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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내 친구 에드워드, 퍼디난드, 헨리, 비앙카…실은 피아노 이름입니다

[커튼콜+] 부소니 콩쿠르 우승자 박재홍의 평생 친구 에드워드

스프 커튼콜 박재홍
2021년 부소니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11일과 12일 열린 서울시향 정기 연주회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협연했습니다. 부소니 콩쿠르는 이탈리아가 낳은 위대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부소니를 기리기 위해 열리는 권위 있는 대회죠.

박재홍은 부소니 콩쿠르 우승 후 다채로운 공연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데요, 그를 보면 2021년 콩쿠르 우승 후 골라듣는뉴스룸 커튼콜에 출연해 해줬던 인상적인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그는 부소니 콩쿠르 전 과정에서 줄곧 자신의 동반자였던 에드워드(Edward)와 파사도리(Passadori)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피아노 연주자들은 다른 악기 연주자와는 달리, 자신의 악기를 갖고 다니지 않고 그때그때 연주 장소에 따라 달라지는 피아노를 치게 됩니다. (물론 피아노를 갖고 다니는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같은 예외도 있습니다만) 어떤 피아노를 어떤 콘서트홀에서 치게 되는지는 일반 공연에서도 그렇지만 콩쿠르에서 굉장히 중요하죠.

유명 콩쿠르 중에는 그래서 연주자가 사용할 피아노를 직접 고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여러 브랜드 피아노 중에서 선택하게 하는 콩쿠르도 있지만, 부소니 콩쿠르에서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두 대 중에 한 대를 고르게 했습니다. 참가자들은 경연이 시작되기 전, 15분간 콘서트홀에서 이 두 대를 다 쳐보고, 자신이 칠 피아노를 선택합니다. 이 피아노 중 한 대의 이름이 에드워드였습니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부소니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다. 출처 : 부소니 콩쿠르 홈페이지
부소니 콩쿠르는 이탈리아 북부의 스타인웨이 피아노 딜러인 '파사도리(Passadori)'와 파트너십을 맺어 경연을 진행합니다. 파사도리는 1893년 피아노 조율과 복원 명장이었던 주세페 파사도리가 창립한 가족 기업입니다. 피아노 딜러이면서 대대로 유명한 조율사 가문이죠.

파사도리는 부소니 콩쿠르의 경연에 사용되는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제공합니다. 파사도리에서 제공한 피아노에는 '스타인웨이'라는 브랜드명 외에 '파사도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파사도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데요, 이 피아노들은 모두 이름이 있었습니다.

줄리오 파사도리. 출처 : 파사도리(passadori) 공식홈페이지
"조율하시는 파사도리 선생님(부소니 콩쿠르의 피아노 조율은 줄리오 파사도리가 맡습니다)이 이름을 붙이셨어요. 마치 자식처럼. 그래서 에드워드랑 퍼디난드, 이렇게 두 대를 '데리고' 오셨어요. 같은 스타인웨이인데도 에드워드랑 퍼디난드는 완전히 달랐어요. 다른 제조사 피아노는 다른 게 당연하죠. 들어가는 목재도 현의 강도도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같은 제조사는 같은 재료로 만들었을 텐데, 소리가 너무 달라요. 저도 그게 정말 신기해요."

부소니 콩쿠르에서는 그래서 피아노를 'This' 'That' 혹은 'It' 으로 지칭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This piano, That piano, 이런 식으로 부르면 싫어하고, 대신 'She' 'He' 같은 인칭대명사를 쓰거나 이름을 썼다고 하죠. "I want to play Edward' 이런 식으로요.

박재홍은 자신도 이전부터 피아노를 단순한 '물건' 이상의 존재로 느껴왔다고 했습니다.

피아니스트 박재홍이 부소니 콩쿠르에서 연주하고 있다. 출처 : 부소니 콩쿠르 홈페이지
"저는 언제나 피아노를 그냥 악기로 보지 않고 사람이라고 보거든요. 너무 다른 사람들이어서 얼른 친해져야 해요. 승마하는 친구가 있는데, 말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하더라고요. 잘 접근해서 얼른 친해져야 말을 타고 갈 수 있대요. 말 중에 사람하고 금방 친해지는 말이 있는 것처럼, 피아노 중에도 정말 누구나 친해질 수는 있는데 '에지(edge)'는 없는 피아노가 있어요. 그러니까 80까지는 언제나 갈 수 있는데 100까지는 못 가는, 최대치가 그냥 80인 피아노가 있고, 어떤 피아노는 100이 최대치인데 너무너무 예민하죠. 말이 쉽게 못 타게 하는 것처럼."

