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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귀향'의 기적을 만든 '종잣돈' 3백만 원

[취재파일] '귀향'의 기적을 만든 '종잣돈' 3백만 원
영화 ‘귀향’이 연일 새 역사를 써 가고 있습니다. ‘귀향’은 지난달 24일 개봉이래 줄곧 박스오피스 선두를 질주 중입니다. 3.1절이었던 1일엔 하루에만 42만 명 넘는 관객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개봉 8일째인 2일 현재 누적 관객은 1백80만 명이 넘습니다.
 
예상을 깬 흥행질주 덕분에 ‘귀향’은 이미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섰습니다. “대중성이 없다”며 외면했던 투자자들에겐 땅을 칠 일입니다. 거칠것 없이 쭉쭉 올라가는 관객 숫자를 볼 때마다 “귀향은 거절의 역사”라던 조정래 감독의 개봉 전 인터뷰 내용이 떠올라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됩니다.
 
개봉 3일째 되던 지난 26일, 조 감독을 다시 만났었습니다. 조 감독은 새벽부터 밤까지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느라 목에 염증이 생긴 상태였습니다. “문전박대가 문전성시로 바뀐 기적”이라는 조 감독의 농담에서 14년에 걸친 ‘거절의 역사’를 극복한 기쁨과 감격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귀향’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조 감독이 자주 쓰는 표현 가운데 ‘기적’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귀향’은 7만5천여 명의 시민들이 모아준 후원금 덕분에 완성된 영화입니다. 후원금으로만 제작비의 절반인 12억 원 정도가 모였습니다.
조정래 감독
후원금 총액을 전체 후원자 숫자로 나눠보면 평균 1만6천 원 정도가 나옵니다. 후원자 가운데는 좀 더 많은 액수를 후원한 분들도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 일반 시민 후원자들은 대략 한 사람이 1만 원 정도 후원했다고 보면 될 듯싶습니다. 1만 원이면 유명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에서 두 사람이 커피 한 잔씩 마실 수 있는 액수입니다.
 
그런 작은 돈들이 모여서 12억 원이라는 거금이 됐으니 ‘기적’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닙니다. 하지만, 후원금이 모여서 영화가 완성된 과정을 자세히 보면 그 기적은 훨씬 더 기적적입니다. 그 출발점은 단돈 3백만 원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이 많이 알고 있는 대로 ‘귀향’의 후원금 가운데 상당 부분은 영화 홈페이지를 통한 모금과 포털 사이트를 통한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됐습니다. 하지만, 홈페이지를 만드는 데도 돈이 필요하고, 크라우드 펀딩도 영화에 대한 홍보가 어느 정도 이뤄진 뒤에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걸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조정래 감독의 한 지인이 쾌척한 3백만 원입니다.
 
종잣돈 3백만 원으로 제작진은 영화를 소개하는 작은 인쇄물들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인쇄물을 들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후원금이 조금씩 늘었습니다. 돈이 좀 모이자 이 돈으로 아트워크 작업을 하고 스토리보드도 만들었습니다. 영화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도 만들었습니다.
 
홈페이지가 생기자 후원금이 늘기 시작했습니다. 1천만 원 정도 모였을 때 제작진은 그 돈으로 첫 티저 영상을 찍었습니다. 제작비가 적다 보니 오래 찍을 수는 없었습니다. 딱 하루 촬영해서 그 영상으로 트레일러를 만들었습니다.
 
트레일러를 유튜브에 올렸습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뉴욕 타임스 기자까지 영상을 보고 취재요청을 해 왔습니다. 세계적인 유력지 뉴욕 타임스에 기사가 나자 무심했던 국내 언론들이 뒤늦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기자의 제안으로 포털 사이트 크라우드 펀딩이 시작됐습니다.
 
크라우드 펀딩의 첫 목표는 45일 동안 1천만 원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만에 모금액이 3천만 원을 돌파했습니다. 최종 모금액은 2억5천만 원, 목표액의 스물 다섯 배에 달했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 일본 등 해외에서도 후원금이 답지했습니다.
 
이 2억5천만 원으로 2015년 4월, 드디어 첫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손숙 씨를 비롯한 주연 배우들 대부분이 출연료를 받지 않고 재능기부로 참여했습니다.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스태프들도 진행비에도 못 미치는 액수에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촬영 5일째 만에 제작비가 바닥났습니다. 2억5천만 원이었던 제작비 통장 잔고가 15만 원으로 줄었습니다. 이젠 정말 접어야 하나 싶을 때 누군가 집을 팔아서 제작비에 쓰라고 내놨습니다. 또 누군가는 차 판 돈을 보탰습니다. 어떤 이는 1억 원이 넘는 고가의 촬영장비를 단돈 1천 만원에 빌려주고, 전투 장면을 찍을 땐 감독도 모르는 폭탄을 누군가 직접 구해와 어느새 설치하고 있었습니다.
 
제작 과정뿐 아닙니다. 개봉까지 과정은 또 어떻습니까? 상업 영화들에 밀려서 스크린 확보가 어렵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시민들이 예매에 나섰습니다. 각종 인터넷 까페에는 집 근처에 개봉관이 없어서 다른 동네 영화관 티켓을 예매했으니 원하는 분에게 드리겠다는 글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자비로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서 무료로 희망자에게 티켓을 나눠주는 분들까지 생겼습니다.
 
그 결과 개봉을 며칠 앞두고 ‘귀향’은 예매율 1위로 올라섰습니다. 스크린 수가 수십 개에 불과할 때 일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이었습니다.
 
귀향이 처음 예매율 1위에 올랐을 때, 영상팀에 요청해서 서둘러 예매 현황 사이트를 촬영했습니다. 반짝 1위일 뿐, 금세 순위가 내려갈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개봉 전날 쓸 예정이었던 기사에 “한 때 예매율 선두에 오르기도 했습니다”라는 문장을 쓰기 위해 순위가 바뀌기 전에 촬영해 둔 겁니다.
 
하지만 이런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예매율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벌어졌습니다. 현장 매표소 분위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귀향은 개봉 첫날부터 박스오피스 선두에 올랐습니다. 이후 현재까지 줄곧 선두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수십 개로 시작한 스크린 수는 2일 현재 793개입니다. 현재 상영중인 모든 영화 가운데 가장 많습니다.
 
단돈 3백만 원에서 시작된 기적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두말할 것도 없이 관객의 힘입니다. ‘마음으로 만든 영화’라는 제작진의 표현이 전혀 넘치지 않습니다. 아픈 역사를 직시하고 고통 받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로하려는 관객들의 따뜻한 마음에 지켜보는 마음도 함께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 한 편이 걸리기까지 과정이 이토록 험난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영화계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관객들이 직접 돈을 모아 제작비를 대는 것으로도 부족해 스크린까지 직접 확보해야 한다니 말입니다. 대한민국에서 관객 노릇 하기란 어째 이렇게 어려운가 말이죠.
 
‘귀향’이 만들어낸 ‘기적’은 지금까지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기적을 보면서 욕심이 납니다. '귀향'의 기적이 기폭제가 돼서 앞으로는 더 이상 관객들이 기다리는데도 상업성과 대중성에 밀려 외면 받는 영화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귀향’의 가장 큰 기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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