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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부작침] 대통령이 뽑은 국회의원…총선의 암흑기

6대 총선∼12대 총선

[ 인터랙티브 그래프 읽는 법 ]
1. 총선별 각 정당이 지역구에서 차지한 의석 비중을 표시했습니다.
2. 원의 크기가 클수록 지역구에서 차지한 의석이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총선별로 시기를 이동하면 변화상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내각제 ⇒ 대통령제' '양원제 ⇒ 단원제' 6대 총선

잠시 동안의 내각제는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대통령제로 복귀하면서 종말을 고했다. 쿠데타의 장본인 박정희 장군은 1963년 10월 15일, 민주공화당 소속으로 대선에 나갔고,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15만 표 차로 아슬아슬하게 누르고 5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말 그대로 ‘신승’이었다. 이 표차는 아직도 대선에서 가장 근소한 표차로 기록되어 있다.

대선 한 달 뒤 1963년 11월 26일 실시된 제 6대 총선. 선거 제도는 3년 전에 비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양원제 국회는 지금과 같은 단원제로 바뀌었고, 처음으로 전국구 제도가 도입됐다. 당시의 전국구 제도는 현재와 같은 정당 명부식 비례대표가 아닌 지역구 의석에 비례해 의석수를 배분했다. 지역구 의석을 많이 차지하는 정당에게 유리하도록 제도가 설계되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민주공화당은 131개 선거구에서 88곳을 석권하고, 전국구 의석 22곳을 더해 모두 110명의 의원을 당선시켰다. 전체 의원 175명 중 절반을 넘었고, 경쟁자 윤보선 씨가 대표로 있던 민정당은 41석을 확보했다.

# '부정선거의 잔치판' 7대 총선

박정희 대통령은 신민당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재선한다. 그리고 한 달 여 후인 1967년 6월8일 실시된 총선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의 민주공화당은 전체 의석수 175곳 중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확보한다.

하지만 승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찜찜했다. 선거의 전제인 ‘투명성’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셌다. 공화당 스스로 경기도 화성 지역구 당선자를 공화당 후보에서 제 1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바꾸고, 7곳의 지구당위원장을 제명했다. 그러나 투명한 선거에 대한 국민의 ‘바람’은 컸고, 전면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일부 의원들은 의원 등록도 거부했지만, 시민의 바람은 이뤄질 수 없었다.

# 민주주의 암흑기 '유신의 시작'...8대 총선

재선도 만족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3선 개헌을 단행한다.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 3선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1971년 5월 25일 실시된 8대 총선은 박정희의 장기집권 속에 실시됐고, 표면적으로는 공화당이 전체 의석수 204 곳 중 과반수가 넘는 의석을 챙겼다. 그리고 선거는 무의미했다.

8대 총선 이듬해인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선언문을 발표했다. 민주주의 암흑기인 ‘유신시대’다. 낡은 제도를 고쳐 새롭게 한다는 ‘유신’의 뜻과 달리 민주주의에서 독재로 뒷걸음질친다. 이 발표로 국회는 해산됐다. 8대 국회는 지금까지도 임기가 가장 짧은 ‘단명 국회’로 기록돼 있다.

# 박정희에 의한, 박정희를 위한 9대 총선

1972년 12월 23일. 박정희 대통령은 이른바 ‘체육관 선거’인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또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시민의 손이 아닌, 2,300백여 명의 지역별 대표들이 뽑는 선거로, 당선은 당연한 것이었다. 박정희 후보 단독 출마, 2명의 기권표를 제외한 99.9%의 찬성. 사람들은 ‘반장 선거’보다 못한 것이라고 놀렸다.

총선은 ‘줄반장 선거’보다 못했다. 1973년 2월27일 실시된 9대 총선부터 전체 의석 219개 가운데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하게끔 제도가 바뀐다. 이른바 유신정우회(유정회)가 탄생한 것이다. 다만, 유정회 소속 의원의 임기는 지역구 의원의 절반인 3년으로 제한됐다.

국민이 직접 뽑는 지역구 선거는 1선거구 당 2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중선거구제’가 도입된다. 그렇다고 공정한 선거였다고 착각하는 건 금물. 야권 강세인 도시 선거구는 45개에서 17개로 줄였다. ‘여촌야도’ 구도를 돌파하기 위한 정권의 꼼수였다. 농촌선거구를 도시선거구와 통합시키는 선거구 획정으로 여당인 공화당은 지역구 선거에서 73석을 확보한다. 여기에 유정회 소속 의원 73명을 더하면 전체 의석의 2/3를 확보했다. 민주주의를 왜곡하는 ‘바람’이 어느 때보다 거센 시절이었다.



