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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조남관 총장 대행 회의 발언으로 바라본 검찰의 자화상

[취재파일] 조남관 총장 대행 회의 발언으로 바라본 검찰의 자화상
미국과 소련(蘇聯, Soviet Union)이 이념을 중심으로 냉전체제를 형성하던 1950년대 중반, 소련의 스파이가 미국에 잠입했다. 평범한 민간 변호사 짐 도노반(배우 톰 행크스)은 이 소련 스파이 변호를 맡았다. 여론은 짐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며 질타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짐을 미행하고 가족까지 협박했다. CIA 요원은 짐을 상대로 "국가 안보가 중요하니 정보가 있으면 협조하라"고 요구한다. 짐은 "미국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헌법과 규정이다"라며 거절했다. 짐은 법정에서 '미국의 스파이가 소련에서 붙잡힌 뒤 죽음을 당하거나 귀화했으면 좋겠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미국 스파이가 소련에서 붙잡히는 상황이 오면 맞교환할 수 있다고 변론을 이어갔다. 이러한 논리가 먹혀들어 양형에 반영이 됐고 사형 선고가 당연시되던 소련 스파이는 사형 선고를 면했다.
 

법리‧증거 vs 정치적 신념

영화 <스파이 브릿지(2015)>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이다. 수사와 재판에서 중요한 것은 헌법과 법리, 인권이라는 게 영화의 핵심 내용이다.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이 어제(24일) 대검 확대간부회의에서 했던 발언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법리와 증거 앞에 우리 모두 겸손해야 하고 자신의 철학이나 세계관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라는 부분이다. 검찰이 지향하는 가치가 정의와 공정이라면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무이한 것은 법리와 증거이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은 아니라는 뜻이다.

조 대행은 왜 이런 메시지를 남겼을까. 다소 거창하게 표현했지만 '정치적 신념이 점점 사법의 영역을 잠식해 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검찰이 직면한 이슈에 대입해 보면, 가장 최근 논란이 됐던 '한명숙 전 국무총리 재판에서 불거진 검사의 위증 강요 의혹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지난해 4월 법무부에 진정이 제기된 이후 서울중앙지검의 진상 조사를 거친 결과 무혐의로 결론 났다. 그리고 대검이 지난 9개월간의 조사 끝에 위증을 강요했다고 판단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매듭지었다. 조 대행의 최종 판단이다. 또 서울중앙지검이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하지 못하고 있는, 그렇다고 무혐의 처분을 하지 않고 있는 한동훈 검사장 관련 사건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정치적 신념도 개인에게는 중요하다. 하지만 한 사람을 구속하느냐 마느냐, 재판에 넘기느냐 마느냐의 문제, 즉 사람의 인권이 달린 일에 정치적 신념이 개입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치적 신념이 개입되면 결국 서로가 '네 편 내 편'으로 갈라지기 마련이다. 법리는 부차적인 게 되고 만다. 한 검찰 관계자는 "검사가 (증거를 토대로) 구속이나 기소 여부를 판단할 때 안 되는 걸 (구속 또는 기소) 되게 할 수 없고, 되는 걸 (구속 또는 기소) 안 할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최근 일련의 사태가 이어지다 보니, 이 당연한 원칙이 정치적 신념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조 대행은 검찰 구성원들에게 새삼 강조하고 싶었다고 한다.
 

둘로 나뉜 검찰의 정상화

조 대행이 법리 앞에 철학과 세계관을 내세워서는 안 된다고 말한 속사정은 또 있다. '편 가르기'로 인해 둘로 나뉘고 침체된 검찰 내부 분위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이 윤석열 전 검찰총장을 직무에서 배제하고 징계를 청구하자 검찰 내부에서는 기수별 성명이 이어졌다. 검찰 내부망인 이프로스에는 징계 청구를 철회해달라는 글이 빗발쳤다. 전국 고검장들의 성명도 이어졌다.

