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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직도 전기료 내려서 숨통 트여달라 요구하나?

산업계의 생경한(?) 전기료 인하 요구…제조업 경쟁력 저하의 근본원인 살펴봐야

[취재파일] 아직도 전기료 내려서 숨통 트여달라 요구하나?
산업계가 국내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정부에 건의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3개 경제단체와 22개 업종단체는 우리 경제의 장기 침체국면 타개를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산업부 등 관계부처에 전달했다고 밝혔습니다.

산업계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 최근 중국이 전기요금 인하 방침을 밝히는 등 국내 기업의 원가 경쟁력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는 겁니다. 성장둔화로 전력 수요 증가율이 하락하면서 현재 전력예비율이 안정적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도 업계가 전기요금 인하 주장을 꺼내든 배경입니다. 

어차피 전기가 남으니 이럴 때 전기요금을 내려 원가 부담을 덜어달라는 요굽니다. 산업계는 전기요금을 1%만 내려도 2900억 원의 원가절감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 주장을 듣고,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 우리 산업계의 수준이 아직 이 정도로 과거 패러다임에 매여 있는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론 산업계의 전기요금 인하 주장은 사실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원가의 일부를 차지하는 전기요금이 떨어지면 원가 경쟁력이 개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다른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싼 우리나라의 전기요금 수준, 그리고 이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에너지 소비 왜곡 현상 또한 오랫동안 사회적 논의가 진행돼왔던 사안입니다. 즉 70~8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때처럼 ‘돌격 앞으로!’ 제조업 밀어주기 정부 때도 아니고, 신산업 발전과 신재생에너지 육성 부분까지 고려해 전기요금 체계의 합리적인 개편을 논의하는  현재 상황에서 전기료 깎아주면 수출이 잘 될 거라는 너무나 단순하게 도식적인 주장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드는 것이 심지어 생경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중공업 육성 위해 싼 전기료 유지…각종 에너지 소비 왜곡 부작용 낳아

우리나라는 에너지 다소비 업종인 중공업을 육성하면서 원가 이하의 전기요금을 유지해왔고, 그런 산업정책에 힘입어 초창기 수출경쟁력을 확보하는데 기업들이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장 원리에 입각하지 않은 가격결정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 법. 싼 전기료에 익숙해진 탓에 에너지 과소비 구조가 고착화됐습니다.

전기요금이 싸니 농가에선 기름보일러를 전기보일러로 바꾼다든지, 가정에서도 전기난방을 더 선호한다든지, 빌딩에서는 가스냉방 대신 전기냉방을, 산업현장에서 기름으로 돌리는 자가발전기 대신 전기를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 돈은 절약되지만 에너지 소비량은 전기가 훨씬 많습니다. 이유는 전기가 가스나 기름을 때서 생산하는 것인 만큼 비효율적인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KDI는 경유ㆍ가스 등을 전기로 바꾸는 비효율적인 전환수요가 연간 1조 원에 달한다고 밝힌 바 있고, 한전은 전기로 난방을 하는 것을 '생수로 빨래를 하는 것'에 비교하곤 합니다.

● "전기요금을 물가 대책의 연장선상으로만 접근"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전기요금 인상에 소극적입니다. 전기요금은 우리 국민들에게 '준조세'적 성격을 띠고 있죠. 우리가 흔히 '전기세'라는 말을 자주 쓰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국민들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고, 물가에 미치는 파급영향이 워낙 크니 민심의 동요를 우려해 에너지 소비구조 왜곡을 개선해보겠다며 용감하게 전기요금 인상을 발표하는 정부는 거의 없습니다.

자고 나면 유가가 너무 올라서 에너지 수입액이 급증했던 이명박 정부 시절 전기료 정상화가 공론화됐었지만 결국 물가 안정을 이유로 추경을 해서 한전 적자를 메워주는 방식으로 요금 인상을 최소화했고, 박근혜 정부도 2013년 말에 전기요금을 올렸지만 2년도 채 안 돼 다시 서민부담 줄여주겠다며 내렸습니다. 모두 전기요금을 물가 대책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에너지 소비구조 왜곡은 먼 일이고, 물가 인상으로 인한 아우성은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일이기 때문이란 인식입니다.

