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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싸움 구경하고 '마법의 세계'로 통할 듯한 그곳, 이게 '찐'이다 [스프]

[커튼콜+] 펍의 나라, 영국 (글 : 황정원 작가)

황정원 커튼콜+ 사진 : 게티이미지
아이가 런던에서 어린이집을 다니던 무렵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다. 그런데 초대장에 쓰인 파티 장소가 이상했다. '펍'이라니. 아이 생일 파티를 술집에서? 그런데 알고 보니 펍은 꽤나 일반적인 아이들 생일 파티 장소였다.

영국에서 펍은 단지 술집이 아니다. 물론 술을 팔지만, 술만 팔지 않는다. 혹자는 이웃과 함께 쓰는 거실이라고 펍을 표현한다. 애초에 펍(Pub)이란 이름이 '공공의 집(Public House)'의 줄임말에서 나온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오랫동안 영국인들의 삶 속에 밀착되어 온 펍 문화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불가능하다. 직장 동료와 퇴근길에 맥주 한 잔 털어 넣으려 들리기도 하지만 일요일이면 아이와 반려견까지 온 가족이 둘러앉아 선데이 로스트(영국인들이 일요일에 먹는 전통적인 식사)를 즐긴다.

중요한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동네 이웃들과 삼삼오오 모여 떠들썩하게 경기 보는 맛에 펍을 찾기도 한다. 펍이 주최하는 당구나 다트, 혹은 퀴즈 대회에 친구들과 함께 참가할 수도 있다.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펍이 있는가 하면 낮 시간대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하는 펍도 있다.

이렇듯 다양한 펍의 면면을 짧게나마 엿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펍 투어'에 참가하는 것이다. '펍 투어'는 가이드와 함께 1시간 반 동안 유서 깊은 펍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다양한 문화와 깊은 역사를 밀도 깊게 알아본다.

"우리 동네 펍이 전기세와 난방비로 한 달에 얼마내는지 아십니까?"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투어 가이드 셸든이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어리둥절해졌다.

"1만 3,000파운드(약 2,200만 원)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예상보다 큰 금액에 놀란 투어 참가자들이 웅성거렸다. 최근 몇 년간 난방비와 전기세가 급등하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셸던은 작년 한 해 동안 역대 가장 많은 펍들이 문을 닫았다는 설명을 이어갔다. 놀랍지 않았다. 얼마 전 오랜만에 펍에서 무심코 맥주 한 잔을 시켰다가 훌쩍 오른 가격에 화들짝 놀랐다.

브렉시트, 코비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연이은 악재의 여파로 영국의 맥줏값은 최근 몇 년 새 크게 올랐다. 임대료 상승 또한 가파르다. 반면 치솟는 생활비에 소비자들은 더더욱 허리를 졸라매는 상황이 계속되니 견디다 못한 펍들이 하나둘 사라지거나 대규모 식음료 업체에 넘어가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사라져 가는 펍 문화에 대한 우려와 함께 시작한 이 투어는 차링 크로스 기차역 앞 '파이브 가이즈'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의 발랄한 빨간 간판이 고풍스러운 잿빛 건물 사이로 녹아들지 못한 채 멀뚱히 걸려 있었다. 셸든에 따르면 이 햄버거 가게 자리에는 원래 17세기 이래 늘 펍이 있었다고 한다.

사진 : Huy Phan
차링 크로스는 역사적으로 영국 남부의 도시 도버로 가는 기차가 출발하는 역이었다. 도버해협을 건너면 바로 프랑스였으니 이곳이 유럽으로 향하는 관문이었던 셈이다. 소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 주인공들이 여행을 시작하려 도버행 기차를 타는 곳도 바로 이 차링 크로스 역이었다. 교통의 중심지이니만큼 각지에서 여행객들이 모여들었고, 이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는 펍이 오래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도심 개발과 함께 국제선 기차들이 런던 동북쪽으로 옮겨가며 차링 크로스 역은 점차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잃기 시작했다. 마지막 펍인 '벨 & 컴퍼스(Bell & Compass)'가 2011년 문을 닫으면서 작은 역사 한 조각이 사라졌다.

'쉽 앤 셔블(The Ship and Shovell)'은 템스강이 주요 교역로로 쓰이던 시대의 산물이다. 배가 여전히 주요 운송수단이던 1852년, 창문에서 강이 보일 정도로 템스강 가까운 곳에 펍을 만든 것이다.

'쉽 앤 셔블'은 특히 강변에서 배(Ship)에 실린 석탄을 삽(Shovel)으로 퍼 나르던 노동자들이 한숨 돌리며 다음 하역을 기다리던 장소로 쓰였다. 인근 사보이 호텔 옆에 위치한 또 다른 펍 '콜 홀 (The Coal Hole)'이 석탄 창고라는 이름을 지닌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보이 호텔의 석탄 창고로 쓰이던 이곳은 이후 석탄 하역 인부들이 즐겨 찾는 펍으로 사랑받으며 명맥을 이어왔다.

'천국까지 절반(Halfway to Heaven)'이라는 이름의 펍은 트라팔가 광장 바로 맞은편에 있다. 런던 게이들의 성지, 소호에 가까운 만큼 맥주와 함께 드랙 쇼나 캬바레 공연을 라이브로 즐길 수 있는 펍이다.

황정원 커튼콜+
많은 사람이 모이는 장소이다 보니 펍은 오래전부터 구경거리를 풀어 놓는 공간으로 곧잘 쓰여왔다. 인근 '램 앤 플랙(The Lamb & Flag)'의 별명이 '피 한 사발(The Bucket of Blood)'인 것도 19세기 이곳에서 상금이 걸린 주먹싸움을 구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골고객이던 작가 찰스 디킨스도 파인트 한 잔을 들고 치고받는 선수들을 소리 높여 응원했을 것이다. 현재 '램 앤 플랙'은 손님들에게 주먹싸움 대신 라이브 재즈 공연을 선보인다.

'하프(The Harp)'는 진정한 에일(Real Ale)이라 불리는 캐스크 비어 애호가라면 꼭 한 번 가볼 만하다. 좋은 맥주와 펍을 지키려는 소비자단체 CAMRA(Campaign for Real Ale)가 2010년 '올해의 펍'으로 뽑았다. 런던 최초였다.

황정원 커튼콜+
술에 진심인 펍이라는 설명에 투어가 끝나고 따로 찾아가 보았다. 추천을 부탁하자 친절한 바텐더가 신이 나 이것저것 따라주며 시음을 권했다. 내 반응을 면밀히 살피던 바텐더의 얼굴에서 에일의 세계로 '입덕'을 권하는 '덕후'의 표정이 보였다.

극장들이 몰려 있는 웨스트엔드 쪽으로 옮겨가자 셸던은 새로운 펍을 설명할 때마다 굵직굵직한 이름들을 입에 올렸다. 오스카 와일드, 길버트&설리번, 리처드 버튼과 엘라자베스 테일러 등 아티스트와 그들의 단골 펍에 얽힌 생생한 일화들이 쏟아졌다. 그리고는 자신이 웨스트 엔드의 펍에서 만난 배우들의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어떤 경험은 사람이 바뀌어도 긴 세월을 건너 계속 반복된다.

어느새 투어의 막바지, 셸든이 이끄는 대로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여기에 이런 곳이? 사람 하나 간신히 통과할 만큼 좁고 어두운 뒷골목에 갑자기 마법처럼 펍 하나가 나타났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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