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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측 대표, '서울의 봄'에 "홍역, 감기"…북한 대표는 "군사 쿠데타"

남측 대표, '서울의 봄'에 "홍역, 감기"…북한 대표는 "군사 쿠데타"
▲ 1979년 3월 5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남북 간 탁구협회 회의와 회의시 창문으로 보이는 취재진의 모습.

1980년 신군부가 남한 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열린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 남측 대표는 비상계엄조치와 5.18 등을 "홍역" 또는 "감기"에 비유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런 사실은 통일부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2년 간의 기록을 담은 남북대화 사료집을 일부 공개하면서 드러났습니다.

1980년 5월 22일 판문각에서 열린 제 8차 총리간 대화를 위한 제8차 실무접촉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관련 사태에 대해 "매우 불미스러운 사태들", "군사 쿠데타"라고 비판하면서 "한 민족이, 한 혈육이 총칼에 짓밟히는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북한 대표들은 "남조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우리는 상관 안하겠"다면서, 최규하 대통령의 5월 18일 특별담화 중 "대남적화 책동이 날로 격증"되고 "남침의 결정적 시기 조성을 획책하고 있다"는 언급에 격하게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이어 "우리를 걸고드는(부당하게 이용하는) 것을 인정하라"고 회의 내내 집요하게 따졌습니다.

신군부의 헌정 유린과 민간인 학살 자체 보다는 '북한의 위협'을 비상계엄의 명분으로 삼은 것에 대해 더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풀이됩니다.

또, 남측이 신현확 총리의 사임으로 총리서리 체재가 된 데 대해 "총리하고 개별 접촉을 하자고 했"지, "서리하고 하자고는 안 했다"고 자격성을 문제 삼아 회의를 공전시켰습니다.

이에 대해 남측은 사실관계를 부인하지 못한 채 "내정에 대한 간섭", "내부사정 시비"라고 반발하면서 회의 진행을 주장했습니다.

남측 대표는 신군부의 비상계엄조치와 5·18 등 일련의 혼란에 대해 "우리사회는 이따금 가다가 어려운 문제가 나온다"며 당시 상황을 '홍역'과 '감기'에 빗댔습니다.

동력을 상실한 총리 간 회담을 위한 실무접촉은 제10차를 끝으로 성과 없이 막을 내렸고 직통전화도 9월 25일을 마지막으로 끊겼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불과 넉 달 전 남측 상황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다고 판단했을 때만 해도 조건 없는 대화를 제의하는 등 남측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북한은 1980년 1월 1일 이종옥 정무원 총리 명의로 신현확 당시 총리에게 남북 대화를 제의하는 서한을 발송했습니다.

이 서한에서 북한은 "고위당국자회담도 성숙시켜나갈 용의"가 있다며 "귀하와 직접 만나 격의 없는 의견을 서로 나누자"고 제의하면서 시기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고", 장소는 판문점, 평양, 서울뿐 아니라 "제3국도 무방하다"고 밝혔습니다.

조국통일평화위원회 위원장인 김일 부주석 명의로 같은 요지의 서한이 정치권 등 각계 인사 11명에게 함께 발송돼 판문점을 통해 우리 당국에 전달됐습니다.

서한의 수신인에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신민당 총재, 양일동 민주통일당 총재, 윤보선·김대중·함석헌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민족연합 공동의장, 김수환 추기경 등 각 정당 대표와 종교 지도자뿐 아니라 12·12 군사반란의 핵심으로 꼽히는 이희성 육군참모총장이 포함됐습니다.

북은 이 서한에서 신 총리를 향해 '대한민국 국무총리 신현확'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달 북한은 남북 직통전화 재개통을 시도했는데 1976년 8월 판문점 도끼만행 이후 일방적으로 남북 전화 소통을 끊은 후 남측의 재개통 촉구를 3년 6개월 넘게 무시하다가 12·12를 전후해 태도를 바꾼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후 신군부가 권력을 굳혔고 북한 역시 대화 공세에 집중하기 보다는 강경한 태도로 차츰 전환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진=통일부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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