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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당신도 부캐가 필요한가요?

- 멀티 페르소나(multi-persona), 내가 고른 '나'

요즘 '부캐(부캐릭터의 줄임말)'를 빼놓고는 우리 사회의 많은 현상들을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캐-멀티 페르소나(Multi Persona) 열풍은 일부 유명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소비자들에게도 확산하고 있습니다.


원래 페르소나는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지만, 현대 심리학에선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 성격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게 됐습니다. 복잡하고 개인화된 다매체 사회로 변하면서 사람들은 자기 상황에 맞는 여러 개의 가면을 그때그때 바꿔 쓰고 있습니다. 인간의 다원성은 확장됐지만, 역설적으로 정체성의 기반은 매우 불안정해졌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나다움'은 무엇인가? '진짜 나는 누구인가?'처럼 다매체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연예인들은 태연하게 다른 사람인 것마냥 '부캐'로 활동하고, 대중들도 알면서 모르는 척 캐릭터 놀이에 흠뻑 빠져든다.
개그맨 김신영의 부캐 '다비 이모' (사진=SBS 굿모닝연예)

덕분에 소비자로서 개인은 시장에서 점점 더 규정되기 어려운 존재가 되고 있습니다.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성격 때문에 예측 불가능성이 커지면서, 그동안의 맞춤형을 넘어선 '초개인화' 서비스가 급속히 발달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개개인을 데이터로 분석해 '고객 만족'이라는 변화무쌍한 난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1] 진화하는 AI,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예측 불가능하게 변화하는 개인의 정체성(들)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잘 설명하는 말일 것입니다.
[1] <트렌드 코리아 2021, >, 미래의 창, 김난도 등, 2020

사진=카카오톡

기업들도 앞다퉈 멀티 페르소나와 부캐 열풍을 반영하는 상품을 내놓고 있습니다.

최근 카카오톡은 자신을 표현하는 문구·사진을 띄워놓는 프로필을 대화 상대에 따라 다르게 보여줄 수 있는 '멀티프로필' 기능을 새로 선보였습니다. 기본 프로필 외에 추가로 최대 3개까지 프로필을 만들 수 있게 됐습니다. 카카오 측은 "다양한 관계 속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하나의 카카오톡 프로필이 아닌 각각의 관계에 맞는 프로필 설정과 노출이 필요하다는 이용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진=갤럭시 코퍼레이션

부캐 산업은 분야와 영역을 제한하지 않은 방식으로 확장 중입니다.
 
래퍼 마미손, 유재석의 '유산슬' '유두래곤'과 같은 연예계 부캐의 성공 이후 국내에선 연예인의 부캐 지식재산권(IP)을 기반으로 하는 '부캐 전문 매니지먼트회사'까지 설립됐습니다. 해당 매니지먼트회사 측은 "미국 마블스튜디오의 캐릭터 사업 방식처럼 연예인 부캐릭터의 지적재산권을 기반으로 방송, 음원, 팬미팅, 웹 드라마, 콘서트 등에서 글로벌 세계관을 구축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제 이들이 공개한 '부캐 선발대회' 포스터엔 부캐들이 살고 있는 지구 건너편에 지구와 똑같이 생긴 '페르소나 행성'의 모습이 보입니다. 현실과 가상을 오가는 메타버스 플랫폼을 통해 부캐의 영역과 범위가 확장되는 모습을 상징한 것입니다.

한국 독자들에게도 익숙한 '소년탐정 김전일'과 '신의 물방울'.
두 작품의 작가는 동일인(기바야시 신)이지만, 그는 작품마다 다른 필명을 사용하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지금처럼 부캐 열풍이 본격적으로 있기 전부터, 멀티 페르소나를 자유자재로 활용해 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캐의 시대에 소환할 또 하나의 반가운 이름, 바로 일본의 인기 만화 작가이자 소설가인 기바야시 신(Kibayashi Shin)입니다. 그는 무려 일곱 개의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년 탐정 김전일』을 그릴 때는 아마기 세이마루(Amagi Seimaru)였다가, 『도쿄80』은 안도 유마(Ando Yuma), 『신의 물방울』은 아기 다다시(Agi Tadashi)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발표했습니다. 특히 '아기 다다시'는 누나 기바야시 유코와 기바야시 신의 공동 필명으로, 반드시 구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엔 아기 다다시 A, 아기 다다시 B로 쓰기도 했습니다[2]. 그는 자신의 본래 이름으로 성취해놓은 것들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자아로 새 작품을 만들어 냈습니다.
[2] <온 우주만큼 부캐가 되어라>, 월간 채널예스, 정다운·문일완, 2020년 10월호


작가 '기바야시 신'처럼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 유지해온 정체성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페르소나를 선보이는 사람들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문학계를 놀라게 한 소설 『최단경로 (제25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로 등단한 강희영 작가도 그런 사람입니다. 문학동네소설상은 은희경의 『새의 선물』, 천명관의 『고래』, 김언수의 『캐비닛』 등 한국 문학에 또렷한 이정표를 새긴 걸출한 작품들을 산출해낸 창구로 유명합니다. 강희영 작가의 『최단경로』는 황여정 작가의 『알제리의 유령들』 이후 2년 만의 수상작입니다.

