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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판만 한 사람"과 엘리트의 본업

[취재파일] "재판만 한 사람"과 엘리트의 본업
지난 22일은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지명 이후 처음으로 대법원에 온 날이었다. 그날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김 후보자에게 질문할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다. 꼭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다.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한 이야기를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나 거론할지 묻고 싶었다. 취임하면 이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도 카메라 앞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답을 하지 않고 피하지 못하도록 기술적으로 질문하는 방법도 생각해뒀다.

소용없었다. 김 후보자는 모든 질문에 "청문회에서 자세히 답하겠다."는 답으로 피해갔다. 사실 정답이었다. 청문회에서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히는 것이 김 후보자 입장에선 적절하다. 그러나 직업적 욕심 탓에 또 물어봤다. 지금 들어가서 양승태 대법원장 만날 건데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에 대해서 이야기 안 할 거냐고 질문을 던졌다. 김 후보자는 "나중에 따로 말하겠다"며 피해갔다. 이 문제에 대해선 오늘 답을 듣지 못하겠다 싶었다.

그때 다른 기자가 '기수 파괴' 인사에 대한 우려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번엔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 "재판만 한 사람"의 자부심
김명수
"(전략) 제가 조금 더 열심히 준비해서 그러한 우려나 기대 부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사실 어제도 제가 이야기했었습니다만 저는 재판만 했습니다. 31년 5개월 동안 법정에서 그것도 사실심 법정에서 당사자들하고 호흡하면서 재판만 해 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이번에 보여드릴 것을 기대합니다. "

"재판만 한 사람", 재판을 하지 않는 기획부서, 즉, 대법원장의 비서조직인 법원행정처에서 한 번도 근무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오히려 자부심을 나타내는 표현이었다. 잠시 뒤 법원행정처의 엘리트 법관들을 만나러 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에 도발적으로 느껴질 만큼 자신감 넘치는 표현이었다.

멘트를 이끌어 내야 하는 기자 입장에서는 '블랙리스트'에 대한 답변보다 더 큰 걸 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취임하면 법원행정처를 개혁하겠습니다."라는 직접적인 워딩보다 훨씬 울림이 큰 멘트였다. 앞으로 사법행정을 총괄할 대법원장으로서 어느 부분에 방점을 두고 사법부를 운영할지 한마디로 요약한 답변이었다. 나아가 사법부의 울타리 너머까지 메시지를 던지는 답변처럼 느껴졌다.

● 조직의 본업과 '엘리트'

우리나라의 이른바 엘리트 조직에서 현업에 충실한 사람보다 기획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검사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 그리고 가장 우수한 검사가 간다고 알려진 곳은 민생 사건을 처리하는 형사부가 아니라 인사와 예산을 담당하는 법무부의 검찰국이다. 얼마 전까지도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에서도 최고 엘리트가 가는 곳은 사업부가 아니라 미래전략실이었다. 그밖에도 어느 부처나 청와대와 국회를 담당하는 사람들, 또는 오너나 수장을 보좌하는 사람들이 조직에서 가장 잘 나가는 사람들로 인정받았고, 실제로 우수한 인재들이 그곳에 배치됐다.

합리적 의사 결정보다 오너나 수장의 의지가 더 중요하고, 정당한 업무 처리보다 청와대와 국회의 관심사를 잘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인사 시스템이 곳곳에 정착됐을지 모른다. 그러나 조직의 본업에 최선의 역량이 배치되지 못한 결과는 우리 사회 전체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변화의 조짐은 여기저기서 감지되고 있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검찰 형사부 강화 방안을 밝힌 것도 그 사례다. 단순히 형사부 인원을 보강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일선 형사부의 부장을 거치지 않은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부장검사로 임명하지 않겠다고 공개 선언했다. 법무부나 대검찰청의 기획부서 위주로 근무한 검사들이 승진에서 앞서나가는 현상을 바로잡겠다는 뜻이다.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법원
● 어쩌면 더 중요한 메시지

"31년 5개월 동안" 본업인 "재판만 한 사람"이 사법부 최고의 자리에 지명됐다. 비단 사법부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조직의 본업에 충실하게 살아온 사람들에게 분명한 메시지가 전달될 것이다. 본업 대신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갑'의 관심사를 파악하는 데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관행도 개선되길 바란다.

김명수 후보자에 대한 청문 절차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앞으로 6년 동안 우리 사회의 모든 법적 쟁점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법부 수장 후보자이기에 철저한 검증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본업에만 충실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는 원론적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은 울림이 크다. 어쩌면 '사법부 적폐 청산'이나 법원 행정처 개혁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 이쪽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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