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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귀향'…"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이 영화, 이 대사] '귀향'…"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
“이제 고마 우리, 집에 가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끔찍한 고통을 겪은 14살 소녀 정민이 함께 도망치던 영희에게 말한다.

“집에 가자.” 한 살 많은 언니 영희가 눈물을 삼키며 대답한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붙잡고 일어선다. 하지만 두려움에 떠는 언니를 격려하며 먼저 일어선 정민은 결국 집에 돌아가지 못했다.
 
‘공식 기록’이 없는 탓에 추산할 뿐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숫자는 최소 20만 명이다. 그 가운데 현재까지 우리 정부에 공식 등록된 할머니들의 숫자는 238명뿐이다. 그 238명 속에 정민은 없다. 그래서 ‘정민’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돌아갈 고향은 달랐더라도, 정민과 마찬가지로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적어도 19만9천명 넘는 소녀들 모두를 아우르는 이름이다. 
영화 ‘귀향’의 ‘귀’자는 ‘돌아올 귀(歸)’가 아니라 ‘귀신 귀(鬼)’ 자다. 발음은 같지만, ‘歸鄕’과 ‘鬼鄕’이 주는 울림 사이엔 자못 엄중한 차이가 있다. 귀신 ‘鬼’자 속엔 일제의 전쟁 범죄에 희생된 할머니들을 고향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과 함께, 살아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할머니들의 아픔이 담겨 있는 탓이다.
 
그 아픔이 더욱 안타까운 건 비단 시간의 흐름이나 육체적 죽음 때문만은 아니다. 할머니들의 아픔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알지 못하는 어떤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위로의 말은 건네지만, 진심으로 그들을 끌어안지는 않는 어떤 이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 어떤 이들은 전쟁을 핑계로 반인륜적 범죄를 거리낌 없이 자행한 일제만은 아니다. 그 어떤 이들은 바로 우리들이기도 하다.
 
영희가 위안부 피해자 등록을 위해 동사무소를 찾는 장면에서, 영화는 전쟁에 광분한 70여년 전 일제가 아닌 오늘 이 시간 ‘우리’의 책임을 분명하게 묻는다. 차마 입을 떼기 어려워 돌아서는 영희의 귀에 담당 공무원의 말이 비수처럼 꽂힌다. “미치지 않고 어째 그런 과거를 밝혀?”
 
수십 년 만에 애써 용기를 내 찾아간 고향은 영희에겐 너무나 낯설다. 밤마다 꿈 속에서 만나던 정겨운 풍경은 어디에도 없다. 영희는 후회한다. “안 오는 게 나을 뻔 했다. 여는 이제 내 고향 아니다.”
 
개봉 전 공개된 ‘귀향’의 예고편엔 ‘20만 명’과 ‘238명’ 외에 또 하나의 숫자가 등장한다. 현재 ‘생존한 할머니들의 숫자, 46명’이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된 날 이 숫자는 이미 틀린 숫자가 돼 있었다.  예고편 공개 후 개봉 전까지 길지 않은 기간 동안 피해자 할머니 두 분이 더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제 44로 바뀌어버린 이 숫자는 언제 다시 43으로, 42로 바뀔지 모른다. 이 숫자는 일제가 숨기고 태워버린 기록이나 증거 같은 죽은 역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의 숫자이기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로 뭉뚱그려진 추상명사가 아니라, 한 분 한 분 각기 다른 모습으로 파괴된 할머니들의 영혼 하나 하나를 가리키는 숫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 미친년이다. 우짤래?”라는 할머니 영희의 절규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재를 책으로만 배웠던 우리를 향한 238명 할머니들의 호통이다. '19만9천여 명'에도 '238명'에도 속하지 못한 채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고통스런 과거와 싸우고 계실지 모르는 할머니들을 대신하는 외침이다. 그래서, ‘정민’이 그랬던 것처럼, ‘영희’ 역시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다.

활자로만 기억돼 있던 할머니들의 삶을 생생한 이미지로 보여줌으로써 영화 '귀향'이 우리에게 말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여전히 대명사 뒤에 숨겨져 있는 분들에게 각자의 이름을 찾아 드리는 일이라고. 그것만이 그분들의 영혼이라도 고향으로 모실 수 있는 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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