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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90년 된 '일제 잔재' 지정제 건축선, 폐지해도 될까요?

[취재파일] 90년 된 '일제 잔재' 지정제 건축선, 폐지해도 될까요?

건축선, 그리고 지정제 건축선

도로와 대지 사이 경계선을 뜻하는 건축선은 도로 폭을 일정하게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때문에 도로와 맞닿은 대지에 건축물을 지을 때 건축선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건축선을 지키지 않으면 건축법상 형사처벌을 받습니다.

사진1_취재파일 박찬범

건축선 말고도 '지정제 건축선'이란 개념이 별개로 존재합니다. 지정제 건축선은 오늘날의 건축선과 같은 쓰임새이긴 하지만, 독립적으로 존재합니다. 역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지정제 건축선의 시작은 일제 강점기 때입니다.

▶ 일제강점기 '지정제 건축선'이 아직도… (9월 14일, SBS8뉴스)
 

90년 전 일제 잔재, 법적 효력은 여전

지정제 건축선은 1934년 조선시가지계획령에 설치 근거가 나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총독부가 만들었습니다. 조선총독부가 도시 정비를 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지정제 건축선을 설정했습니다.

사진2_취재파일 박찬범

지정제 건축선은 약 9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법적 효력이 남아 있습니다. 건축법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전쟁 등 격변기를 거쳐 지난 1962년에 제정됐습니다. 당시 건축법 부칙에는 일제 강점기 만들어진 지정제 건축선을 현행법과 저촉되지 않는 한 승계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은 토지별 토지이용계획 등 정보를 제공하는 '토지이음' 사이트에서도 조회할 수 있습니다.
 

왜 이곳에 지정제 건축선이? 근거는?

문제는 지정제 건축선이 여전히 현재의 건축법상으로도 규제 근거가 되고 있단 점입니다. 설치 근거도 워낙 오래된 터라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주체가 당시 조선총독부였습니다. 왜 이곳에 지정제 건축선이 있느냐고 물어도, 답해줄 수 있는 기관이 없습니다. 토지 소유주는 내 땅을 관통하거나, 주변을 지나가는 지정제 건축선이 있으면 일단 이유도 모르고 침범해서는 안 되는 실정입니다.

사진3_취재파일 박찬범

지정제 건축선은 서울의 구도심인 용산구, 서대문구 등 일대에 주로 남아있습니다. 국토교통부가 이 지정제 건축선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국민의힘 김학용 의원실의 윤오영 보좌관으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국토부는 지정제 건축선 현황을 따로 파악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김학용 의원실의 질의 이후 현황을 취합하고 있다고만 답했는데, 사실상 체계적으로 관리해 오고 있지 않았던 셈입니다. '토지이음' 사이트를 통해서 그때마다 확인해봐야 합니다.

▶ '토지이음' 사이트 (바로가기)
 

지정제 건축선 폐지,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라?

건축가 A 씨는 지난해 새 사무실을 짓기 위해 서울 용산구 후암동 토지를 매입했습니다. 그래서 매입한 토지 위 건물을 헐고, 새 건축물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지정제 건축선이 걸림돌이 돼 폐지 방법을 알아봤습니다. A 씨 땅 주변 지정제 건축선은 일대 도시 구획과도 맞지 않았습니다. 공용 도로를 관통해서 선이 그어져 있거나, 무허가 건축물이 선 위에 지어져 있어 지켜지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진4_취재파일 박찬범

물론 지정제 건축선을 폐지할 수 있습니다. 지자체 건축심의위원회의 허락을 받으면 됩니다. 문제는 건축심의원회 허락을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과거 전례를 살펴보면, 심의위원회는 없애고자 하는 지정제 건축선 주변 소유주들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지시합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는 실제로 주변 당사자 동의를 받은 뒤 폐지한 사례가 있습니다. A 씨 역시 용산구청으로부터 해당 지정제 건축선 이해관계자들로부터 동의를 받아오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사진5_취재파일-박찬범

A 씨 같은 경우 해당 지정제 건축선과 맞닿거나 관통하는 필지 소유주는 10명으로 추정됐습니다. 이들 10명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들 10명의 개인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찾아다니는 것도 온전히 A 씨의 몫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해당 지정제 건축선은 용산구청과 국토부가 소유한 땅도 관통합니다. A 씨는 이해관계자 허락을 받으라고 지시한 용산구청에게도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결국 A 씨는 일일이 동의를 받는 게 쉽지 않다 보니 건축을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 씨 측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만들어진 지정제 건축선의 수명이 다 했다면 국가가 나서서 없애야지, 왜 개인에게 수고를 전가하느냐는 입장입니다.

지자체도 나름 입장이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이 여전히 법적 효력이 남아 있고, 건축법상 벌칙조항까지 있기 때문입니다. 지자체가 개인이 건축법을 위반해 건물을 짓게 관망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용산구청도 A 씨가 동의만 받아온다면, 해당 구역 지정제 건축선 폐지에 협조하겠다고 합니다. 지정제 건축선을 찬성하는 기관은 없는 셈입니다. 90년 전 조선총독부가 만든 지정제 건축선이 오늘날 누구를 위해 과연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진6_취재파일-박찬범

지정제 건축선, 전면 폐지하려면?

지정제 건축선은 전국에 산발적으로 퍼즐 조각처럼 남아 있습니다. 취합된 자료도 없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이 현재 건축법상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면 여전히 준수해야 하겠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별도의 건축선도 따로 존재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지정제 건축선을 폐지해야 하고, 입법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정부 입법이든 의원 입법이든 법을 일단 발의하고 나서 국회 문턱을 통과하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내야겠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닌 상황입니다.

사진7_취재파일 박찬범

법 개정을 해야 한다면 지정제 건축선의 기반이 되는 건축법을 고쳐야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국회 국토교통위원인 김학용 의원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방안이 고려되고 있는데, 건축법상 지정제 건축선을 승계한다는 부칙을 손보는 방안 등이 고려되고 있습니다. 지정제 건축선을 취재하면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법이라는 소리는 무수히 들었지만, 필요하다고 하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명분도 실익도 없는 지정제 건축선, 그대로 남겨둔 채 100년을 넘기는 게 합리적인지 사회적 논의가 시작돼야 할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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