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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년 7개월 만에 뒤바뀐 결정, 검찰은 왜?

[취재파일] 1년 7개월 만에 뒤바뀐 결정, 검찰은 왜?
대한민국에는 검사만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누군가를 재판에 넘기는 일이다. 기소독점주의라고 불린다. 법원에 형사처벌을 요구할지 말지를 오로지 검사만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구속영장을 비롯해 체포, 압수수색, 감청 등 수사를 위해 필요한 각종 영장도 오로지 검사만 법원에 청구할 수 있다. 그밖에도 대한민국에서 오직 검사에게만 부여된 권한은 여러 가지가 있다.

● "오직 검사만 할 수 있는 일", 직권 재심 청구

그 중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검사만 행사할 수 있는 독특한 권한이 하나 더 있다. 이미 판결을 받은 당사자가 사망했고, 배우자나 아들, 딸, 형제, 자매 같은 직계 가족도 없는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다. 재심은 법원이 내린 판결에 중대한 하자가 있을 경우 다시 재판을 하는 제도다. 아무나 재심을 청구할 수는 없다.

판결의 당사자나, 판결 당사자의 법정대리인이 청구할 수 있고, 판결 당사자가 사망하거나 심신장애가 있을 경우 배우자나 직계친족, 형제자매가 신청할 수 있다. 그외에는 오로지 검사만이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형사소송법 424조) 만약 재판 당사자가 사망했고, 배우자나 직계 가족도 살아 있지 않다면 오직 검사만이 재심을 청구해 고인의 누명을 벗길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에 해당하는 사건이 있다. 1969년 세상에 알려진 '故 이수근 씨 이중간첩 조작 사건'이다. 북한에서 조선중앙통신 부사장으로 재직했던 故 이수근 씨는 1967년 3월 탈북해 대한민국으로 귀순했다. 그런데 1969년 중앙정보부는 이수근 씨가 해외로 탈출하려다 체포됐다고 발표했다. 중앙정보부는 수사결과 이수근 씨가 이중간첩으로 드러났다고 밝혔고, 검찰은 이씨와 이씨의 탈출을 도운 처조카 배경옥 씨를 구속했다.

검찰이 두 사람을 기소한지 한달만에 두 사람에게 모두 사형이 선고됐다. 이수근 씨는 항소를 포기했고 선고 두 달만에 이수근 씨에 대한 사형이 집행됐다. 처조카 배경옥 씨는 항소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1988년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출소했다.

배씨는 이수근 씨가 이중간첩이라는 당시 중앙정보부의 발표와 검찰의 공소사실은 중정이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조작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배씨는 2005년 법원에 자신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규명을 신청했다.  2006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수근 씨 사건이 중앙정보부에 의한 조작 사건이라고 결론 내렸다.

또, 국가가 "수사과정에서 불법 감금, 자백에 의한 무리한 기소 및 증거재판주의 위반 등에 대해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서울고등법원도 2008년 12월 재심에서 배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법원은 중앙정보부의 불법구금과 고문이 있었다고 판단해, 이수근 씨가 위장귀순 간첩이라는 점을 인정할 수 없고,그를 도운 배씨도 무죄라고 선고했다.
[이상의 사실관계 정리를 위해 2016년 6월 발행된 '한겨레21'에 실린 "오직 검사만이 할 수 있는 일" 을 참조했음.]

● 조카의 한(恨), 기각한 검찰

하지만 배경옥 씨에게는 한이 남았다. 사형이 집행돼 세상을 떠난 이모부 이수근 씨의 명예를 법정에서 되찾는 일이다. 그러나 판결 당사자인 이수근 씨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배우자나 형제, 자매, 직계친족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법원에 재심을 청구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검사밖에 없었다.

배씨는 2013년 대검찰청에 이모부 이수근 씨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달라고 진정을 접수했다. 그러나 검찰은 3년 동안 검토 끝에 2016년 2월 2일 재심을 청구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결론을 배씨에게 통보했다. “배경옥의 진술, 배경옥에 대한 재심 판결문과 기타 제출 자료 등만으로는 형사소송법 제420조에 따른 재심 청구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고, 본건 진정은 완결된 재판에 불복하는 내용의 진정”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2016년 6월 14일 '한겨레21' 보도에 따르면 이정회 당시 서울중앙지검 2차장 검사는 "이수근은 법정에서 자백했고 당시 증거가 갖춰져 있어서 재심을 청구할 만한 객관적 증거가 없다.

