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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김지영, 유관순 열사, 김지훈…"포스가 당신들 모두와 함께하길!"

[취재파일] 김지영, 유관순 열사, 김지훈…"포스가 당신들 모두와 함께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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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입니다. 영화계 사람들과 모인 자리에서 '82년생 김지영'이 화제에 올랐습니다. 밀리언셀러 소설로 최근 공유와 정유미가 주인공인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큰 관심을 모았죠. 워낙 '논쟁적'인 작품이다 보니 캐스팅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김지영' 역을 맡은 정유미 배우에 대한 악플이 쏟아져서 더 화제가 됐습니다. '윰블리'라는 별명처럼 평소 안티팬이 별로 없던 정유미 배우로서는 평생 그렇게 많은 악플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은 경험은 아마도 처음이었지 않을까 싶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이 최근 촬영을 시작했다는 소식에, 개봉 때쯤이면 또 한 번 '젠더 갈등'이 거세게 불거지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젠더' 장벽은 정말 공고하더라 하는 얘기를 두서없이 나누고 있었습니다. 다들 수십 번 반복해 온 뻔한 주제에 지루해지기 시작할 무렵, 한 남성 제작자가 털어놓은 경험담에 대화의 열기가 다시 달아올랐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충격을 받아서 아내에게 물었답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지?" 스스로는 여성들의 입장을 공감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는데, 아내가 정색하며 면박을 주더라는군요. "거기 나오는 얘기들은 나도 다 겪은 건데 뭐가 새롭다는 거냐?"고 추궁하는 통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며 억울해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떨어지자마자 테이블 곳곳에서 여성들의 볼멘소리가 다시 쏟아졌습니다. "나도!" "나도!" "그 정도는 약과지 약과!!" 이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퉈 수십 년 전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일상'에 대한 '미투'를 쏟아내기 시작했습니다.

"네. 네. 제가 그동안 잘 몰라서 죄송합니다~ 반성하고 앞으로는 더 잘 알도록 하겠습니다~" 머쓱해진 남성의 애교 섞인 사과로 훈훈하게 마무리는 됐지만, 꽤 오랫동안 참석자들이 직접 겪은 다양한 경험담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스틸컷" id="i201286814"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90227/201286814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최근엔 유관순 열사에 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서 우리 사회의 젠더 갈등이 얼마나 깊은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독립을 위해 희생하신 선열들에 감사하고 그들을 기리는 댓글들도 있었지만, 비뚤어진 젠더 프레임에 끼워 맞춰 고인들을 폄훼하는 억지 주장과 혐오 표현들이 적잖이 보였습니다. 우연하게라도 후손들이 그런 글들을 읽는다면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까 싶어 죄송스러웠습니다.

이런 일들을 빈번하게 겪다 보니 갈수록 '자기검열'이 심해집니다. 기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최근 느끼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관심' '여성적 시선'의 확산입니다. 영화계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3.1절을 전후해서만 유관순 열사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두 편이 잇달아 걸립니다. 독립운동가를 다룬 그동안의 영화에도 여성 캐릭터가 한두 명쯤은 꼭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처럼 그 초점이 '유관순'에 집중된 적은 이전엔 없었습니다.

나라가 부도날 위기에서 모두 제 잇속 챙기기에만 바쁠 때 홀로 진실을 알리려 분투하는 영웅적인 주인공 역할을 여성에게 맡긴 '국가부도의 날'의 파격,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강인한 '마녀'가 이끄는 현란한 액션물, 상처 투성이 과거를 딛고 세상을 끌어안는 강한 여성의 이야기로 각종 시상식을 휩쓴 '미쓰백' 등등 지난해부터 꾸준히 이어져 온 흐름입니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스틸컷" data-captionyn="Y" id="i201285486"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90223/201285486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할리우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근 막을 내린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관심을 모았던 영화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와 '로마'입니다. 나란히 10개 부문 후보에 올라 '최다 부문 후보' 영광을 안았습니다. '더 페이버릿'은 대영제국 앤 여왕을 둘러싸고 권력을 얻기 위해 벌이는 여성들의 암투를 그린 영화입니다. '로마'는 가사 도우미 여성 클레오의 시선으로 정치적 격동기였던 멕시코의 현대사를 되짚어 보는 영화입니다.

여우주연상을 놓고 '더 페이버릿'의 올리비아 콜맨과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글렌 클로즈 주연의 '더 와이프'는 제목부터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남편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만들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내의 감춰진 비밀을 통해 여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영화 <더 와이프><button class= 이미지 확대하기
스틸컷" data-captionyn="Y" id="i201285487" src="https://static.sbsdlab.co.kr/image/thumb_default.png" class="lazy" data-src="//img.sbs.co.kr/newimg/news/20190223/201285487_1280.jpg" style="display:block; margin:20px auto">그런데 이런 트렌드를 담은 기사를 쓰면 결과적으로 적대감과 혐오를 쏟아내는 악성 '댓글러'들에게 활동 공간을 마련해 주는 셈이 되곤 하니 참 난감한 노릇입니다. 공식 통계에도 드러나듯, 댓글이 여론은 아닙니다.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한 '댓글러'들이 각종 포털의 댓글 절대 다수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읽는 이의 대부분은 무분별한 혐오나 왜곡된 정보, 잘못된 논리를 알아서 걸러낼 수 있는 양식 있는 독자들입니다. 그런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악플과 혐오로 도배되는 댓글 창을 보다 보면 차라리 이런 주제는 피해서 악플러들의 활동 공간을 줄이는 게 더 현명한 일이 아닌가 갈등하게 됩니다.

서두에 소개한 짧은 에피소드에 드러나듯, 너무 공고해서 절대 무너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젠더 장벽'의 뿌리는 따지고 보면 아주 단순합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은 지지리도 운도 없는 어떤 한 여성'의 이름입니다. 반면 '금성에서 온 여자'들에게 '82년생 김지영'은 유사 이래 지금까지 전 세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니 '젠더' 얘기만 나오면 남녀가 갈등을 빚는 건 82년생 김지영 탓도, 90년생 김지훈 탓도 아닙니다. 같은 별에 태어난 남성과 여성을 다른 별에 격리시켜 서로 외계인을 만드는 시스템과 관습, 낡은 질서 탓입니다. 외모가 다르고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니 사소한 일에도 오해와 반목이 쌓이고 부딪치기만 하면 불꽃 튀는 '스타워즈'가 됩니다. 정작 무너뜨려야 할 악의 근원 '퍼스트 오더'는 따로 있는데, 서로를 향해 레이저를 쏘고 광선 검을 휘두르느라 에너지를 소진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갈수록 격화하는 여혐/남혐 논란에서 보듯, 김지영과 김지훈을 이간질시키는 '퍼스트 오더'의 가장 큰 무기는 적대감과 혐오입니다. 어둠 속에서 오해와 무관심, 무지를 먹고 자라는 비뚤어진 미움과 편 가르기, 그리고 무례와 폭력.

다행히 스크린에서도 확인되듯 세상은 더딘 걸음으로나마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논란도 있고, 부작용도 있고, 갈등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다 보면 언젠가는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힘을 합쳐 지구를 구하는 그 날이 오겠지요. 그러니 그날까지, "May the force be with you(포스가 당신과 함께하길)!"

(사진=이십세기폭스코리아,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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