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직후, 임시정부 수립 논의가 한창일 때, 이회영은 임시의정원 자리를 박차고 북경으로 돌아온다.
권력의 유혹에 빠지기보다 독립운동의 힘을 규합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민중의 무력에 의한 투쟁만이 빼앗긴 조국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확신하고, 의열단을 후원하며 일본군 핵심 간부나 식민지 수탈기관 등을 겨냥한 직접투쟁을 독려했다.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과 함께 ‘북경의 삼걸’로 꼽힌 이회영. 그는 당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의 모범이자 사표(師表)였다.
(SBS인터넷뉴스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