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가족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공개수배를 받던 이호성(41)은 결국 10일 밤 한강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야구명문 광주일고와 연세대를 거쳐 프로야구 해태 타이거즈에서 4번타자로 활약했던 이호성이 엽기적인 사건의 용의자로 공개수배를 받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되기 전까지 그의 범죄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대다수 야구인들은 "도대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며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대학시절 두 차례나 타격상을 수상할 만큼 재능을 보였던 이호성은 1990년 해태에 입단하자 마자 주전 자리를 꿰차고 2년 연속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자가 됐고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해태가 삼성을 꺾고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90년대 후반부터는 명문 해태의 4번타자를 맡는 등 중심타자로 활약했던 그는 더그아웃에서 손으로 못을 박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으며 1999년과 2000년에는 주장으로 개성이 강한 선수단의 '군기반장' 노릇도 했다.
현역시절 한 경기 최다 병살타(3개)와 연속타석 최다 병살타(3타석) 등의 불명예 기록도 있지만 이호성은 그보다는 찬스에 강한 중장거리 타자로 야구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2000년 1월 프로야구선수협의회 파동이 터졌을 당시에는 협의회 결성을 주도한 양준혁과 마찰을 빚어 반대 기자회견을 여는 등 불참을 선언했다.
하지만 시즌 뒤 주력 선수들이 보복성 퇴출을 당하자 협의회 재건에 발벗고 나서 2001년 1월 송진우에 이어 제3기 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호성은 그러나 2001년을 끝으로 구단에서 등이 떠밀리며 유니폼을 벗게 됐으며 이후 광주에서 '호성 웨딩플라자'라는 예식장을 운영하며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예식장 사업이 실패한 뒤에는 부동산 투자에 손을 대기도 했지만 2005년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후 광주를 떠나 해태시절 선후배들과도 완전히 연락을 끊은 것으로 전해진 이호성은 일가족 4명의 실종사건 용의자로 공개수배되자 마자 투신 자살,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이날 밤 소식을 접한 야구인들은 "현역시절 카리스마 있는 선수로 해태의 주력타자로 활약했는데 도무지 뉴스 내용이 믿기질 않는다"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