『최단경로』는, 전임자의 방송에서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발견한 라디오 피디 '혜서'와 교통사고로 아이와 엄마를 잃은 '애영'이 각각 소리의 정체와 사고의 근원을 추적하는 여정에서 불가해한 우연으로 마주치며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각자 다른 시선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하나의 서사로 정교하게 수렴되는 탁월한 구성력과 완결성, 읽는 이의 마음에 곧바로 가닿는 간결하고 인상적인 문장이 돋보이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강희영 작가는 현재 본래 이름 대신 필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간단히 프로필이 공유되긴 했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냅니다. SDF다이어리가 지난달 23일, 강희영 작가와 짧은 이메일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Q. 다시 한번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기억을 되짚어 처음 책을 쓰기로 결심했던 순간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어요?


A. 감사합니다. 『최단경로』를 어떤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어떻게 쓰기 시작했는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납니다. 당시 저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처음 쓰던 날은 집 근처 카페에서 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주어진 과제를 풀기 위해 골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역시나) 알맞은 해답이 잘 보이지 않았지요. 뭔가 기발한 해법을 제시해야할 것 같은데 도무지 엄밀한 언어로 이를 기술할 재간이 없었던 겁니다. 그래선지 일단 저 스스로를 설득시킬 만한 이야기가 필요했고, 그렇게 '그 소설'은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제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저는 커뮤니케이션 사이언스를 공부하는 사람이고, 본 학문 분과는 (단순히 설명하자면) 미디어가 인간 행동과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탐구하는 것을 큰 목적으로 삼습니다. 따라서 근래에는 자연히 디지털 미디어에 대한 연구가 가장 활발하지요. 그리고 그때 저는 하나의 근거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건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으로 함축됩니다. "스마트폰에서 가장 큰 부품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용자이다." 웹을 데이터를 생산하는 거대한 공장으로 거칠게 비유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주체라기보다는 트래픽을 '발생'시키는 미더운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생산공정을 극도로 효율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발생 장치'로 하여금 최대한 단순하고 반복적이고 예측가능한 패턴을 갖게 하는 게 알맞겠지요. 그렇다면 우리(사회과학 연구자)는 데이터에서 인간 행동의 패턴을 '발견'한다기보다는, 시스템이 사용자에게 투사한 패턴화된 행동을 '확인'하는 게 아닐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근거없는 생각입니다. 설령 제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시더라도 이는 아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를 과학적으로 테스트하는 것은, 개념을 정의하고 그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을 거치며, 종내 본래의 허무맹랑함과 그럴싸함을 동시에 상실할 공산이 큽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그렇지 않지요. 저는 문학이나 예술이 하는 역할 중 하나가, 근거 없음이라는 허방에 발을 내딛게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문학은 고도화한 거짓말로 과학이나 철학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곤 하지요. 그러니까 저는 『최단경로』라는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고자 했습니다. 만일 웹이라는 시스템이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패턴화한다면, 개인성을 증명하는 하나의 전략은, 우리 앞에 간편하게 제시된 패턴을 배반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것이 그것이지요.

이야기를 통해 제 '근거 없는 생각'이 잘 구현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연구자로서 이를 증명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하군요.

Q. 강희영 작가는 현재 필명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로서 본명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을 사용해야겠다고 결심한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A. 본 소설은 공모를 통해 발간되었고, 필명은 이미 그때 정해서 투고를 했습니다. 그랬던 이유는 작가로서의 나를 자신에게서 분리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선 질문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작가는 근거 없는 생각으로써 현실을 환기하게 합니다. 대책은 없지만 어떤 하나의 확신으로 독자에게 일탈을 유도하지요. 그리고 저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러한 생각, 감정 등을 제 일상의 태도로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허구의 내가 나를 견인하면 실제의 내가 그 방향이 옳은지 확인하는, 그 긴장 관계가 제게는 매우 필요합니다. 필명을 쓰는 건 그 일환이지요. 제 자신과 좀 더 거리를 갖고, 제 스스로에게 비판적으로 되는데 도움이 됩니다.

Q. 작가로서 정체성이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어떤 식으로 관계맺음 하고 있나요. 작가로서의 페르소나가 실제 삶과 분리되거나, 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고 느끼나요?

A. 필명 강희영은 주변 몇몇에게 밝힌 바와 같이 작고하신 제 할아버지의 함자입니다. 할아버지는 작가를 꿈꾸셨던 분입니다. 당신의 개인사를 낱낱이 이야기하긴 어렵기에, 최근 다시 주목을 받는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구절로 답변드리고 싶습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그리고 또 덴마크의 작가 이자크 디네센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지요. "모든 슬픔은 당신이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혹은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

그러니까 저는 그 이름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얻는 것이 많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도 이룰 수 있고, 슬픔도 견딜 수 있지요. 제 것이 아닌 것을 쓰고 있으니 그만큼 책임감도 가질 수 있구요. 이상한 말이지만, 섣불러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최근의 부캐 열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런 흐름엔 어떤 현상들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을까요? SDF는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참고 문헌
[1] <트렌드 코리아 2021>, 미래의 창, 김난도 등, 2020
[2] <온 우주만큼 부캐가 되어라>, 월간 채널예스, 정다운·문일완, 2020년 10월호
SBS 보도본부 미래팀의 취재파일은 SBS의 대표 사회 공헌 지식 나눔 플랫폼 <SBS D포럼>을 중심으로, SBS 보도본부 미래팀원들이 연중 작성합니다.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화두를 앞서 들여다보고 의미 있는 새로운 관점이나 시도들을 전하는 뉴스레터 <SDF다이어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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