# '박정희 시대의 종말' 10대 총선

박정희 대통령은 1978년 체육관 선거를 통해 다시 대통령에 당선된다. 2,578명이 투표해서 2,577명이 찬성했다. 선거라고 표현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민심은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10대 총선에서 드러났다. 154석을 뽑는 지역구 선거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공화당에 불과 6석 뒤진 61석의 의석을 확보했다. 시민의 바람은 그렇게 나타났지만, 민주주의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정회 의석 77석으로 인해 전체 의원 231명 중 친(親) 박정희 의석은 과반을 넘었다.

권력욕의 끝이 정점을 찍으며 또 다른 권력으로 대체됐지만, 혼란은 반복됐다. 총선과 대선이 있고 1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심복으로 불렸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시해당한다. 16년 간 이어진 대통령 박정희의 시대가 저문 것이다. 민주주의가 다시 꽃 피울 수 있을까? 시민들은 기대했지만, 예상치 못한 ‘바람’이 또 다시 군대에서 시작됐다.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1979년 12·12 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듬해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0대 국회는 임기의 1/3 정도만 채운 1980년 10월 27일 해산됐다. 다음 국회가 시작되는 1981년 4월 10일까지 신군부 측 인사들이 장악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국회의 권한을 대행했다.

# 허물어진 민주화의 꿈 '11대 총선'

대통령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했던 유신헌법을 7년 단임제로 바꿨던 전두환 대통령은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선거로 당선됐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난 1981년 3월 25일, 제 11대 총선이 열렸다. 11대 총선에선 대통령이 임명하던 유정회 의원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전국구 의원들이 다시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비중이 이전의 국회의원 선거보다 대폭 커진다. 지역구 의석의 1/2, 즉 전체 의석의 1/3이 전국구에 배당된 것이다. 다만,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에게 전국구 의석의 2/3를 우선 배정하고, 나머지 의석은 다른 정당들이 지역구 의석 비율로 나눠가지도록 해 지역구 의석이 많은 정당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설계된다.

이런 선거 제도의 변화에 힘입어 전두환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은 지역구에서 90석, 전국구 61석을 차지해 전체 의석 276석의 과반이 넘는 151석을 차지한다. 민주한국당이 81석을 차지해 제 1야당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집권당을 견제하는 야당의 본래 역할을 기대하는 건 무의미했다. 지금의 국정원에 해당되는 안전기획부의 자금으로 창당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관제야당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 '재야 인사' 정치 재개...12대 총선

12대 총선은 1985년 2월 12일 한겨울에 실시됐다. 매서운 추위를 선거로 따뜻하게 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정치 활동 금지 조치가 해제된 재야인사들이 대거 합류한 신한민주당의 창당 날짜와 선거일을 최대한 가깝게 배치해 신한민주당의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군사정권의 고육지책이었기 때문이다.

정권의 '꼼수'에 민심은 ‘정수’로 대응했다. 민주화에 대한 시민의 ‘바람’은 폭발적이었다. 12대 총선 투표율은 박정희 정권 이후 가장 높은 84.6%를 기록한다. 높은 투표율에 힘입어, 신한민주당은 10여 석을 얻는데 그칠 것이라는 안기부의 예상과 달리 전체 의원 276석 중 지역구 50석, 전국구 17석을 차지하면서 제 1야당으로 부상한다.

관제 야당이라는 비판을 받던 민주한국당은 35석으로 의석수가 대폭 축소됐고, 민주한국당 의원들 상당수가 이탈해 신한민주당으로 합류했다. 정치권은 요동쳤고, 몸집을 불린 신한민주당은 선거인단으로 뽑던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는 개헌을 주장하며 전두환 정권과 대립한다.

권지윤 기자 (legend8169@sbs.co,kr)
박원경 기자 (seagull@sbs.co.kr)
분석: 한창진·안혜민(인턴)
디자인: 임송이

(SBS 뉴미디어부)               

※ 마부작침(磨斧作針) :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방대한 데이터와 정보 속에서 송곳 같은 팩트를 찾는 저널리즘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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