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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허을 부인을 아시나요…한국 위해 헌신한 외국인 의사

대를 이은 헌신, 로제타 셔우드 홀과 연극 '로제타'

스프 커튼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언더우드. 아펜젤러. 모두 낯익은 이름이라고 느끼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인을 위해 헌신했던 외국인 선교사들이죠. 각각 연희전문학교와 배재학당 설립자로도 알려져 있고요. 그렇다면 로제타 셔우드 홀은 어떤가요? 들어본 적 있으세요?

로제타 셔우드 홀(1865-1951). 한국 이름 허을(許乙). 구한말과 일제 시대를 걸쳐 한국에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았던 의료선교사의 이름입니다.

저도 로제타 셔우드 홀의 삶을 다룬 연극 '로제타'를 취재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이 연극은 미국의 유명 극단 리빙시어터와 한국의 극단 마방진이 함께 만들어 화제가 됐죠. 기사를 쓰느라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로제타 셔우드 홀'이라는 책도 사서 읽었습니다. 왜 이런 사람을 모르고 있었을까 의아할 정도였습니다.

로제타 셔우드 홀은 1890년,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25살의 나이에 미 감리교 의료 선교사로 파견돼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1887년 서울 정동 이화학당 안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 보구여관에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이화학당 학생으로 자신의 일을 도우며 가족처럼 가까워진 박에스더(본명은 김정동. 세례명 에스더에 남편의 성을 따라 후에 박에스더로 불림)를 모교인 펜실베이니아 여자의과대학으로 유학시켜 한국 최초의 양의사로 키워냈습니다.

로제타는 근대 여성 의료와 교육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평양 광혜여원(1894년에 설립한 평양 최초의 감리교 여성 병원), 평양 맹학교, 평양 농학교를 설립하고, 한글 점자교과서를 펴냈습니다. 광혜여원에서 여성 의학강습반을 운영했습니다. 1921년 서울의 동대문부인병원장(후일 이대부속병원)으로 부임했고,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했습니다. 조선여자의학강습소는 후일 고려대의대의 모태가 됐죠.

아들인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
한국에서 43년 봉사하고 쇠약해진 몸으로 은퇴해 1933년 미국으로 돌아간 로제타는 1951년, 8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는 남편이 묻힌 양화진 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양화진 외국인선교사 묘원에는 셔우드 홀 가족 묘역이 있습니다. 이곳에는 로제타 셔우드 홀과 남편 윌리엄 홀, 딸 이디스 마가렛 홀, 아들 셔우드 홀과 아내 메리안 홀이 함께 묻혀 있습니다.

역시 의료 선교사였던 캐나다인 남편 윌리엄은 로제타보다 1년 늦게 한국 파견을 자원해 왔고, 두 사람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윌리엄은 평양 교구에서 봉사했는데, 청일전쟁 부상자를 돌보다가 전염병에 걸려 34살의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결혼한 지 겨우 2년 5개월, 아들의 첫 돌 2주 후였습니다.

로제타와 두 자녀.
로제타는 남편을 양화진에 묻고 1894년 미국에 돌아가 둘째인 딸 이디스를 낳습니다. 그리고 1897년, 두 자녀를 데리고 다시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98년, 이디스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납니다. 남편에 이어 어린 딸까지 먼저 묻은 이 땅에서, 로제타는 슬픔을 딛고 한국인들을 위한 봉사와 헌신을 계속했습니다.

'어둡고 길 모르니 나를 도와주소서'

로제타의 일기 중 한 대목입니다. 삐뚤빼뚤 서투른 한글로 적어놓은 문장을 보고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로제타는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요. 양화진 묘지의 로제타 홀 기념관에서 이 문장이 적힌 일기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장이 '로제타'라는 연극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저는 관련 기사를 8뉴스에 보도했지만, 주어진 시간이 짧았기에, 로제타 셔우드 홀이 어떤 사람인지, 이 연극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연극은 지난달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시범 공연을 마쳤고, 올해 한국, 내년 뉴욕에서 본 공연을 추진 중입니다.

연극 '로제타' 대본을 쓰고 연출한 김정한 씨를 골라듣는뉴스룸 팟캐스트 커튼콜에 초대했습니다. 아래는 김정한 씨와 나눈 대화를 요약 재구성한 것입니다.

스프 커튼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로제타는 누구인가

25살 무렵의 로제타
Q. 로제타는 어떤 사람이기에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나

A. 로제타는 의사고 한국 최초의 서양의사 박에스더를 길러냈다. 또 한국 최초로 맹인 점자를 개발해 낸 외국인이었고 특수 교육을 시작한 분이고 여성 교육, 여성 의학의 선구자다. 여성들이 병원에 갈 때 남편의 허락을 받고 가야 했던 당시 상황에서 직접 왕진을 다니고 시스템에 저항하면서 병원을 지켜냈던 위인이다.