하지만 값싼 전기요금으로 인한 시장 왜곡이 정말 먼 미래의 일일까요?
한국전력의 원가율은 95% 정도 된다고 합니다. 한전이 발전회사가 석탄·가스·원자력 등으로 만든 전기를 손해 보면서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가정용 전기요금은 MWh당 101달러, 산업용은 92달러 수준으로 OECD  평균(산업 128·가정 181달러)보다 낮은 수준입니다.

전기요금이 싸다보니 한전은 전력 단가가 낮은 석탄 화력과 원자력발전 위주로 구매할 수 밖에 없고, 자연히 신재생 에너지와 에너지 신산업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전기요금을 올려야 신재생 에너지 발전과 화력발전의 단가 차이가 줄어들어 신산업이 클 수 있는데, 전기요금이 낮은 상태로 유지되면서 높은 비용이 드는 신재생 에너지 수요가 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미래, 환경 보호라는 명분이 지속적 행동으로 옮겨지려면 반드시 요금체계 개편이 뒤따라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전기요금을 올리지 않으면서 에너지 신산업을 키우자는 것은 모순이란 말이 그래서 등장합니다.

"싼 전기요금 그대로 두고 에너지 신산업 키우자는건 모순"
"한전 흑자라 요금 내리라고?...부지 매각 수입 10조5천억원 때문"

산업계의 주장 중 비약이 심한 건 바로 이 부분입니다. "한전이 지난해 역대 최고의 수익을 낸 만큼, 요금 인하의 여력이 충분하다"는 주장 말입니다. 한전이 2015년에 역대 최고인 약 13조4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연결기준)을 기록했고, 약 2조 원의 현금배당도 결정한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전의 지난해 당기 순이익의 경우 지난 2014년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 매각한 서울 삼성동 본사 부지 대금 10조5500억 원이 유입된 효과가 반영된 겁니다. 한전 역사상 딱 한번 있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돈벼락’을 맞은 해에 재무제표가 개선됐다고 요금을 내리라는 건 누가 봐도 억지스럽습니다. 물론 전력 판매수익이 늘어난 것도 있지만 역대 최고의 수익을 냈다고 호들갑 떨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산업계 요구 중에 '전력산업기반기금' 요율 인하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은 전력산업의 지속적인 발전과 전력산업의 기반조성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를 목적으로 설치됐는데 여유자금 규모가 1조6천억 원까지 늘어나 정부가 제시하는 적정 여유자금율을 상당히 웃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적인 에너지 소비행태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업계 부담을 덜어줄 방법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출을 떠받치던 조선 해운 철강 건설 등 중공업 부분의 부진이 꽤 지속됐습니다. 자체적 경쟁력 상실의 문제 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저성장 기조와 중국의 성장 등 복합적 원인이 존재합니다. 정부와 업계 모두 앞으로 우리가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신성장 동력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힙니다. 그 신성장동력 리스트에 반드시 빠지지 않는 게 바로 신에너지 산업 분야입니다. 신에너지 산업은 반드시 풍력 태양력 등 신재생 에너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각종 에너지 저장장치와 전기차, 수소차 등 기존 화석에너지에 의존하던 산업구조를 바꿔나가는 시도를 말합니다.

새로운 에너지 산업은 '유가가 이렇게 싼데 무슨?', '경제성 확보가 되겠어?'라는 트집잡기식 접근으로는 육성하기 어렵습니다. 당장 돈 되는 산업이 아니라고 미룬다면 상용화된 후 그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힘듭니다. 구글이 인공지능을 십년 넘게 투자할 때 과연 당장 돈이 될 것이라고 해서 투자규모를 유지해 왔을까요? 

제조업 부진으로 산업계의 어려움이 크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적어도 포스트 2020에 대응하자며 유엔 총회에서 대통령이 박수 받으며 연설을 하는 2016년 이 시점에, ‘전기료 내려야 산업의 경쟁력 산다’는 구호는 좀 지나치게 진부하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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