그가 에드워드를 선택한 이유를 들어볼까요.

"에드워드 같은 경우는 3년 정도 된 '아기 피아노'였어요. 퍼디난드는 그것보다 더 어려서 6개월 정도밖에 안 되었어요. 그런데 퍼디난드는 저한테는 너무너무 혈기왕성한 거예요. 너무 (말 달리는 몸짓을 하면서) '가자! 가자!' 이런 소리라고 할까요. 소리가 엄청 빵빵했고 대신에 노련미는 없었어요. 너무 새 피아노이다 보니까. 그래서 소리를 컨트롤하기 조금 어려울 수 있겠지만 소리가 작은 사람들은 퍼디난드를 고를 것 같다고 생각했죠. 에드워드는 쉽지 않은 피아노였어요. 소리 색깔이 너무 다양했어요. 너무 다양해서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어떻게 피아노를 치는지 너무 잘 들리는 거죠. 그리고 소리는 좀 작았어요. 저는 체격도 있고 큰 소리를 잘 내는 편이라서 에드워드를 골랐어요."

참가자가 원한다면 치던 피아노를 바꾸는 것도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율사는 연주 장소가 더 커진 마지막 라운드 때에는 퍼디난드로 바꾸는 것도 좋겠다고 권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는 끝까지 에드워드를 고수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징크스'였다고 하죠.

"파사도리 선생님이 이 홀에서는 소리가 쫙 뻗어나가는 퍼디난드가 더 어울릴 수도 있다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심장이 작아서 그런지 징크스가 정말 많아요. 나와 지금까지 행운을 같이 했던 피아노인데 어떻게 배신해요? 어떻게 보면 행운의 증표 같은 에드워드인데요. 그래서 바꾸지 않고 에드워드로 쭉 쳤어요.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에드워드는 아르헤리치('건반 위의 여제'로 불리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이탈리아에 오면 치는 피아노였어요. 아르헤리치는 에드워드 아니면 헨리만 친대요. 그러니까 제가 검증된 피아노를 치고 있었던 거죠!"

스프 커튼콜 박재홍
얘기 나온 김에 징크스가 뭔지 물었더니, 계속되는 라운드마다 같은 양말을 신는다고 하네요. 1차 때 까만 양말을 신고 쳐서 통과했으면 2차도, 3차도 같은 양말을 신는다는 겁니다. 빨아서도 안되고요. 행운이 왔을 때 몸에 지니고 있던 무언가를 계속 지니고 있으려는 거죠. 좀 지저분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같은 양말을 하루 종일 며칠 동안 신는 게 아니라 연주 때만 신는다고 덧붙였습니다.

또 물은 항상 생수와 탄산수 두 병이 있어야 하고, 연주 시작 10분 전에는 반드시 밖에 나가서 바람을 쐬고 와야 한답니다. 콩쿠르 결과가 잘 나왔을 때 했던 행동들을 계속해보려는 거라고 했어요.
'무대 오르기 전에 이걸 하면 행운이 올 것 같다'고 생각했던 일들을 하면서 마음이 안정된다는 거죠. 이 '루틴'을 따르지 못할 때는 불안해진다고 했습니다. 일반 연주 때는 그렇지 않은데 콩쿠르 때는 그렇다고 해요.

파사도리는 콩쿠르 경연장에서 쓰이는 피아노뿐 아니라 연습용으로도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제공했는데, 연습실에는 아르헤리치가 친다는 또 다른 피아노 '헨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박재홍 씨는 헨리로 연습하고 싶어서 매일 아침 일찍 연습실에 갔다고 해요.

"그럼 연습실의 다른 피아노도 이름이 있었나요?"

"전부 이름이 있어요. 헨리, 비앙코, 볼리치네, 피우, 레오나르도…."

