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혼과 노산, 이렇게 한글로만 적으면 늦게 결혼한다는 노혼老婚과 늦게 출산하는 노산老産으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다. 이를 한번 뒤집어 No-婚, No-産, 즉 결혼하지 않고 혹은 거부하거나, 출산을 하지 않는 혹은 거부하는 세태를 노혼노산 시대, No혼(婚) No산(産) 시대로 규정했다.(최근 정세가 정세인 만큼 'No혼'을 두고 "혼이 비정상"을 연상한 분들도 있었다고 한다.)
2001년 이래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초저출산의 기준인 1.3명을 넘어본 일이 없다. 16년째 초저출산이다. OECD 가입국 중에 초저출산 상태로 일시적으로 추락했던 나라는 제법 많지만 이를 이렇게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나라는 한국 말고는 없다. 한국 정부와 사회가 이런저런 저출산 극복 대책을 내놓고 시행했으나 한국의 출산율은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유는 제각각이겠으나 어쨌거나 아이를 덜 낳거나 낳지 않는다.
제14회 미래한국리포트의 주제는 [신인구론: 생활공공성과 착한성장사회]였다. 결국은 저출산 고령화 문제였다. 이 행사를 즈음해 방송할 특집 다큐멘터리(11월 2일 방송)를 제작하게 된 다큐팀의 첫번째 고민은 '진부함을 어떻게 극복하나'였다. 저출산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긴 하나 참신한 주제이기는 커녕 이미 많이 다뤄진 소재라는 것.
새로운 시각이 들어있거나 아니면 새로운 방식의 제작, 혹은 특이한 등장인물 등등 '뭔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눈길 끄는 제목 역시 중요했다. 논의 끝에 일단 주 제목을 '노혼 노산 시대'로 정했다.(이렇게 적고 보니 처음부터 이 제목이었던 것 같지만 원래 가제는 '1명의 차이'였다. 국가 유지가 가능한 수준의 출산율을 2.1명으로 보는데 현재의 1.2명과 차이가 0.9명 정도 되니까 대략 1명이라고 쳐서 1명의 차이. 지금 와서 돌아보면 좀 억지스럽기도 하다.)
앞서 쓴 것처럼 언뜻 보면 나이 들어 하는 결혼, 나이 들어 하는 출산을 뜻하는 노혼 노산 같으나 No婚 No産, 결혼을 하지 않고 출산을 하지 않고 혹은 결혼을 못 하고 출산을 못 하고 혹은 결혼을 거부하거나 출산을 거부하거나.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것, 아이는 당연히 낳아야 하는 것'이었던 시대가 막을 내렸고 결혼과 출산을 선택하는 이들과 결혼과 출산을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이들이 함께 있는 시대라는 의미다. 우리의 방점은 후자에 찍혀 있었다.
● '낳으면 행복할까?'…부제에 담은 의미
아이를 낳는 건 당위요, 안 낳으면 (혼이) 비정상… 이런 류의 말씀은 주로 나이 지긋한 분들에게서 나오지만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도 '애는 있어야지' 하는 식으로 말한다. "아이 낳는 것이 곧 행복으로 이어진다"는 단순 명제는 과거에도 그랬으리라 생각하지만 현재는 더더욱 맞지 않는다. 초저출산을 불러온 제반 여건, 환경의 변화 없이, 실체가 모호한 행복을 내세워 아이 낳기를 강요하는 풍토에 대한 문제 의식을 담고 싶어 붙인 부제가 '낳으면 행복할까?'이다.
논리학 수업 첫 시간 기억을 떠올려 보면… '낳으면 행복하다' 명제의 대우는 '행복하지 않으면 낳지 않는다'이다. '낳으면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논리대로라면 현재의 저출산 현상은 행복하지 않은 개인과 사회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낳으면 행복하다'면서도 낳지 않는 원인은 개선하지 않은 채 "네가 행복하려면 아이를 낳아야만 한다"라는 논리적 모순으로 귀결하고 있다.
'낳으면 행복할까?'라고 던진 질문은 따라서 '행복해야 낳든 말든 하지 않겠냐'로 연결되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그러려면,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 결혼과 출산을 거부 혹은 포기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에서 모든 얘기를 다 할 수는 없었다. 행복의 조건을 찾는다는 것도 난망했다. 최소한의 전제조건을 찾기로 했다. 결혼을 거부하거나 포기하게 되는 건 왜 그럴까. 출산을 거부하거나 포기하는 건 왜 그럴까.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은 먹고 살 만해야 뭐든지 할 수 있다. 청년들로 보면 점점 줄어드는 양질의 일자리, 평생 고용이 보장되지 않는 직장, 좀처럼 늘지 않는 임금, 날로 치솟는 전세금과 집값…등이 먹고 살 만한 상황을 가로막고 있는데 이중에서도 임금 문제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미 결혼한 이들 편에서 보면 일 가정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직장 실태와 문화, 육아의 어려움이다. 아이를 낳아도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나 기관을 찾기 쉽지 않고 부모의 부담이 너무 크다. 그나마 회사에서 일찍 퇴근이라도 한다면 부부가 나눠서라도 할 수 있는데 한국 직장에 만연한 야근 문화가 이를 가로막는다. 그래서 장시간 근로 문제에 집중했다.
