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여의 '산고' 끝에 한국과 미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을 눈앞에 두고 있다.
농업과 중소기업 등 특정 산업과 집단의 피해가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한미 FTA 협상을 일관되게 추진한 가장 큰 이유는 FTA가 국민 대다수 소비자의 후생을 증가시킬 것이라는 믿음에 있다.
FTA는 시장 개방과 수입관세 인하가 핵심이다. 관세 인하로 수입제품의 가격이 하락하면 국내생산자들 또한 가격을 낮추려는 노력을 경주하게 되고 결국 국내물가는 전반적으로 하락한다. 소비자들은 지금보다 값싸고 질 좋은 상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다.
서비스 분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는 소비자가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의 폭이 좁지만 한미 FTA가 체결되면 소비자들의 다양한 선택이 가능해져 이 역시 소비자 후생 증가로 이어진다는 설명이다.
실제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이 지난해 수행한 분석에 따르면 한미 FTA가 체결돼 생산성이 1%포인트 증가하면 가격인하 등에 따른 소비자 후생수준은 6.99%(281억달러) 늘어날 것으로 추정됐다.
국민소득으로는 1인당 약 30만원, 4인 가족 기준으로는 연소득 120만원의 소득증대 효과를 얻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시장개방에 따른 이익이나 혜택은 광범위하고 장기적으로 나타나는데다 개별 시장에서의 경쟁 구도 여하에 따라 그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한미 FTA가 체결되더라도 국내 소비자에게 얼마만큼의 혜택이 돌아올지를 지금 정확히 예측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부업체의 독점적 시장이 형성돼 있거나 미국 기업이 경쟁력을 갖춘 시장에서 고가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다면 관세 인하가 소비자가 아닌 기업의 이익 확대로 귀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미 FTA 체결되면 소비자는 새로운 경제 환경을 맞이하게 된다. 한미 FTA가 체결됐다는 가정 하에 소비자 후생의 변화를 2012년 어느 날 김 부장 가족의 일상 생활을 통해 알아보자. 특정 품목의 협상 결과에 따라 내용은 달라질 수 있다.
◇ "수입차 한번 몰아볼까"
2012년 3월3일. 지난번 정기 인사에서 부장으로 승진한 김 부장은 이번 기회에 새 중형 승용차를 구입하기로 마음먹고 역삼동에 위치한 미국 포드사의 쇼룸에 들렀다.
그동안 국내 시장을 독점하다시피한 현대자동차 제품만을 이용해 왔던 김 부장. 그러나 최근 국내 수입차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입차와 국산 고급 승용차간 가격차가 경미한 수준으로까지 좁혀지자 수입차를 구입하기로 마음 먹었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꿈꾸기 힘들던 수입차를 몰 수 있게 된 것은 다름 아닌 FTA의 영향이다.
2007년 4월 한미 FTA가 타결됐을 때만 해도 수입차 가격이 최소 7.4%의 인하되는 효과가 발생한다고 들었지만 FTA 발효 후 몇 년이 지나도 미국산 자동차의 가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미국 자동차 회사들이 그동안 국내 시장에서 고집해 오던 고가 마케팅 전략을 포기하지 않아 관세 인하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올해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한.유럽연합(EU) FTA 발효가 6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유럽 자동차 메이커들이 시장 선점을 위해 대대적인 할인에 나섰고 이에 그동안 느긋한 모습을 보이던 미국업체들도 부랴부랴 가격 인하 경쟁에 뛰어들었다.
가격 인하로 시작된 업체간 경쟁은 서비스 부문으로 확대돼 콧대 높던 해외 자동차업체들이 최근에는 4년, 8만km 무상 서비스를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다.
자동차 구입 계약을 끝낸 김 부장은 인근 강남역에 위치한 미국 명품 보석가게인 '티파니'의 강남지역 매장으로 향했다. 오늘이 바로 김 부장의 결혼 20주년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티파니' 매장에 들른 김 부장은 인터넷을 통해 미리 점 찍어둔 '티파니 스윙링'을 별다른 고민없이 구입했다.
