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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란 나포' 선사 측, 뒤늦게 정부에 소송 건 이유

지난해 1월 4일 이란혁명수비대는 호르무즈해협 인근 해역을 지나던 한국케미호와 한국 선원 20명을 억류했습니다. 바다를 오염시켰다는 게 이란 측 억류 명분이자 주장이었습니다. 한국케미호 선원 19명은 억류 한 달 만에, 선박과 선장은 95일 만인 같은 해 4월에야 풀려났습니다. 외교부는 석방 브리핑에서 '긴밀한 외교적 노력의 성과였다'고 스스로 평가했습니다. 그런데, 선사 측은 같은 해 9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정부가 긴밀한 외교적 노력이었다고 자평한 부분을 전면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는 취지입니다. 취재진이 지난달 7일과 26일 선사 측 관계자들을 인터뷰했던 내용을 토대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케미호 나포

소송의 1차적 문제 의식 : 원인 제공한 이란…한국 정부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우선 사실관계를 시간 순으로 정리해 보면, 이란혁명수비대는 정당한 이유 없이 한국케미호를 억류했고 이로 인해 막대한 피해를 입은 선사 측은 우리 정부를 상대로 뒤늦게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뒤집어 놓고 보면 이란 측이 불법적으로 우리 국민을 억류하지 않았다면 피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할 일도 없었습니다. 최초 원인 제공을 이란 측이 했다는 의미입니다. 선사 측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사 측이 설명한 협상 과정을 들어보면, 이란 측도 이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취재진과 인터뷰하는 곽민욱 한국케미호 선사 대표
'만약에 우리(=이란 측)가 죄 없는 사람을 나포했다면 해상 테러 행위로 지정이 되기 때문에 당신들(=한국 측)이 해상 오염죄를 인정해야만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

곽민욱 한국케미호 선사 대표가 취재진에 밝힌 본격 협상 돌입 전의 상황입니다. 이란이 스스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는 꼴이니 죄가 없어도 한국케미호 측에 죄를 인정하라고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이란이 다른 국가 선박을 억류하는 무리수를 강행했는데, 이러한 행위가 해상 테러로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건 원치 않으니 살고 싶으면 조용히 해달라는 일종의 협박성 발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제재 등의 이유로 이란이 자금 부족에 시달리다 이러한 무리수를 둔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한국도 미국의 대이란 제재로 인해 원유 대금 등 70억 달러를 이란에 지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란 측이 협상 과정에서 줄곧 한국 정부에 '서운하다'라고 주장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란은 국가 간의 분쟁을 명분 삼아 한국 민간 기업에 피해를 끼쳤습니다. 하지만 이란에게 이러한 원죄가 있다고 해서 이것이 우리 정부의 외교나 협상 과정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정부가 사전에 위험성을 제대로 알렸는지 사후 구호 작업에 최선을 다했는지 여부를 따져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란에 원죄가 있는데 왜 정부에게 따지느냐. 정부에게 따지는 게 적절하느냐'고 반문한다면 피해를 입게 되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한국케미호

소송의 2차적 문제 의식 : 왜 민간 기업이 책임을 떠안아야 하나


곽민욱 한국케미호 선사 대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꼴입니다. 정부에 민폐 안 끼치려고 여지껏 저희가 이 정도로 참았는데…."

곽 대표가 인터뷰 도중 언급한 비유입니다. 국가 간 분쟁의 짐을 한 국가의 민간 영역이 지는 게 과연 옳으냐는 문제도 생깁니다. 선사 측은 국가 간 일이니 이란에서 풀려난 뒤로 일단 수개월간 짐을 짊어지고 참아 왔다고 합니다. 괜한 정치적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선사 측은 밝혔습니다. 선사 측 복수 관계자들의 설명에 비춰보건대, 선사 측이 막대한 피해를 입고도 참았던 이유와 관련해, 정부가 선사 측 피해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보상해주겠다는 암묵적 지원 의사를 내비쳤고 선사 측이 이를 기대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암묵적 의사 표시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실상 구두 합의는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입으로 한 약속은 시간이 지나고 위기가 닥치면 깨지기 마련입니다. 결국 풀려난 지 몇 달 만에 선사 측은 재정난 등으로 한국케미호까지 매각해야 했습니다. 정부에 민폐를 안 끼치려 해봐도 해외 기업 활동을 하는 일반 국민 입장에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지점이기도 합니다.

정부가 해당 해역의 위험성을 사전에 적극적으로 알렸는지 여부도 쟁점이 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가려져야 하겠지만 만약 사전에 위험 사실을 충분히 고지하지 않았다면 이는 정부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게 될 여지도 있습니다. 선사 측은 이란에 억류된 날(지난해 1월 4일) 이전에 정부로부터 해당 해역을 지나다니는 게 위험하다는 내용을 사전에 고지받지 못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억류 이튿날일 지난해 1월 5일에야 정부가 이메일로 공문을 보내와 뒤늦게 알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정부의 얘기는 또 다릅니다. 억류 하루 전인 1월 3일에 이메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문을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공문이 전달된 시점이 나포 이전이냐, 나포 이후냐' 등의 사실관계와 '나포 이전에 공문을 전달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알렸는지' 등의 쟁점을 양측이 다투게 될 것으로 보입니다. 선사 측은 사전에 충분히 고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구호 의무를 방기했다는 입장입니다.
 

소송의 궁극적 목적 : "추가 피해 발생 방지"


주이란대사관 현장지원팀, 한국케미호 승선 영사접견 (사진=연합뉴스)
"선사 직원들과 현장에 계신 대사관 직원들과 밤낮으로 참 고생했습니다. 그런데 정부가 제대로 매듭짓지 않고 이상하게 흐려놓고 가면 추가 피해자가 생기잖아요. 그런 건 지양해야죠."

곽 대표는 이번 소송의 또 다른 목적에 대해 이렇게 밝혔습니다. 추가 피해자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이번 소송의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국케미호 선사 측 말고도 제2의 피해자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지도 않은 해양 오염을 인정해야 하고, 그 외 이란의 여러 억지 주장을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결과적으로 기업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고 돈을 주고 풀려나는 일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한국케미호 선사 측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제기를 시작으로 해외 활동을 하는 기업을 상대로 한 외교부와 해양수산부의 사전고지는 적극적이고 충분했는지, 그리고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등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란 동결자금 문제와 미국의 이란 제재 등 국제적 현안에 대한 외교적 해결도 병행돼야 함은 물론입니다. 섣부른 공치사는 때로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 알맹이도 없는데 정부가 포장하는 데에만 치중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우리나라(한국)가 아직 협상력이 약하다', '외교적으로 약소국'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면 그 이유가 아닐까요'라는 한국케미호 선사 측 관계자들의 자조 섞인 푸념이 계속 반복돼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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