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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 청년 혁명가, 그가 없었다면 중국은 유럽처럼 됐을 것 [스프]

[중국 智囊, 상하이 토크쇼 ②] 마오쩌둥이 가장 존경했던 혁명가 상앙 (글 : 신형관 중국자본시장연구소 소장·(前)미래에셋자산중국 대표이사)

중국본색 상앙
21세에 진나라 왕에 오른 효공(孝公)은 해외 인재 모집 전형으로 위나라 30세 청년 상앙(商殃)을 중용한다. 이 2030 두 청년이 훗날 진시황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았을 뿐만 아니라, 2천 년간 중국 정치 경제의 틀을 확정했다.

상앙은 파괴적이고 혁신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기존 제도를 뒤엎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부국강병을 추진했다. 그러나 결국 그 과정에서 기득권을 빼앗긴 귀족들에게 훗날 몸이 찢겨 죽는 참혹한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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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봉건제도하의 토지 국유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황무지 개간령을 내리고, 상업적 거래 금지와 물물 교환을 강제하는 등 온 나라를 대농장(大農場)을 만들어 자급자족형 전쟁 국가를 만들어갔다. 이후 진시황 천하 통일(BC 221년)까지 138 년 동안 108번의 전쟁을 치른 진나라는 단 두 개의 직업만 존재했다. 농민 아니면 군인이었다. 상앙의 기획에 따라 진나라는 "호랑지국(虎狼之國, 범과 늑대의 나라)"로 불리며 모든 이웃 나라에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인센티브 제도인 '군공작제(軍功爵制)'를 시행함으로써 과거 봉건제의 전통인 귀족 세습을 깨뜨린다. 노예건 평민이건 전공으로 곡식과 땅, 매끼 식사까지 차등 지급했다. 모두 20단계의 계층 사다리는 오로지 적의 머리를 가져와야 올라갈 수 있었다. 비록 매우 비인간적인 KPI(핵심성과지표)였지만 그 나라에서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룰이 적용된 평민화 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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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중앙의 지방 통제 시스템인 군현제(郡縣制)를 확립한다. 36개 현은 과거 지방 귀족의 세습 적폐를 끊어내고 중앙이 발탁한 관리를 파견하는 혁명적인 조치였으니, 지방 기득권 귀족들의 반감과 저항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으로 확장된 영토는 면적과 인구에 따라 새로 현을 만들었다. 중국의 3천 년간 국가 관리 모델은 부락제, 봉건제, 군현제 3단계로 변화되었는데, 사실 지금도 중앙과 지방(성, 시, 현)의 권력 분배 구조는 군현제의 기본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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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통일된 명령을 하달하기 위해 도량형, 즉 길이, 중량, 용적 등 차이나 스탠다드(China standard)를 만든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진시황이 만든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미 140년 전 상앙이 먼저 시작하였다. 상하이 박물관에는 '상앙 방승(方升)'이라고 불리는 청동기 량(量)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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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 법 집행으로 사회 통제를 추진하였다. 과거에 많은 특권을 누리던 귀족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들었다. 위수(渭河)에서 반대하는 귀족과 학자 700명을 모두 죽이니 강물이 붉게 변했다고 한다. '연좌제'로 가정과 군대를 단위별로 묶어 관리하고 죄를 지으면 묶음으로 공동 처벌하자 3년 만에 범죄 없는 나라가 되었다. 또 상업 억제를 위해 민간 여관을 폐쇄하고, 국영 여관에만 호적 신분증으로 숙박하게 하였으니, 현존하는 호적 제도의 원조가 바로 상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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