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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쿠버올림픽 대회 첫 날, 네 가지 이야기

# 1.

개막 전날(12일) 저녁. 퍼시픽 콜리시엄 빙상장에서 한국 대표팀의 연습이 진행됐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훈련이 10분 정도 진행됐을 때, 갑자기 큰 고함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헤이! 차이니즈! 스탑!!!"

여자대표팀의 최광복 코치가 관중석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최 코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중국 대표팀의 관계자가 비디오 카메라로 우리 팀의 연습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는 최 코치의 거듭된 호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촬영을 계속했다. 그러자 최 코치가 가방에서 코팅 된 종이 한 장을 꺼내더니 문제의 관계자에게 펼쳐 보인다. 파란 색으로 커다랗게 프린트된 한자 네 글자.

'撮影禁止 (촬영금지)'

출국 전 인터뷰에서 최 코치는 '경기 전 신경전에서부터 중국에게 절대로 밀리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저 경고문도 밴쿠버 입성 전에 미리 준비했다고 한다. 쇼트트랙 공개 연습에서 상대팀에 대한 촬영은 '불법'은 아니고 소위 '비매너' 행위라고 한다. 중국 관계자는 아랑곳없이 끝까지 촬영을 계속했다.

여자대표팀은 2006년 토리노 올림픽 이후 계속 중국에게 밀리는 양상이었다. 지난해 11월말 이후, '호랑이 지도자'로 소문난 최광복 코치가 지휘봉을 잡았고, 엄청난 훈련량으로 체력을 몰라보게 끌어올렸다. 그 이후 실전이 없었기 때문에, 향상된 체력이 어떤 결과로 연결될 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황.

한 가지 확실한 건 여자팀이 대회 전 '심리전'을 주요한 전술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곱게 코팅된 '撮影禁止' 역시 그 일환인 셈이다.

"밴쿠버 현지에 가서, '한국 여자팀이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소문이 나길 바랍니다. 그러면 중국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긴장하다 보면 레이스 상황에서 서두르게 되고, 서두르면 실수가 나올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린 그걸 노립니다." (최광복 코치. 1월 22일 인터뷰)

연습 때부터 후끈 달아오른 '한-중 신경전'은 모두에게 신기했나보다. 우리 팀의 연습을 '예습 교재' 삼아 중계방송 리허설을 하고 있던 대회 주관방송사, 미국 NBC 방송 카메라가 모두 최 코치와 중국 관계자를 번갈아가며 클로즈업했다. 우리 팀도 곧장 다음 순서에 펼쳐진 중국 대표팀의 연습을 관중석에서 세심하게 지켜봤다. 촬영은 하지 않았다.

# 2.

올림픽마다 국제방송센터(IBC)가 차려진다. 각국 중계방송사들이 사무실과 방송장비를 차리고 올림픽 방송을 제작하는 곳이다. 각 대회 때마다 IBC 내에서는 방송사들 사이에 화면 교환이 활발하게 벌어진다.

예를 들면,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미터의 조추첨이 오늘 열렸다. 우리의 기대주 이승훈의 레이스 파트너로 네덜란드의 노장 밥 데 용이 결정됐다. 그러면 나는 네덜란드의 중계권사인 NOS로 달려간다.

"밥 데 용 화면 있어요? 우리 이승훈 화면이랑 바꾸면 어때요?"

역대 올림픽에서 한국의 방송사들은 주로 이 '화면 트레이드'에서 '파는 쪽'보다는 '사는 쪽'에 가까웠다. 대회 최고스타들이 보통 스포츠 강대국 출신이고, 냉정히 말해 우리 대표선수들에 대한 해외 언론의 관심은 낮은 편이었기 때문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마이클 펠프스의 어린 시절, 가족, 훈련 화면들을 구하려는 각국 방송사 직원들 때문에 미국의 중계권사 NBC 사무실 문지방이 닳을 지경이었던 반면, 국내 방송을 찾는 손님은 드물었다.

이번 대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IBC에 입주한 방송사들 대부분이 우리 사무실을 기웃거린다. 방송장비의 종류가 달라서 화면 복사가 힘든 경우에는, 아예 편집 장비를 통째로 들고 오는 경우도 있다. 언어는 달라도 인사말은 똑같다.

