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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처벌과 규제'에서 '자율과 예방'으로…산재 줄일까

유명무실 '위험성 평가'부터 제대로…노동계 "있는 법부터 잘 지켜야"

[취재파일] '처벌과 규제'에서 '자율과 예방'으로…산재 줄일까
분명히 비정상인데도 공기처럼 익숙해서 문제라고 인식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산업재해'가 그럴 겁니다. 매일같이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다치고 죽는다는 사실은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데다, 최소 노동자 여럿이 다치거나 죽어야만 주목받는 상황만 봐도 그렇습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되면 그나마 나아질 거라는 기대와 달리 법 시행 이후 사망자는 되레 늘었습니다. 고용노동부 발표를 보면 올해 3분기까지 재해조사 대상 사망사고는 총 483건, 사망자는 510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건수는 9건(1.8%) 줄었지만, 사망자는 되레 8명(1.6%) 늘었습니다. 조사에 포함되지 않은 숨은 산재는 더 많을 테고요. 도대체 어디부터 손 봐야 하는 걸까요.

정부도 이런 상황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윤석열 정부는 앞으로 5년 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으로 산재 사망사고를 감축하겠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임기 내 '산재 공화국' 오명을 벗겠다고 선언한 건데, 중대재해법 시행 이후에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자 정부는 '패러다임'을 바꾸기로 했습니다. 기존의 산재 사망 감축이 '처벌과 규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는 기업의 '자율과 예방'에 무게를 두겠다는 겁니다.

유명무실한 위험성 평가부터 제대로…노동부 "법 개정해 벌칙 조항 신설"

고용노동부

기업의 '자율 안전 강화'로 어떻게 산재를 줄이겠다는 걸까요. 구체적인 계획은 이렇습니다. 일단 고용노동부는 유명무실한 '사업장 위험성 평가 제도'부터 손 본다는 입장입니다. 산안법 제 36조, 중대재해법 2장 제 4조에서는 사업장의 위험 요인을 사업주가 스스로 파악하는 내용의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도록 의무를 이미 부과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동안 이 위험성 평가가 대단히 형식적으로 이뤄져 왔다는 겁니다. 실시 여부와 평가 내용은 고용노동부 보고 사항이 아니고, 하지 않은 사업주에 대한 벌칙이나 과태료 규정도 없어서 서류 꾸미기에 그치는 경우가 적잖았습니다. 우리나라 모든 사업장이 이 위험성 평가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지만, 전체 사업장 가운데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지 않는 경우가 65%에 달했습니다. 정기적으로 매년 실시한다는 비율은 23%에 불과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우선 위험성 평가를 사업장 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단순 의무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은 사업장에 대한 벌칙 조항을 시행령 등을 새로 만들어 법제화하겠다는 겁니다. 그동안 거의 있으나 마나 했던 위험성평가 자체에 대한 근로 감독도 강화할 방침입니다. 사후약방문식으로 사고 이후에 특별근로감독 백 번 하느니, 사전에 위험성을 점검하는 데 더 힘을 쏟겠다는 취지입니다. 더불어 '안전보건예산' 공시도 추진됩니다. 기업들이 상장하려면 반드시 안전예산을 공시하도록 자본시장법 개정 등을 통해 추진하겠다는 겁니다. 요즘 주목받는 친환경 경영처럼 어느 기업이 안전 예산에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는지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는 취지입니다. 이를 위해 자본시장법 개정도 고민하고 있다는 게 고용노동부 담당자의 얘기입니다.

'1,000명대 사망 산재' 70년대 영국이 선택한 '자율안전'…한국 현실은?

산재사고

확실히 기존에 처벌만 강조하던 것과는 다른 흐름이긴 합니다. 사실 '자율 규제' 개념은 영국에서 왔습니다. 영국은 1970년대 초 1천 명에 달하던 산재 사망을 현재는 2백여 명대로 확 낮췄습니다. 촘촘한 규제만으로는 줄이지 못하던 재해를 사업주의 위험성 평가 강화로 줄여나갔다는 게 정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사업주가 위험성 평가를 통해 적용할 법과 행위규범을 스스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이행을 증명하도록 법을 바꿨습니다.

다 좋은 얘기인데, 우리 현실과 맞는지는 고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노동계는 이런 노동부의 정책이 '빛 좋은 개살구'가 되지 않으려면 노동자의 실질 참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위험성 평가를 비롯한 산업안전보건위원회나 명예산업안전감독관 등 제도는 우리도 선진국 못지않지만, 20여 년 가까이 현장에서 개선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취지의 제도라고 해도 사업주와 노동자 모두의 산재 감축 의지가 중요하고, 그에 맞는 실질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겁니다. 위험 작업 거부권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한국의 상황에서 사업주 자율에 위험성 평가를 맡기면 지금과 다를 게 없고, 오히려 규제를 완화해주는 꼴이라고 노동계는 우려합니다.
"자율 안전은 새로운 정책이 아니라 기존 한국 정부 산재 예방 정책의 중요한 기조 중에 하나였습니다. 2000년도 초반부터 산재 예방 5개년 계획에 등장했던 단어가 '자율안전'입니다. 영국의 경우 기초적인 토대가 되는 법과 제도를 잘 지키는 분위기 속에서 노사 참여와 자율 기준을 강화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미 있는 법도 잘 안 지키는 한국의 상황에서 무턱대고 자율안전 강화한다고 산재가 줄어들까요?"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의 말입니다.

결국, 거창한 패러다임 제시보다 중요한 건 실제 일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입니다. 작업 환경을 안전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실질적인 노동자 참여 보장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이유입니다.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기존 정책이 왜 실패했는지 제대로 짚어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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