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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의심스러울 때는 대법원의 이익으로"

[취재파일] "의심스러울 때는 대법원의 이익으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

법에 대해 약간의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법언이다. 그 기원이 로마법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말은 피고인의 범죄 혐의가 의심되더라도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을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즉 무죄 판결이 선고되어야 한다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이다.

그런데 대법원이 구성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이하 특별조사단)은 이 법언을 매우 창의적 방식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어제(28일) 있었던 특별조사단 관계자의 기자단에 대한 브리핑에서 나온 말이다. 우선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 이렇다: "의심스러울 때는 대법원의 이익으로"

안철상 대법원 법원행정처장이 단장으로 있는 특별조사단은 지난주 금요일(25일) 밤 10시 20분경에 192쪽 분량의 조사보고서를 아무런 설명 없이 배포했다. 배포시점은 물론이고 조사 보고서 내용에 대한 비판이 주말 사이 쏟아졌다. 특히 특별조사단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가 사법행정권을 광범위하게 남용한 사실을 스스로 밝혀내고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형사적 책임을 물어 수사를 의뢰하거나 형사고발하지 않은 점에 대해 비판이 집중됐다.
법원, 재판, 생중계
거센 비판 때문이었을까, 특별조사단 관계자는 월요일인 어제(28일) 오후 언론 브리핑을 개최했다. 쏟아진 여러 질문 가운데 한 가지는 왜 특별조사단이 그 누구에 대해서도 형사책임을 묻지 않았느냐였다. 이에 대해 특별조사단 관계자는 이렇게 답했다.

"수사 의뢰 조치 부분은 행정처가 의뢰나 고발의 주체가 됩니다. 사건에 있어서 당사자는 아니지만 유죄의 심증을 던지는 것입니다. (만약 행정처의 수사의뢰 후 검찰이 기소를 해서 재판이 이뤄지면) 사건에 있어서 판사가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아주 범죄혐의 뚜렷한 개연성이 충분히 확보된 경우가 아니면 행정처가 직접 나서서 하기에는 행정처 입장에서도 부담이 됩니다."

완곡한 어법으로 말한 내용을 풀어놓자면 이렇다: 법관 인사권을 포함한 사법행정권을 가진 법원행정처가 형사 고발의 주체가 된다면, 향후 행정처가 고발한 사건을 판단할 판사들에게 유죄를 선고하라는 부적절한 압력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발 조치를 자제했다는 뜻이다.

이 말 자체에 수긍할 수 있는 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이번 사태 자체가 법원행정처의 인사권 등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해 일선 판사들 또는 행정처 심의관들이 말없이 따르거나, 적극적으로 동조해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원칙은 일관되어야 한다. 불행히도 특별조사단은 광범위하게 발견된 사법행정권 남용에 대해서 모두 형사적 책임이 없다고 판단할 때는 정반대 태도를 보였다. 일단 특별조사단 보고서 '총평' 부분에서 조사 대상자들의 형사적 책임에 대해 어떻게 판단했는지 보자.

"특별조사단은 조사대상이 된 사법행정권 남용 사례에 대하여 형사적 구성요건 해당성 여부를 검토하였으나, 전문분야연구회 중복가입 해소조치와 관련한 직권남용죄 해당 여부는 논란이 있고, 인터넷 익명게시판 게시글과 관련한 업무방해죄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며, 그 밖의 사항은 뚜렷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어, 그 관련자들에 대한 형사상 조치를 취하지 않기로 함."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185쪽)

즉, 특별조사단이 판단하기에 광범위한 사법행정권 남용 사례에도 불구하고 법원행정처 전현직 고위 간부와, 전현직 대법관 중 그 누구에게도 형사적 책임을 물을만한 잘못을 발견하지 못했단 뜻이다. 사실상의 무혐의 결정문이다.
판사, 사법부 블랙리스트 조사결과
앞서 특별조사단 관계자는 법원행정처가 형사고발의 주체가 될 경우 사건을 판단하게 될 일선 판사에게 유죄의 심증을 주는 것이어서 형사고발 조치를 자제했다는 취지로 말했다. 그런데 정반대로 정작 조사보고서에서는 결론 부분에서 "뚜렷한 범죄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며 적극적으로 무혐의 판단을 하고 있다. 향후 이 사건에 대해 판단하게 될 수도 있는 검찰이나 일선 법원 판사에게 무죄의 심증을 매우 적극적으로 던진 것이다. 다시 말해, 조사의 대상이 된 전현직 대법원 판사와 법원행정처 간부들에게 불리할 때는 적극적 조치(수사의뢰나 형사고발)를 자제하고,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는 매우 적극적으로 무혐의 판단을 공식 보고서에 명기한 셈이다.

만약 대법원 법원행정처 조직을 피고인으로 상정한다면, 그야말로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대원칙을 아름답게 구현한 사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 경우에는 '셀프조사'를 실질적으로 주도한 곳도, 그리고 무혐의 판단을 적극적으로 보고서에 명기한 주체도 모두 대법원이라는 전제가 달린다. 이같은 앞뒤가 다른 판단에 대한 보다 정확한 묘사는 역시 이 문장일 것이다: "의심스러울 때는 대법원의 이익으로"

특별조사단의 적극적인 무혐의 판단과 별도로 김명수 대법원장은 어제 수사의뢰나 형사고발 조치도 배제하지 않고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과연 김명수 대법원장은 특별조사단의  "의심스러울 때는 대법원의 이익으로"라는 원칙과 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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