가격이 만만찮았지만 김 부장은 그동안 고생한 아내를 위해 호기를 부리기로 했다. 입사동기인 옆 부서 박 부장이 며칠 전 '티파니' 쥬얼리 세트를 부인에게 선물했다는 소식도 자극이 됐다.
관세 인하에도 불구하고 티파니는 여전히 고가 브랜드다. 그러나 '티파니' 제품은 국내 쥬얼리 제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디자인으로 국내 '아줌마'들 사이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같은 시각 광장동에 위치한 한 대형마트 내에서 김 부장의 부인 한 씨는 결혼 기념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장을 보고 있었다.
한 씨가 오늘 준비할 요리는 프랑스 대표 쇠고기 요리인 '샤또브리앙 스테이크'. 물론 쇠고기는 미국산을 쓸 예정이다.
한우와 미국산 쇠고기 가격차가 많이 줄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우는 미국산에 비해 2∼3배 높은 가격을 줘야 구입할 수 있다. 그래도 광우병 우려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금지됐던 FTA 이전과 비교하면 수입산은 물론 한우 가격도 절반 이상 떨어졌다.
한 씨는 스테이크와 함께 내놓을 프렌치프라이를 만들기 위해 크기로 소문난 미국산 감자, 샐러드 드레싱을 위한 플로리다산 오렌지도 함께 구입했다.
마지막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산 대표 와인 '도버 캐년 쿠조 진팔델'을 2만원에 구입하면서 특별한 저녁식사를 위한 한 씨의 준비는 끝났다.
4인 가족이 먹기에 충분한 스테이크용 고기와 야채, 드레싱, 와인까지.. 한씨가 저녁식사를 위해 지불한 돈은 불과 8여만원 남짓. 한씨는 속으로 '이게 바로 FTA로 인한 효과구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다.
마트에서 무료로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한 씨는 마트내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대기실은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용할 수 있도록 간단한 다과가 준비돼 있고 대형 벽걸이 PDP-TV에서는 이용자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케이블 방송을 틀어주고 있다.
버스 시각을 확인한 한 씨는 이내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미드'(미국 드라마)로 눈길을 돌린다. 한미 FTA 타결 이전 젊은이들에게 불어닥친 '미드' 열풍은 이제 주부들에게로 확대되고 있다. 매일 불륜과 출생의 비밀로 도배된 한국 드라마에 지친 아줌마들이 잘 짜여진 '미드'에 하나둘씩 빠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지상파 TV는 물론 케이블 TV의 외국 방송물 편성비율이 늘어나면서 한 씨는 다양한 '미드'를 입맛 따라 골라서 보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물론 한 씨도 한미 FTA 발효 이후 모든 것이 만족스러지만은 않다. 많은 품목의 가격의 내려갔지만 화장품, 밀가루 등 일부 품목의 소비자 가격은 FTA 체결 이후에도 오히려 높아져 왔다.
외국 수입선과의 장기 독점계약을 통해 독점적 이윤을 추구하는 수입업자 때문에 미국산 화장품은 높은 관세율이 철폐됐음에도 불구하고 FTA 체결 이전에 비해 오히려 가격이 올랐다.
밀가루 가격 역시 마찬가지다. 밀은 국내 자급도가 1%에 못 미치는 제품인데 수입 시장은 상위 3개사가 전체의 75%를 점유하는 과점 형태가 지속되고 있다. 결국 밀 가공식품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 증가는 밀가루 제품의 가격인상으로 이어지고 있다.
FTA로 의약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됐지만 미국 신약에 대한 특허보장 기간이 연기되면서 약값 역시 FTA 체결 이전에 비해 가격이 많이 올라 부담이다.
한 씨는 조만간 발효될 EU와의 FTA를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의 FTA가 채워주지 못했던 부분을 EU와의 자유무역이 채워주길 믿으면서.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