청년의 저임금, 직장인의 장시간 근로, 둘다 중요한 문제로 노혼과 노산의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이긴 하지만 이 역시 이미 알려질대로 알려진 현실이라는 게 문제였다. 궁리 끝에 작은 실험을 해보기로 했다. 최저임금을 받고 있는 청년이 더 많은 임금을 받게 된다면 어떻게 달라질까. 매일 같이 야근을 해야 하는 직장인이 정시퇴근을 하게 된다면 어떻게 바뀔까. 단 한 달 만이라도 그렇게 산다면 그들의 인생이, 약간이라도 달라지거나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까.
● 단순하지만 확실한 실험과 그 의미
-청년들이 꼽는 "이 정도면 살아갈만하겠다" 싶은 소득 수준은 월 200만원 정도다. 2016년 기준 최저임금은 시급 6,030원 월급 126만원이다. 최저월급보다는 조금 더 받는 월급 140만원의 청년들에게 '살아갈만한 월급'과의 차액을 지급했다.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실험기간이 길면 길수록, 대상자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으나 두달 남짓한 제작기간과 여러 여건상 그럴 순 없었다.) 사실 뻔한 결론이었다. 당연히 더 나아질 것이다. 실험에 참여한 청년들도 내심 '당연한 얘기 아니야' 하는 듯했다. 그러나 좀 더 실증적으로, 그리고 희망적인 모습을 보고 싶었다.
당연하다 해도 머리 속으로 아는 것과 체감하는 건 다르다. 최저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의 월급에, 월세와 식비, 공과금, 통신비, 교통비 등을 제하면 수중에 남는 건 30-40만원 정도. 이 돈으로 또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한다. '오늘만 사는' 월급이 최저임금이다. 청년이 그 나라의 미래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받는 월급이 그렇다. 청년층의 비정규직(시간제) 비율은 해마다 늘어서 2015년에는 46.3%에 이르렀다. 29세 이하 비정규직의 월 평균 급여는 106만원에 불과하다.(한국노동연구원 자료)
실제로 실험 이후 인터뷰에서 이 청년들은 "이런 식으로 계속 임금이 올라갈 수 있다면 인생계획을 세워볼 수도 있겠구나" "이전엔 뭔가 한 가지를 하려고 하면 한 가지를 포기해야 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임금을 받는다면 100%는 아니더라도 조금 같이 가져갈 수 있지 않을까" "차곡차곡 모아서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 등등 짐작보다도 훨씬 긍정적인 느낌의 소감을 털어놨다. '생활임금'이나 '기본소득' 문제가 저출산 개선을 위해서라도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느낀 대목이었다.
- 장시간 근로는 사실 법대로 하면 되는 문제이긴 하다. 법정 근로시간이 주 40시간, 하루 8시간씩 일하고 정시퇴근할 수 있다면, 그렇게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현존하는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 대다수 직장인들이 그러지 못하고 있고 "정시퇴근은 꿈속에서나 가능"하다고 하는 게 문제다. 장시간 근로 실험의 컨셉은 늘상 야근을 하는 직장인들에게- 맞벌이하면서 손이 많이 가는 영유아를 키우고 있는- 한달 정도 정시퇴근을 시켜본다면 그들의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는 것이었다.
섭외가 거의 불가능했다. 업무상 필요에 의해 야근하는데 이를 하루 2-3시간씩 단축시켜본다는 발상에 동참할 수 있다는 회사가 거의 없었다. 회사 입장에선 현실이 그렇다 해도 장시간 근로가 일상인 것으로 방송에 노출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결국은 뒤집어 가끔 야근을 하지만 정시퇴근하는 비율이 높은 편인 직장인에게 계속 야근을 시켜보는 식으로 구성했다. 이 역시 뻔한 결론이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힘들어 질 것이다. 실제 실험에 참가한 직장인들의 반응은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회사에서 이를 배려해야 가능하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스마트워크' 시스템을 만들어 출퇴근을 필요에 따라 조절할 수 있게 하는 방식도 확산되고는 있다. 개별 회사 차원에서는 한계가 있으나 의미 있는 확산이었다.
저출산 고령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일본, 일본 전체의 2015년 출산율은 1.46명인데(한국보다 0.2명 높다) 오키나와는 1.94명에 이르렀다. 오키나와는 일본 전체에서 야근이 적은 지역이다. 야근이 적고 부부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으며 육아 부담을 덜 수 있으니 출산율이 높아졌다. 이 역시 당연하고 자연스런 흐름이다.
● 낳으면 행복할까? 행복해야 낳을까?
다큐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맺었다.
"…다들 말합니다. 아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으니 서둘러 낳으라고. 아이를 낳으면 그냥 행복해지는 걸까요? 아니면 행복해야 아이를 낳는 걸까요?"
우리의 결론은 후자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앞으로 저출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우리는 행복해져서 아이도 더 많이 낳을 수 있게 될 것인가. 다큐가 끝나 한편으론 홀가분한데 눈은 침침하고 마음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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