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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교과서에도 없는 비정상적 조치를 하다…동서독 화폐교환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우리는 통일에 준비돼있는가

경제교과서에도 없는 비정상적 조치를 하다…동서독 화폐교환 [안정식 기자와 평양 함께 걷기]
1989년 8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 철조망이 제거되면서 시작된 동독 주민들의 서독 이주는 갈수록 그 규모가 커지고 있었습니다. 동독 주민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기회가 온 만큼 서독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이주 행렬이 가속화돼 동독 내 버스 운행에 차질을 빚는 상황까지 이르자 ‘나도 떠나야 하지 않는가’라는 동요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특히, 동독 내에서 젊고 전문적인 인력들의 서독행이 이어지면서 동독 경제에 주는 충격은 막대했고, 서독 주민들에게도 주택과 일자리 부족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게 됐습니다.
 
동독 내에서는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의 규모가 커지면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동독 혁명이 통일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습니다. 1990년 2월 12일 월요 시위에서는 ‘서독 DM(마르크)이 오면 우리가 남아 있겠지만, 오지 않으면 우리가 DM을 찾아가겠다’는 구호가 등장했습니다.
 
서독 정치인들은 통일에 대한 동독인들의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어떻게 하면 동독인들의 이주행렬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됐고, 서독 마르크를 신속히 전 독일에 도입해 동독 주민들에게 신뢰와 희망을 심어줌으로써 동독인들의 이주 증가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르게 됐습니다. (실제로 화폐통합 이후 동독인들의 서독 이주 행렬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경제 전반에 오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단계적인 화폐통합이 필요하다는 경제 부문의 의견이 제시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동서독 화폐교환 비율은

그렇다면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교환비율을 어떻게 할 것인가?
 
통일 이전 동독과 서독 돈의 교환비율은 3:1에서 16:1(암시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습니다. 따라서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화폐통합은 이러한 비율을 감안한 것이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화폐통합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 2:1이든 3:1이든 서독 마르크의 가치를 좀 더 인정해주는 방식의 화폐교환이 이뤄질 경우, 그렇지 않아도 서독보다 낮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는 동독 노동자들의 임금이 서독에 비해 더 낮아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일한 화폐를 쓰는 단일경제권 하에서 동독인들이 더 높은 임금을 받기 위해 서독 지역으로 이동하게 될 것은 자명했습니다. 동독 노동자들의 서독 이주를 막기 위해 화폐통합을 신속히 추진하기로 한 원래 취지에 맞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동독인들은 서독 수준으로의 소득 향상을 위해 1:1 비율의 화폐교환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고, 2:1 비율을 제안한 연방은행의 의견이 누설되자 총파업까지 위협하며 격렬한 반대에 나서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1:1의 교환방식에도 많은 문제점이 제기됐습니다.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의 실제 교환비율이 3:1 이상에 이르는 상황에서 1:1 비율로 화폐교환이 이뤄질 경우 동독 노동자들의 임금은 대폭 상승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뜩이나 동독 노동자들의 생산성이 서독에 비해 떨어지는데 동독 노동자들의 갑작스런 임금 상승은 동독 기업들에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동독 기업들의 제품은 서독에 비해 품질이 많이 떨어지는데 1:1 화폐교환으로 동독 제품의 가격이 높아지면 동독 제품은 더 외면받게 될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이렇게 돼서 동독 기업들의 운영이 어려워지면 대규모 실업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결국 콜 서독 총리는 1:1 비율의 화폐교환을 결정했습니다. 동독 주민들이 동독에 머물러 있도록 유인책을 제공해야 한다는 판단, 또 동독인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 통일을 신속히 이룩해야 한다는 정치적 판단이 작용한 것이었습니다. 콜은 회고록에서 1:1 비율의 화폐교환이 경제교과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동독의 사회 안정을 위해 그 같은 조치가 옳다고 생각했다고 밝혔습니다. 1:1 비율의 화폐교환이 평등에 기초한 연대감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동독인들에게 정치적, 심리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콜은 이러한 교환비율을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 직전에 발표했고, 그 결과 콜이 이끄는 기민당 중심의 독일동맹은 48%의 지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콜이 통일정책을 선거 전략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화폐통합 이후 동독 지역에서는 역시 우려했던 사태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1:1의 교환비율로 동독 제품의 가격이 갑자기 비싸지자 동독 제품은 경쟁력을 상실했습니다. 품질도 좋지 않은 데다 가격도 비싼데 서구 기업들의 물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동독 제품이 팔릴 이유가 없었습니다. 동독 주민들마저 동독 제품을 외면했고 구동독 수출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동구 시장마저 붕괴되면서 수출길도 막히게 됐습니다. 여기에다 1:1의 교환비율로 동독 노동자들의 임금이 상승되면서 기업의 생산비 부담도 높아졌습니다. 판로가 막혀서 재고는 쌓여가는데 생산비 부담은 높아지니 동독 기업들이 버텨낼 재간이 없었습니다. 결국 동독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대폭적인 생산량 감축에 나서면서 대규모 실업사태가 발생하게 됐습니다.

안정식 취파용 / 베를린 장벽 붕괴
  

독일 화폐교환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독일의 화폐교환은 경제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작입니다. 경제현실에 맞지 않는 1:1 비율의 화폐교환을 전격적으로 실시함으로써 많은 동독 기업들을 도산하게 만들고 대규모 실업사태를 불러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독일의 당시 통일과정을 종합적으로 평가해보면 화폐교환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1989∽1990년 동독의 변혁기는 경제적 합리성이 아닌 정치적 합리성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다고 일부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냉전 체제가 허물어지던 당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적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통일을 가속화해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독일이 당시 단계적 화폐통합을 선택했다면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총선 승리는 콜의 기민당 측이 아니었을 수 있습니다. 콜이 1:1의 전격적 화폐통합을 3월 총선 직전에 발표함으로써 총선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둘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시 총선에서 기민당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독일 통일은 뒤로 미뤄졌을 수 있습니다. 당시 기민당은 서독의 기존 기본법(헌법)에 근거한 빠른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고, 사민당은 새로운 통일헌법 제정을 기초로 하는 점진적 통일을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해 점진적인 단계를 거쳐 화폐통합과 통일절차가 진행됐을 수도 있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독일에게 통일이 가능한 국제적 환경이 계속 조성됐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을 끌다 보면 통일의 기회를 놓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콜은 통일이라는 역사적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경제적 판단 때문에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며, 경제적 후유증은 통일이 실현된 뒤에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경제적 합리성을 뛰어넘은 정치적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역사에서 가정은 없는 것이기에 콜의 전격적 화폐통합에 대한 평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경험은 통일 국면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변수가 정치나 경제 어느 한쪽에 국한돼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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