제가 지난해 말과 5월 12일에 다뤘던 P석 사례를 담았습니다. 사설이나 칼럼에서 P석으로 상징되는 공연 시장 거품 문제를 언급한 신문도 있습니다. 제 기사에서 썼던 ‘R석은 레귤러 석, S석은 사이드 석’이라는 말도 화제가 됐습니다.
예술의전당은 표준 좌석등급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할지를 놓고 공연 기획사 대표들과 간담회를 여는 등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등급당 좌석 수를 제한하면 P석은 없어지더라도 좌석 수가 줄어든 만큼 최고 등급 가격이 올라갈지 모른다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P석, VVIP석이 난무하는 현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러다간 P석보다 높은 G(God)석이 나올 거라는 농담까지 들었습니다. 최대한 부작용을 줄이되 비정상적으로 거품이 낀 공연시장을 조금씩이라도 바꿔나가야 합니다.
후원한 대가로 다량의 초대권을 받아가는 문화도 바뀌었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에서는 순수한 공연 후원이 대셉니다. 후원금을 낸 만큼 표를 받아간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후원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공연계는 지나치게 기업 후원에 의존해 현상 유지에만 급급하지 않고, 관객 저변을 넓히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기업 후원과 초대권 관행을 현실적으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해도, 이 관행이 지나쳐 시장 질서를 해치고 정작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소비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일이 계속된다면 진짜 관객은 점점 줄어들고 결국 공연시장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요.
지난해 말 P석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이후, 후속 기사도 썼고, 예술의전당이 대책까지 내놓았으니 취재기자로서 보람을 느낍니다. ‘P석 전문기자’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앞으로 다시는 P석 문제를 취재하지 않아도 된다면 더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