"안녕하세요. OO 나라 OO 방송입니다. 김연아 화면 구할 수 있나요?"

일본과 캐나다처럼 여자 싱글의 승부에 특히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는 리포터들이 찾아와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한다. 짐작 가능한 이유로, 일본 방송사들의 질문은 가끔 집요한 경우가 있다. 다음은 대회 초반에 일본의 한 방송사와 주고받은 문답이다.

(몇 가지 김연아에 대한 질문과 답이 오간 뒤)

일본 리포터 : 이성훈 씨는 김연아 선수가 우승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나 : 김연아 선수가 지금까지 보여준 기량을 생각하면, 당연히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리포터 : 확률을 숫자로 표현하자면 어느 정도입니까? 100%입니까?

나 : (조금 당황하기 시작하며) 스포츠의 세계에 100%는 없으니까... 한 90% 정도?

일본 리포터 : 그럼 김연아 선수 말고 다른 선수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 : (질문의 의도를 궁금해 하며, 논란의 빌미를 주지 않는 답을 고민한 끝에)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 조애니 로셰트 선수도 금메달을 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리포터 : 그럼 아사다 마오의 금메달 가능성은 3%라는 말씀이십니까?

나 : (&*$%@!) ..... 어렵네요.

       

 

 
# 3.

2008년 12월 고양에서 열린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 때의 일이다. 쇼트 프로그램이 끝난 직후, 1위에 오른 김연아와 생방송으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가 끝난 뒤 선배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누가 뒤에서 쫓아 오냐? 왜 그렇게 말이 빨라?"

속으로 뜨끔했다. 난 내심 그 인터뷰를 빨리 끝내고 싶었던 거였다. 한국팬들 앞에 처음 서는 국제대회. 최강의 우승후보로 대회 3연패에 도전. 워밍업 때부터 아이돌 스타의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엄청난 함성. 당시 중계방송에 나온 것처럼 김연아는 경기 직후 눈물을 보였다.

100일 뒤 LA에서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게 될지 몰랐었지만, 당시 그녀의 눈물은 인터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녀의 어깨에 또 하나의 짐을 얹고 싶지 않은 마음이,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빠른 질문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 기자는, 본질적으로 선수에게 압박감을 더 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잘 하면 잘 하는 대로, 못 하면 못 하는 대로 그들 경기에 대한 논평을 해야 한다. 모든 경기단체와 선수들은 언론 보도와 같은 정보를 통해 관심을 가지고 TV와 경기장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돈과 열정을 기반으로 '먹고 산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나의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한국 스포츠 역사상 가장 큰 세계적인 관심과, 그 만큼의 부담 속에 올림픽에 참가하는 그녀다. 나의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그녀의 압박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까.

# 4.

내일(14일) 열리는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미터의 조편성이 발표됐다. 우리나라의 기대주 이승훈은 네덜란드의 밥 데 용(Bob de Jong)과 같은 조에 편성됐다. 데 용은 세계 최고의 장거리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2006년 토리노대회에서 10,000미터 금메달, 98년 나가노 대회 은메달을 차지했다. 5,000미터에서도 2001년 세계선수권 우승을 차지했다. 세계선수권 장거리 종목에서 딴 메달이 15개나 된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레이스 파트너가 누가 되는지는 대단히 중요하다. 옆 선수의 페이스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보다 조금 나은 선수 옆에서 엎치락뒤치락 접전을 펼치는 것이 기록 단축에 유리하다. 너무 뒤처지거나, 너무 앞선 선수를 만나면 경쟁을 펼칠 선수가 없기 때문에 기록이 좋아지기 힘들다.

앞선 글에서 쓴 것처럼, 이승훈은 지난해 쇼트트랙 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한 뒤 7월에 장거리 선수로 전향했다. 때문에 이번 시즌 월드컵 시리즈에서는 언제나 세계정상급에 한참 못 미치는 선수들과 함께 레이스를 펼쳐야 했다. 언제나 레이스 파트너와 한참 떨어져 외로운 스케이팅을 펼쳐야 했다. 그러고도 두 달 사이에 30초 가량 기록을 단축했다.

이승훈은 내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기량을 모두 끌어낼 파트너와 레이스를 펼치게 되는 셈이다. 이승훈의 무모해보였던 도전이, 점점 더 흥미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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