그런데 위인이라고 하기 전에, 제가 로제타의 일기장을 보는데 보구여관이라는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한 나이가 겨우 25살인 거다. 사실 25살에 의과대를 졸업했는데 진료를 얼마나 해봤겠나. 그런데 한국에 와서 했던 기록들을 보면 산부인과부터 시작해서 피부과 안과 내과 외과 모든 과를 다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한국말도 모르고. 그래서 로제타를 위인, 완성된 사람으로 본 게 아니라 25살에 그 친구는 어땠을까,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Q. 처음에 로제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A. 4, 5년 전쯤 우연찮게 양화진에 갔다가 로제타 기념관에 들어갔는데, 와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런데 난 진짜 몰랐네, 이러다가 일기장을 보고서 눈물이 터져버린 거다. 아이를 잃었을 때 얘기를 듣고 일기장을 보니 눈물이 나더라.

연출가로서 소재를 찾을 때 내 마음에 와닿는 걸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에 와닿는 걸 알 수 있나? 단순하게 물리적인 반응이 있을 때, 웃거나 울거나 진짜 경멸하거나 싫거나, 이런 느낌이 들었을 때다. 그런데 로제타는 그렇게 물리적으로 제가 확 끌려들었던 작품이었다.

이런 사람의 이야기라면 영혼 걸어서 이야기해도 내 인생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마음에 담아두고 언젠가는 이 분의 이야기를 진짜 작품으로 만들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Q. 양화진에 온 가족이 묻혔다는데.

A. 남편 윌리엄 홀도 의료 선교사였는데 병들어서 돌아가셨다. 그때 아들이 하나 있었고 임신 중이었다. 로제타는 둘째 아이를 낳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한 2년 정도 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이디스라는 꼬마도 데리고 왔는데 이 아이가 두 살이 되자마자 풍토병에 걸려 아이까지 세상을 떠난다.

로제타가 당시 어떤 일을 겪었나 봤더니, 정말 위대하게 괴로웠던 사람 아닌가. 남편 죽고 미국 돌아갔더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그리고 한국에 와서 딸이 죽고 나서도 의사 생활을 계속하다가, 자기가 길러내고 유학을 보내고 자기 의학을 다 전수해 준 한국 최초 양의사 박에스더도 30살 좀 넘어 요절했다. 그 죽음까지 지켜봐야 했다.

로제타는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생을 마감할 때 '나를 집으로 보내다오, 내 시신을 옮겨다오' 해서 시신이 한국으로 왔다. 그래서 연극 테마 중에 'Where is home? Let's go home'이라는 게 있다.

재미있는 건 로제타의 아들이 결핵 전문 의사로 성장해 한국에서 또 봉사를 하게 된다는 거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다. 결핵 퇴치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거였다. 세계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은 1908년도에 나왔는데, 한국에선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이 처음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한국에서 의료 활동을 하다가 일제에 의해 스파이 혐의로 추방당한다.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일본 제국주의 정권이라 어울리지 않았을 거다.

왼쪽 사진: 발행되지 못한 거북선 도안 오른쪽 사진: 남대문 도안의 한국 첫 크리스마스씰
*셔우드 홀은 한국에서 출생한 최초의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성장했고 아버지의 고국인 캐나다에서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1926년 아내 메리안과 함께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왔습니다. 그는 이모처럼 따르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는 걸 슬퍼하며 결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는 1928년 해주에 결핵환자 위생학교를 세우고 1932년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했습니다. 처음엔 거북선 도안이었으나 일제의 압박 때문에 남대문 도안으로 바뀌었다고 하죠.

Q. 로제타는 한국에 공헌한 초기 선교사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랬을까.

A. 한국에서 이 분들 업적을 인정하고 기리는 움직임이 있긴 했는데, 로제타 가족들 중에서도 로제타는 덜 알려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제 추측으로는, 여성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학교를 크게 지은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활동하셨기 때문에 그분들보다 부각이 덜 됐던 건지…

또 로제타 업적을 보면 병원을 짓고, 장애인을 위한 특수 교육을 시작한 게 큰데, 특수 교육을 누가 시작했는지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 갖기 어려워서 그런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연극은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보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그분의 삶을 알릴 수 있게 되어 감사하다.
*한국에서는 로제타와 인연이 있는 이화여대와 고려대를 중심으로 로제타를 기념하고 있고, 한국의 초기 개신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지만, 기독교계 밖에서는 덜 알려져 있고, 주로 아들인 셔우드 홀 박사를 조명할 때 그 어머니로 언급되어 온 것 같습니다. 셔우드 홀은 1984년 한국을 방문해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습니다. 91세를 일기로 별세해 유언에 따라 양화진에 묻혔습니다. 역시 의료 선교사로 남편과 함께 봉사했던 아내 메리안 홀도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리빙시어터

스프 커튼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Q. 리빙시어터는 어떤 극단인가.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가 거쳐갔던 극단이라고 하는데.

A. 맞다. 그런데 리빙시어터는 극단이라고 해서 몇 명의 멤버들이 있고, 누가 몇 기고,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리빙시어터에는 'Non-Violent Anarchist Revolution'이라는 이념이 있다.

