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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새 정권 들어서자 '위협'을 '도발'로 바꾼 군(軍)

[취재파일] 새 정권 들어서자 '위협'을 '도발'로 바꾼 군(軍)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이하 합참)는 북한의 탄도탄(곡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미사일) 시험 발사 행위를 가리켜 '도발'로 규정하는 내부 검토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윤 대통령 취임(5월 10일) 하루 만에 '위협'이라는 용어 대신 '도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내부 방침까지 정했습니다. 용어 바꾸는 거 일도 아니겠지만, 용어 변경의 근거와 명분을 찾으려고 상당히 분주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간 북한이 탄도탄을 시험 발사하는 경우 우리 군은,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어떻게 표현(평가)해 왔을까요. 지난 넉 달간 합참이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공지한 문자 메시지를 찾아봤습니다.
 
"중대한 위협 행위(2022. 5. 4)",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심각한 위협 행위(2022. 3. 24)", "한반도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위협(2022. 3. 5)", "한반도는 물론 국제 평화와 안전에 중대한 위협(2022. 1. 11)".

이처럼 글자 토씨만 조금 조금씩 바뀌었을 뿐 공통적으로 북한의 탄도탄 발사 행위를 '위협'으로 평가했습니다.
 

위협과 도발…어떤 차이?

현행법(통합방위법 제2조(정의) 제10항, 제11항)을 찾아보면 적의 도발과 위협에 대한 개념이 아래와 같이 정의돼 있습니다.
 
▲도발 : 적이 특정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국민 또는 영역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위협 : 대한민국을 침투ㆍ도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적의 침투ㆍ도발 능력과 기도(企圖)가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출처 : 국가법령정보센터 통합방위법)

처음 보시는 분들께는 말이 참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우선, 현행법상 '도발'의 개념은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한 적(敵)의 위해(危害) 행위입니다. 현행법이 규정하고 있는 '위협'의 개념은 우리나라와 국민에 대한 적(敵)의 기도(企圖 : 계획) 행위입니다. 쉽게 말해서 피해가 있으면 위해, 위해가 예상되면 위협으로 판가름 해볼 수 있습니다. 북한의 탄도탄 시험 발사행위를 도발이라고 규정했으니, 우리 군은 북한의 행위를 위해로 판단한 것입니다. 국방부는 당장 위해가 안 돼도 미래에 위해가 될 수 있어 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도발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기류가 눈에 띄게 바뀐 것입니다.

이종섭 신임 국방장관 취임사에도 이러한 기류가 반영돼 있습니다. 이 장관은 어제(11일) 취임식에서 "북한이 전술적 도발을 자행한다면 자위권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응토록 할 것입니다"라고 밝혔습니다. 북한의 탄도탄 발사 행위를 위협이 아닌 도발로 규정하고 강경대응하겠다는 기조를 내비쳤습니다.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끌려 다니지 않겠다'라는 윤석열 정부의 기조에 손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용어 하나를 바꿈으로써 전 정권의 대북 전략과 차별화를 꾀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습니다.

취임사하는 이종섭 국방부장관

하지만, 주적인 북한이 탄도탄 등을 시험 발사하는 행위는 똑같습니다. 그런데 지난 정부 당시 군은 '위협'이라 판단해 표현했고, 정권이 바뀌자 '도발'이라고 판단해 표현하기로 바꿨습니다. 즉, '도발이냐 위협이냐'의 문제는 하나의 행위를 어떻게 볼지 일종의 가치 판단적 성격의 영역일 수 있습니다. 북한은 여전히 미사일 발사 등을 무력 시위를 감행해 오고 있습니다. 이건 명확합니다. 단지 바뀐 것은 정권이고 바뀌고 있는 것은 그러한 정권 기조에 맞춰보려는 군의 판단인 것으로 보입니다. 군의 노력을 폄훼할 의도는 없습니다.
 

하루아침에 판단 바꾼 군(軍)?

군은 왜 하루아침에 판단을 바꾸었을까요. 하루아침에 바뀐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속내는 그간 '도발'로 보고 있었는데 당시 정권의 눈치를 보며 '위협'이라고 칭하다 이번 기회에 '잘 됐다'라는 식으로 바꿨을 가능성(경우의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뀌었는지를 설명하는 군 관계자의 설명은 다소 장황해 보였습니다. 군 관계자는 "탄도미사일 발사의 경우 대한민국에 주는 위해는 아니지만 유엔 안보리 규정 위반이고 국제사회에서도 도발로 보고 있고 이게 나중에 한국에 위해(危害) 가져올 수 있다고 보고…"라고 설명했습니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명확하면 짧게 말해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명분을 만들고 합리화를 하려다 보면 말이 길어지기 마련입니다. 국방부 측은 이종섭 장관이 청문회에서 '도발'이라 규정했다는 점도 근거 중 하나로 내세웠습니다. 정권이 바뀌었으니 기조를 따라가겠다는 말로 들립니다. 용어 하나 바꾸는데 오락가락한다는 비판 들어야 하느냐고 군 입장에서는 볼멘소리 할 수도 있겠지만, 군이 감내해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발사체' 표현 사라지고 '미사일'로


"미사일을 미사일이라 부르지 못하고…"

북한 도발 행위에 대한 기사를 쓰다 보면, 온라인에 게재된 기사의 댓글란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할 수 있는 내용의 댓글입니다(온라인 '댓글' 특성 상, 국민 전체 여론을 반영할 만큼의 표본성이나 대표성을 가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안보를 정쟁에 이용하려는 특정 집단의 의도가 댓글에 반영됐을 수도 있습니다). 올해 들어서만 북한이 무력시위를 15번째 이어가고 있는데도 국민 눈높이에 군이 속 시원한 반응을 내놓지 못한다는 답답함이 반영된 댓글로 보입니다. 지난 5년 간 비핵화와 종전 선언 등 대북 관계 개선을 목표로 분주히 달려왔는데도 돌아오는 건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북한 김여정으로부터의 '막말 담화', 그리고 잇단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와 유력 시 되는 핵 실험 등입니다. 이렇듯 남북 관계 악화 요소가 많다 보니 지켜보는 국민들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때로는 울화가 쌓일 만도 합니다.

새 정권 출범이 임박하자 군은 '발사체'를 '탄도미사일'이라고 규정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군은 지침에 따라 지난 4일(토요일) "북한이 순안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일시적으로 국민들 속은 시원하게 해 줄지 몰라도, 국군통수권자와 새 정부의 기조에 손발을 맞추고 눈치를 살피는 일종의 '심기경호'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이건 군 스스로는 일종의 부담을 떠안는 셈입니다. 문재인 정부에서 자제해 왔던 표현을 윤석열 정부에서 부활시킨다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표현을 바꾸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살 만합니다. 이종섭 신임 국방장관은 취임사에서 "우리 군은 정치이념이나 외부와의 이해관계에서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오직 국가 안보라는 명제 아래 군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단 이번 용어 변경의 사례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정치가 군을 정쟁의 수단으로 삼으려 하거나 또는 장악하려거나 또는 흔들어보려고 시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정말 군이 흔들린다면 군이 지향해오고 있는 '정치중립의 가치', 그리고 이종섭 장관을 비롯한 전·현직 국방장관의 취임 일성이 퇴색하거나 무색해질 수 있습니다.

(사진=연합뉴스TV 제공, 국방일보 제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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