배경옥은 항소하면서 자백을 번복했고 그 바뀐 진술을 토대로 증거관계를 다시 본 것이다. 배경옥의 재심 판결만 가지고 이수근의 재심 사유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한겨레 21' 1116호 "오직 검사만이 할 수 있는 일"에서 인용]

● 1년 7개월 뒤 바뀐 결론, 왜?
대검찰청
그러나 검찰의 '재심청구 불가' 답변 후 1년 7개월 정도 지난 뒤인 어제(27일) 대검찰청은 故 이수근 씨 간첩조작 의혹 사건에 대해 검사 직권으로 재심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3년만에 결론이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대검찰청 관계자는 "내 기억으로 예전에는 검사의 재심 직권 청구 사례가 없었다. 그러나 문무일 검찰총장이 취임 후 과거 사건에 대한 사과의 뜻을 밝힌 뒤, 검찰이 과거사 사건에 대해 전향적으로 직권 재심청구를 하고 있다. 이수근 씨 사건에 대한 직권 재심 청구도 검찰총장의 과거사 사과에 이은 후속 조치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검사들의 지휘권자인 검찰총장의 의지 덕분에 오직 검사만 할 수 있는 일이었던 故 이수근 씨 이중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 청구가 가능해진 것이다.

故 이수근 씨 이중간첩 조작 사건은 진보와 보수가 편을 갈라 싸우는 정파적 이슈도 아니다. 이 사건에 대한 진실 규명과 재심 개시를 주장해온 대표적인 인물은 우파 언론인인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다. 조갑제 대표는 2016년 6월 한겨레21에 "검사가 재심을 청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데도 무고한 죽음에 대해 재심 절차를 고의로 밟지 않는 것은 국가의 법익을 훼손하는 것”이라며 검찰의 직권 재심청구를 요청했다. 배경옥 씨가 출소하기 전인 1989년 3월 중앙정보부 핵심 간부를 취재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보도를 '월간조선'에 실어 이 사건을 공론화한 것도 조갑제 대표였다. 그런데도 검찰총장의 과거사 사과 발표가 있기 전까지 검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 시류에 맞춘 결론이 아니길
검찰
검찰은 준사법기관이다. 행정부 소속이긴 하지만 법률적 결정에 있어선 행정부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법률에 입각해 정의에 맞는 결정을 하는 기관이라고 검찰은 자임한다. 경찰과 검찰이 다르다고 주장할 때, 사법경찰관의 수사는 자칫 행정부 논리를 지나치게 반영할 수 있으니 검사의 수사지휘가 꼭 필요하다고 주장할 때 검찰이 늘 내세우는 명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불과 3년 전에는 법률적으로 재심 청구 대상이 아니라고 결정했다가, 정권이 바뀌고 조직의 수장이 사과의 뜻을 밝히자 법률적 결정을 뒤바꾸는 것을 보면서 과연 검찰이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역할,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공익의 대표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왔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이제라도 검찰이 직권 재심 청구를 해서 다행이다. 검찰총장의 전향적 사과가 반영된 조치라는 점에서, 검찰 조직에서 수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도 됐다. 다만, 이 결정이 정권이 바뀌면서 달라진 흐름에 맞춰가는 행정부 소속 공무원으로서의 검사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공익을 대표하는 법률가이자 준사법기관으로서의 검사가 내린 결정이길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류가 바뀔 때마다 검찰의 결정이 또 뒤집어지는 비극적 상황이 다시 벌어질테니 말이다.

※ 글 중간에 여러 번 언급했지만 이 취재파일을 작성하면서 2016년 6월 14일 김선식 기자가 보도한 "오직 검사만 할 수 있는 일"(한겨레21)  기사를 많이 참고했다. 김 기자의 보도가 없었다면 이 기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당 기사 링크는 아래와 같다.

"오직 검사만 할 수 있는 일" (한겨레21, 2016년 6월) ☞ 기사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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