비폭력적인 무정부주의 혁명이라고 해서 정부를 다 없애버리자 이런 아이디어가 아니다. 모두가 다 같이 좋은 마음이 있다면, 정부나 이런 시스템이 없더라도, 배고픈 아이가 있으면 빵 하나 쥐어주고, 넘어진 사람 있으면 가서 일으켜주고, 그런 것 아니냐, 그러니까 국가 종교 나이 인종 이런 것들 다 뛰어넘어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뚜렷한 철학이 있는 집단이다. 세상에 모두가 다 '그렇다'고 할 때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이런 철학에 동의한다면 그 누구라도 리빙시어터라는 게 극단의 모토다.

작품을 올릴 때마다, 그때그때 옆에 있었던 사람들, 노숙자랑 같이 공연하기도 하고, 감옥에 가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랑 하기도 하고, 학생들이랑 하기도 하고, 시인들이랑 하기도 하고, 그래서 리빙시어터는 계속 변화해 왔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 한국 극단 마방진과 콜라보하는 것도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리빙시어터는 경찰에 쫓긴 적도 있고, CIA에 쫓겨서 미국에서 추방당한 적도 있다. 베트남 전쟁 때는 전쟁 반대하는 이야기를 거리에서 공연했다. 음악계에 비틀스가 있었다면 연극계에 리빙시어터가 있었다. 당시 인기 많고 영향력 크고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극단이다. 리빙시어터를 실험극단이라고 하는데, 스타일에 대한 실험이라기보다는, 메시지 위주의, 어떤 행위적인 고찰이 있는 극단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Q. 극단이 문을 닫은 줄 알고 있는 사람도 있더라.

A. 2015년 창립자인 주디스 말리나의 별세 이전엔 뉴욕에 작은 극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 극장이 문을 닫았다. 물리적인 극장이 없으니까 사람들은 극단이 문을 닫은 거 아니냐고 생각했지만, 사실 리빙시어터는 뉴욕 밖으로 나가는 단계를 밟고 있었다. 그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고, 몇 년 동안 워크숍만 진행했다. 미국 전역이 다 멈췄다고 할 정도로, 공연계는 올스톱이었으니까. 그러다가 '로제타'를 하게 된 거다. 2015년 이후 리빙시어터가 새 연출가와 하는 첫 작품이 '로제타'다.

스프 커튼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Q. 리빙시어터에 몸담은 적 있다고 들었다.

A. 리빙시어터 출신이라고 얘기하기는 부끄럽다. 20대 때 연극하고 싶다고 리빙시어터에 들어가서 심부름부터 하고, 유인물 돌리고, 봉투 접고 했다. 극단 후원해 달라고 편지를 쓰고 그걸 봉투에 넣어서 풀칠해서 부치는 건데, 그때 같이 풀칠하던 친구가 지금은 극단의 예술감독이다. 나는 극단을 나와 연출 공부를 했다. 묵묵히 자리를 지켜 예술감독이 된 친구가 이번에 한국에 온 브래드 버지스다.

Q. '로제타'를 리빙시어터와 같이 하게 된 이유는

A. 로제타라는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극단이 어딜까 생각하다가
리빙시어터 설립자 주디스 말리나가 자꾸 떠올랐다. 로제타와 굉장히 비슷한 모티베이션으로 세상을 살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보면 말도 안 되는, 아니, 왜 그렇게 살아, 할 정도로 굉장히 이상주의적으로 사신 분이라서 리빙시어터가 로제타 이야기를 하는 게 가장 어울릴 것 같았다. 국적을 뛰어넘어 언어를 뛰어넘어 우리가 인간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을 했던 사람의 이야기를 해보자고 얘기가 됐다.

Q. 기자간담회에서 브래드 버지스 예술감독이 이런 역사가 있었다는 걸 미국인에게도 알리고 싶었다고 얘기한 게 기억난다.

A. 우리는 자꾸 잊어버리니까 브래드도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 성공한 삶, 행복한 삶을 정의할 때 어떤 트렌드가 있지 않나. 그런데 브래드는 좀 더 뜨거웠던 삶이 있었잖아, 이 삶을 조명하면 어떨까, 이런 얘기를 했었다. 사실은 어떤 거시적인 이유나 큰 포부가 있었다기보다는, 우리가 이걸 하면서 정말 행복하지 않아? 이렇게 시작했다.

연극 '로제타'-우리 모두 로제타입니다

로제타 연극 포스터.
Q. 연극 '로제타'에선 8명의 한미 양국 배우들이 다 로제타를 연기한다.

A. 로제타는 매일 일기를 썼다. 그래서 기록이 방대한데, 이 사람의 일대기를 전해줄 것인가, 교육적으로 만들어야 하나, 논의하다가, 연극은 경험 아니냐, 책으로 읽을 수 없는 것에 대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들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8명의 출연진이 다 로제타 역을 한다. 그분의 인생에 있었던 순간들을 다 돌아가면서 연기한다. 로제타 삶의 챕터들을 줌 인 하듯 확대해서 들어가는 거다. 서사라기보단 그 순간의 경험에 몰입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리빙시어터의 살아 있는 전설 같은 배우 토머스 워커도 출연했다. 리빙시어터에서 연기한 지 50주년이 되는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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