"다른 곳에서도 그렇게 피아노에 이름을 붙이나요?"

"아뇨, 저도 이번에 처음 봤는데, 너무 '스위트'한 것 같아요."

"에드워드, 하면 뭔가 영국 느낌인데, 이름이 피아노 성격과 비슷한가요?"

"네. 파사도리 선생님이 지은 이름을 보면, 정말 이름하고 피아노가 내는 소리 하고 찰떡같이 맞아요. 에드워드, 하면 진짜 영국의 옛날 신사 같은 느낌이잖아요. 소리도 정말 그래요. 중후하고 부드럽고 매너 있고 교양 있는 소리가 나죠. 퍼디난드는 뭔가 스페인의 느낌, 젊고 패기 있고 소리가 옹골차게 꽉 차 있는 느낌이죠. 스페인 축구선수 같은 이름이잖아요."


박재홍 씨는 파사도리 선생님으로부터 피아노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배웠다고 했는데요, 좋은 연주를 판단하는, 남들과는 다른 기준입니다. 바로 '내 피아노를 행복하게 해 주는 연주가 좋은 연주'라는 것이었습니다.

출처 : 부소니 콩쿠르 홈페이지
"제가 2라운드 마치고 내려왔더니, 선생님이 절 껴안아 주시면서 '나는 우리 에드워드가 이런 소리를 내는 줄 몰랐었다. 나도 모르던 내 피아노 소리를 알게 해 줘서 고맙다. 피아노가 너무 행복해 보였다' 이러시는 거예요.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항상 연주하고 나면 관객이 어떻게 들었을까 생각하지, 이 피아노가 과연 나를 좋아했을까,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기는 쉽지 않잖아요. 정말 좋은 관점이죠. 제가 피아노와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수 있고요. 그래서 요즘 저도 '피아노와 친구 하기' 프로젝트를 해보려는 중이에요."

'피아노를 행복하게 해주는 연주'라는 것은, 그 피아노가 가진 가능성과 색깔을 마음껏 펼쳐 보이는 연주를 뜻하는 것이겠지요. '피아노의 입장'에서 연주를 생각해 본 적은 저 역시 없었는데, 피아노를 단순한 물건으로만 보지 않는다면 그런 생각도 가능할 것 같아요. 피아노를 자식처럼 여기는 파사도리에게는 이런 관점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프 커튼콜 박재홍
"파사도리 선생님이 조율하는 데 따라서 피아노 소리도 달라지고 그런가요?"

"맞아요. 제가 결선에서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쳤는데, 이 곡은 도입부에서 1, 2분 정도 오른손과 왼손이 같은 멜로디를 유니즌(Unison)'으로 연주해야 해요. 작고 여리고 어떻게 보면 섬세하게, 비교적 간단한 주제 선율을 처음에 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결선은 큰 공연장에서 열리니까 소리를 키워야 되잖아요. 소리를 키우면 소리가 조금 딱딱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선생님은 협주곡 도입부 1, 2분 정도는 소리를 좀 부드럽게 만들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나 봐요. 연주 30분 전에 저한테 그러시더라고요. '내가 피아노에 마술을 하나 부려 놨어!' 진짜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I did some magic!'이라고. 그리고 1, 2분 정도는 에드워드 소리가 좀 다를 거니까 걱정하지 말래요. 2분 지나면 소리가 딱 돌아와 있을 거라고.

제가 무대에 올라서 도입부 멜로디를 치는데, 너무 부드럽고 섬세한 소리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이렇게 되는구나' 하면서도 이대로 쭉 가면 안 되는데, 걱정은 됐죠. 그런데 2분 지나니까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있더라고요. 세상에, 정말 마술사죠."


파사도리 선생은 '에드워드를 행복하게 해 준' 박재홍 씨의 우승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전에도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피아노 조율을 맡고 있는 명장 이종열 선생을 취재하며 피아노라는 악기의 속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있는데요, 박재홍 씨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피아노라는 악기와 조율의 세계는 오묘한 것이더라고요.

콩쿠르 조율사가 연주곡 특성까지 고려해서 조율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라운드가 올라갈수록, 경연자가 적어질수록 그렇게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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