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敎化)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하며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 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이 절박해도 끼닛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사관이 '임꺽정의 난'을 두고 한 말이다.
임꺽정(林巨正, ?~1562)은 조선 명종 때 사람으로, 양주가 고향이고 백정 출신의 도적이다. 사실 도적이라는 험한(?) 표현보다는 의적(義賊)으로 불리는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여기서 잠깐, 임꺽정이 백정이라 해서 소, 돼지를 잡는 쇠백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임꺽정은 유기장(柳器匠)이라고도 불리었던 고리백정이었다. 고리백정은 키버들(버드나무과의 나무)을 이용하여 키나 바구니 등 살림살이 용도의 세공 용품을 만드는 백정을 말한다.
임꺽정이 경기 북부와 황해도를 근거지로 하고 의적 활동을 하던 당시는 조선 명종 때로, 민생은 파탄 지경이었고, 많은 백성들은 흔히 말하는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농민'이던 시절이었다. 끼니를 잇기 위해 스스로 도적이 되어야 했으며, 도적이 되는 것 말고는 유랑민이 되어 유리걸식으로 연명하는 것 말고는 달리 생존방법이 없었던 기막힌 세월이었던 것이다.
당시는 외척들의 득세와 농간으로 중앙 정부는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으며, 중앙 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해 지방 토호나 관리들의 일반 백성들에 대한 수탈을 제어할 수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명종(1534~1567)을 대신해 그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그 수렴청정 기간 중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이 을사사화를 통해 권력은 흔히 역사서에서 대윤(大尹)으로 일컫는 윤임 일파에서 문정왕후의 아우였던 윤원형 등의 소윤(小尹)으로 넘어가게 된다.
대부분의 사화(士禍)가 왕과 신하 간의 권력투쟁의 산물인데 반해, 을사사화는 피비린내 나는 외척 간의 권력 쟁투였다는 점에서 당시 외척들의 득세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이렇듯 수십 년간 이어진 외척의 권력독점은 중앙 정치의 실종과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부패세력의 득세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 흉년까지 겹쳤지만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지방의 부패한 관료와 토호세력들은 토지를 독점하면서도 일반 백성들에게서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으니,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농민들은 스스로 삶의 터전을 버리고 도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임꺽정이라는 걸출한 도적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 임꺽정을 민중들이 지지한 이유
임꺽정의 반란은 1559년에 시작되어 1562년 1월까지 무려 3년간이나 지속되었다. 한 개인의 주도로 진행된 민란이 이렇게 오래도록 이어진 경우는 드문 예로, 이는 권문세가의 재산을 빼앗아 일반 백성들에게 나눠 준 임꺽정의 의적 활동과 소규모의 게릴라 전투 방식, 나아가 일반 민중들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앞서도 이야기하였지만, 임꺽정의 난 당시 일반 백성들의 삶이라는 것은 불합리한 제도와 신분제로 인한 핍박, 그로 인해 빚어진 가혹한 수탈은 감당할 수 없는 지경으로, 그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이러한 불만은 임꺽정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인적 지원시스템을 구축하게 하는 바탕이 된다.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유민(流民)들에게 도적이 되는 것 말고 달리 살아갈 방법으로 무엇이 또 있더란 말인가.
처음의 임꺽정 무리는 좋게 평가하더라도 그저 도적의 무리였을 뿐이었다. 다른 점이 있었다면, 그들은 세도가나 부잣집을 털었고, 간 크게도(?) 중앙 정부로 이송되던 공물이나 세수에도 손을 댔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다만 그렇게 빼앗은 재물을 독식하지 않고 배고픈 백성들과 나눠 가졌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였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도탄에 빠진 일반 민중들의 삶 자체였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리게 했던 부패한 지배세력의 폭정과 수탈은 백성들 스스로를 각성하게 했고, 나아가 그들에 맞서 행동하게 했던, 어떤 의미에서는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막다른 골목이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등장한 임꺽정과 그 패거리는 기층 민중들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변혁 의지를 실어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전투함대의 역할을 가능케 하는 돌파구였던 것이다. 그 결과가, '모이면 도적이요, 흩어지면 선량한 농민'이라는 특별한 무리이자, 지역공동체 내지 운명공동체로 결합되었던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긴 세월 동안 그들의 해방구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임꺽정의 난에서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태의 <남부군>에서 보았던 해방공간의 빨치산(a partizan)을 떠올린다. 400여 년이라는 시간적 차이를 두고 임꺽정의 난에 참여한 백성들과 해방공간에서 존재했던 빨치산의 그들은 같은 목적을 위해 산으로 들어갔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물론 이념적 지향 때문에 산으로 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관점은 기층 민중의 관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념이 아닌 '사람답게' 살고자 했던, 수많은 억압과 핍박에 더 이상 굴복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마지막 몸부림이라는 측면에서 그들은 닮았던 것이다. 결국 임꺽정의 무리가 머무른 구월산의 그들과 해방공간의 지리산에서 투쟁했던 그들은 생존과 '인간다운 삶'이라는 가치 실현을 위해 칼을, 총을 든 것은 아니었을지... 그렇게 그들은 다 같이 맨발로 산을 올랐고, 또 다 같이 산화(散花)해 갔던 것이다.
하지만 임꺽정은 한(漢)나라의 창업주인 유방(劉邦)도, 명(明)나라의 창업주인 주원장(朱元璋)도 아니었다. 그들 역시 도적의 무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무리의 수장이었지만, 그들이 이뤄낸 것과 임꺽정의 무리가 이뤄낸 것의 차이는 명백했다.
어쩌면 임꺽정은 상대적으로 덜 나쁜(?) 그저 그런 도둑의 수괴였는지도 모른다. 민중들의 분노를 조직화하고 사회 변혁의 원동력으로 수렴하는 혁명적 리더로서의 자질을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과한 욕심일까. 하지만 이것이 임꺽정의 난이 가지는 한계였다.
하지만 임꺽정의 난에 참여한 그 민중들의 변혁 의지만큼은 프랑스혁명을 위시한 세계사적 혁명 시대를 살았던 그 어떤 민중들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았으리라는 것이 내 짐작이다. 그랬기에 봉건적 질서 안에서 목숨을 건 그들의 투쟁은 이례적으로 긴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1562년 정월, 임꺽정은 관군에 쫓기다 황해도의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는다. 더불어 기층 민중들의 변혁 운동으로서의 임꺽정의 난 역시 대미를 맞는다.
그러니 사관(史官)인들 어찌 그들을 도적이라 꾸짖을 수만 있었을 것인가. 시대를 막론하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집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은, 늘 백성들뿐이었던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임꺽정 같은, 설사 그것이 불가능한 일일지라도 지속적으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그 무모함과 정의로움이 세상을 변화시켰고, 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정상(頂上)으로 가는 길
기진맥진 임꺽정봉에 올랐지만, 문제는 임꺽정봉도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다시 500m쯤 떨어져 있는 감악산 정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비록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임꺽정봉에서 바라보는 정상은 그야말로 까마득하다.
그래서 올라갔다. 아직도 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