당시 이러한 성명에 동참하지 않는 검사들도 일부 있었다.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동료 검사들은 참여하지 않은 검사들이 누구인지 자연스레 알게 됐다. '네 편인지 내편인지' 피아 식별을 했다. '피아 식별이 안 되는 동료 검사들과는 길게 대화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취지로 속내를 털어놓은 검사도 있었다.

윤석열 검찰총장, 추미애 법무장관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이 단행했던 3차례의 인사도 영향이 크다. 당시 이른바 주요 수사 라인에 있던 검사들이 대거 좌천됐다. 주요 수사를 지휘하던 윤 전 총장과 대척점에 있다고 평가되는 검사들이 대검찰청에 대거 포진됐다. 일명 '친(親) 정권 검사'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 이후 '반(反) 윤석열 검사들로 윤석열을 포위하라'는 식의 편 가르기는 끊이지 않았다. '○○ 라인' 또는 '○○ 측근'이라는 표현이 유독 많이 회자됐고 견고해져 갔다. 대검찰청은 야당이고, 길 건너에 있는 서울중앙지검은 여당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장기적으로 검찰에 이로울 리는 만무하다.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조 대행이 " 우리는 무의식 중에 편을 가르고 상대방을 의심한다. 사법의 영역에서조차 편을 나누기 시작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정의와 공정을 세울 수 없다"고 밝힌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다.

앞서 조 대행은 법무부 검찰국장 시절 추미애 당시 장관의 참모로서 추 전 장관과 윤 전 총장을 중재하는 데 힘썼다. 편 가르기 현상에 대해 조 대행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학자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까지 탐독해 가며 책에 언급되는 '환경과 인간의 본성'에 대해 고민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렇게 가교 역할을 하느라고 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정치 검사'라는 동료들의 비난이었다. 전직 검찰 고위 간부는 "조남관 선생이 윤 전 총장 징계 사태를 계기로 여권의 강경한 압박에 못 이겨 결국 검찰 인사나 구체적 사건 등에서 법리와 원칙만을 강조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분석했다.
 

여담(餘談) : 조남관 "준비하면 봄은 온다"

조 대행은 검찰개혁론자로 알려져 있다. 테슬라 차량의 디자인과 설계를 보고서도 '손잡이도 없고 백미러도 없고 유리창 브러시도 없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걸 바꾼 것이다. 검찰개혁도 이렇게 가야 한다'라고 대입시켜서 생각한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정치권이 당리당략에 따라 주장하는 이른바 '기승전 검찰개혁'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어제 회의에서도 재소자의 반복적 소환 등 잘못된 검찰 수사 관행에 대해서는 "(한명숙 사건을 계기로) 검찰이 환골탈태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검찰권 남용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별건 수사를 엄격히 제한하고, 또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수사 성패의 기준으로 삼는 기존 관행도 바꾸겠다고도 강조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간 검찰이 오만했고, 폐쇄적으로 보이는 조직 문화와 의식 속에 갇혀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쓴소리도 내뱉었다. 검찰에 대한 애정이라고 보는 후배 검사들도 있지만, 검사들 개인 성향에 따라서는 양비론(兩非論)이라며 꼭 좋게만 보지 않는 이들도 존재한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전체 회의여서 그런지 조 대행은 모두발언 문구 하나하나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회의 모두발언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 봄은 누가 부르지 않아도 찾아온다. 하지만 봄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봄은 절대 찾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라고. 중국 당나라 시대 때 편찬된 정치문답책 『정관정요(貞觀政要)』에 언급되는 구절로, 당 태종 이세민의 모친이 남긴 유언을 인용한 것이라고 한다. 차기 검찰총장 임명까지는 약 한 달 남짓 소요될 전망이다. 대검의 몇몇 간부들은 "윤 전 총장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조 대행이 윤 전 총장의 빈 자리를 채우는 수준에 그칠지, 아니면 더 나아가 편 가르기로 상처 받은 조직과 나라에 '봄'이 올 수 있도록 조직을 아우르는 역할 등을 계속 수행해 나갈 수 있을지 여부는 앞으로 2~3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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