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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미 비포 유'…"최대한 열심히 사는 게 삶에 대한 의무에요."

[이 영화, 이 대사] '미 비포 유'…"최대한 열심히 사는 게 삶에 대한 의무에요."
2000년 초여름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맞은편 건물 계단에 혼자 앉아 있었다. 몇 시간을 서서 기다린 끝에 두오모 꼭대기까지 올라가 프레스코화들을 보고 내려온 직후였다. 다리가 아파서 다음 코스로 이동하기 전에 잠시 앉아서 쉬려던 것이었다.
 
처음엔 물 한 모금 마시고 잠깐 앉았다 일어날 생각이었다. 막상 엉덩이를 땅에 붙이니 일어나기가 싫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계속 앉아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도 넘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서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 구경만 했나 보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 참 좋다.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고 앉아 있는 게 생각보다 정말 좋구나!”
 
깨달음은 늘 그런 사소한 순간을 통해서 온다. ‘멍 때리’다 번개처럼 맞이한 그 순간의 엄청난 행복감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게 했다. 끊임 없이 뭔가를 하고 있지 않으면 불안했던 시간들. 1분 1초도 허투루 썼다 싶으면 후회를 넘어 죄의식까지 느꼈던 시간들.
 
왜 그렇게 안달하면서 살아 왔을까? 이유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대단한 일이든 아니든, 큰 성과를 내든 그러지 못하든, 어쨌든 끊임 없이 뭔가를 해야 ‘열심히 사는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24시간을 오이채 썰듯 썰어놓고 조각조각마다 이름표를 붙이지 않으면 게으른 거 아닐까, 두려웠던 것이다.
 
붉은 색 두오모 지붕을 올려다 보면서 처음으로 의심이 들었다. 시간에 대한 수십 년 된 내 집착이 열심이 아니라 강박이었던 건 아닐까? 그 열심을 버리면 지금 느끼고 있는 이 행복을 더 자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심한 뒤 가장 먼저 공부를 끊었다. 퇴근하면 집에서 듣던 중국어 동영상 강의를 끊고 교재도 죄다 버렸다. 의무감에 사들여 놓고 못 읽어서 쌓여있던 어려운 책들도 모두 모아서 여기저기 나눠줬다.
 
결과는 놀라웠다. 빽빽하던 일과에 숨통이 트였고, 책장을 쳐다 볼 때마다 마음을 누르던 짐이 한결 가벼워졌다. 시간표에 쫓기지 않고 슬렁슬렁 사는 삶은 단언컨대 이전보다 훨씬 더 행복했다.
 
그래서 결심했었다. “뭔가를 더 배우고 준비하기 위해 열심을 부리는 건 수십 년 했으면 이젠 됐다. 이제부턴 그 동안 열심히 배우고 준비해 둔 걸 차근차근 찾아 쓰면서 살겠다.” “일이나 가족이나 명분이나 내일을 위해 열심히 사는 건 이만하면 이제 됐다. 이젠 오로지 오늘 나를 위해서만 열심을 부리겠다.”
 
나름 ‘깨달음’에 근거한 ‘확신범’으로 10여 년을 즐겁게 살았는데 최근 복병을 만났다. 가벼운 마음으로 본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 '미 비포 유'의 주인공 윌의 한마디가 귀에 박혔다. “최대한 열심히 사는 게 삶에 대한 의무에요.”
 
윌은 존엄사를 준비 중인 젊은 남성이다. 그런 윌이 자신은 스스로 삶을 버릴 준비를 하면서 타인에겐 삶에 대한 의무를 다하라고 설교를 한다. 얼핏 생각하면 모순도 이만한 모순이 없다.
 
존엄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를 따지면 더 그렇다. 윌은 뜻밖의 사고로 전신이 마비돼 고통에 시달리지만, 시한부 환자는 아니다. 몸은 다쳤지만 지적 능력엔 전혀 이상이 없고, 부모는 성 하나를 통째로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자다.
 
원한다면 윌은 최고 수준의 치료와 보살핌을 평생 받을 수 있다. 그런데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이유는 단 하나, 고통을 견디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숨은 쉬지만, “이전의 나”로 살 때 느꼈던 의미와 기쁨을 현재는 물론 앞으로의 삶 속에서도 결코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윌의 선택에 관객들은 동의할 수도 있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같은 고통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판단하고 반응하게 마련이다.
영화 '미 비포 유'의 한 장면
2014년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두 젊은 여성이 있었다. 한 사람은 당시 29세였던 브리타니 메이나드, 또 한 사람은 대학 1학년이었던 로렌 힐이다. 두 사람은 모두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달랐다.
 
메이나드는 존엄사를 선택했다. 자신의 존엄사 날짜를 공개적으로 예고한 뒤 그 날짜에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대부분의 주에선 ‘죽을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미국 사회에 대한 ‘운동’이었다.

메이나드의 죽음 이후, 메이나드의 고향이었던 캘리포니아 주가 존엄사를 허용하는 법을 만들었다. 여러 다른 주에서도 존엄사법 제정 절차가 현재 진행 중이다.
 
반면 힐은 마지막까지 코트를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계속 대회에 출전했다. 힐이 출전하는 대회마다 관중들이 몰려들었다. 힐은 이전만큼 빨리 뛰고 많은 골을 넣지는 못했다. 하지만, 코트에 서 있는 것 만으로도 수많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안겼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선택을 비교하며 누가 옳으냐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부질 없는 일이다. 눈에 보이는 방향은 정반대였지만, 두 사람의 선택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에게 닥친 상황에 “최대한 열심히” 대응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최대한 구현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윌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이미 지난 1월 존엄사를 허용하는 법이 통과됐다. 이 법은 2018년부터 시행된다. 1년 반도 채 남지 않았다. 법으로는 허용됐지만, 존엄사에 대한 찬반 대립은 여전하다.
 
반대하는 이들은 존엄사가 “최대한 열심히”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존엄사법이 보여주듯 인간에겐 더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을 포기할 ‘권리’도 있다. 그 권리를 실현하는 방식은 때로 그저 ‘멍 때리는’ 사소한 게으름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국 존엄사가 품고 있는 질문은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질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고, 어떤 삶이 의미 있는 삶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삶이 인간에게 던진 의무가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건 그저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열심히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인가를 찾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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