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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물가 시대, 피라미드 맨 아래쪽부터 스러졌다

경제고통지수 역대 최고…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가난

[취재파일] 고물가 시대, 피라미드 맨 아래쪽부터 스러졌다
'고물가 속 저소득층' 동행 취재를 위한 섭외를 부탁하면서 머릿속에 그려둔 '가난의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예컨대, 쪽방촌에서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기 힘든 노인이나 후미진 다세대 주택에 사는 한부모 가정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지원이(가명) 모녀를 만났을 땐 좀 놀란 게 사실입니다. 우선 지원이가 사는 곳이 서울 도심 역에서 가까운, 멀끔한 오피스텔이라는 점, 이들의 옷차림 역시 평범했기 때문입니다. ' 이 분들이 기초생활수급자라고?' 속으로 반문할 정도로 제가 알고 있던 '가난의 얼굴'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모두 다 다른 '가난의 얼굴'…"고물가 탓에 '의식주'부터 포기"


열 문장 남짓한 방송 기사에 다 담지 못한 이들의 사연은 이랬습니다. 40대 여성 A 씨는 원래 백화점 판매원으로 일하다 최근 암투병을 하면서 일을 관뒀습니다. 자녀 넷을 홀로 키우기엔 모아둔 돈이 빠듯했습니다. 결국 200만 원 정도 되는 기초생활수급비로 생계를 꾸리고 있습니다. 셋째 딸은 장애가 있어 꾸준한 돌봄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주거 급여가 포함된 수급비 200만 원 중 100만 원은 월세로 나갑니다. 조심스레 월세가 더 낮은 집으로 이사하는 걸 고려하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보증금을 높이기엔 모아둔 돈이 없고, 딸만 넷인 A 씨에겐 주거에서 치안도 포기할 수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딸들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게 귀가하는 걸 고려하더라도 지하철 역과 가까운 곳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A 씨의 말입니다. 30층 높이 오피스텔 건물 외벽만 보고서는, 33㎡ 방 하나에 다섯 식구가 2층 침대를 놓고 사는 모습을 누구도 잘 상상하기 어려울 겁니다.

저소득층 인터뷰

▶ 더 팍팍해진 살림살이…저소득층 "식비부터 줄인다" (지난 2월 20일 8뉴스)

누군가에게 가난은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누군가에겐 벼락처럼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 때문에 A 씨는 처음으로 기초생활수급비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고맙고 기특하지만, 무섭게 오르는 물가가 하루하루를 옥죈다고 말합니다. 최근엔 집 주인이 금리 인상을 이유로 월세를 5만 원 더 올린다고 통보했습니다. "대출 이자가 올랐다면서 월세를 올리겠다는 거예요. 우리까지는 (여파가) 안 오겠지 생각했는데, 피라미드같이 타격이 큰 거죠. 위에서 이렇게 쪼니까 아래에서 제일 어렵게 되는 상황인 것 같아요." A 씨의 작은 체구는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져 보였습니다.
 

"교통비 이틀에 만 원…난방비는 외출로만 돌려도 두 배나 뛰어"


올라도 너무 오른 물가 탓에 A 씨는 가장 기본 생활이 되는 '의식주'부터 포기해나간다고 했습니다. 한 달에 두세 번 먹던 과일을 한번 이하로 줄이고, 점점 값비싸지는 채소 대신 인스턴트 음식을 택하는 식입니다. "교통비 만해도 이틀이면 1만 원이 깨지는 식"이고, "바닥 난방은 아예 끄고 살다 목욕할 정도의 물만 외출로 돌리는 데도 지난달 난방비는 8만 원에서 16만 원"으로 두 배로 뛰었습니다.

저소득층 김치

한 시간 정도의 만남에서 A 씨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포기' 였습니다.
 
"예전엔 꿈이라도 꿀 수 있었는데, 이제는 다 포기하는 거예요. 이제 꿈이라도 다 포기하는 거죠.
그냥 하루만 버티자. 하루 버티면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을 버티면 일 년이 된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이런 수급자들의 상황이 비단 올해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갑자기 의료비가 나가는 상황이나 공공 요금이 체납 되어 가스나 전기가 끊기면 안 되니까, 그 안에서 제일 먼저 줄일 수 있는 건 식비인 거죠." 실제 코로나 기간 소득 상위 20%의 식비 지출액은 1.7% 늘어난 반면, 하위 20% 가구는 무려 20%나 증가했습니다. 물가 상승률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수급비로는 이들의 생계를 돕는 데 한계가 뚜렷하다는 지적입니다.

암울한 통계는 또 있습니다. 1월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업률을 합친 '경제고통지수'가 역대 최고를 기록했습니다. 이 상황이 당분간 지속할 거란 예측이 많습니다. 어두워지는 경제 전망 속에 각종 후원 물품 지원도 급감하고 있다는 게 저소득층 지원 단체들의 얘기입니다.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당장 긴급복지지원 같은 단기 대책도 중요하지만, 길어지는 불황을 함께 버틸 수 있는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우리 모두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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