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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이 대사] 영화 '히말라야'의 우문현답…"내려와야지. 거기서 삽니까?"

[이 영화, 이 대사] 영화 '히말라야'의 우문현답…"내려와야지. 거기서 삽니까?"
지난 2012년 10월 14일, 오스트리아의 모험가 펠릭스 바움가르트너가 지상 39km 성층권에서 자유낙하에 성공했다. 맨몸으로 성층권 높이에서 지상으로 뛰어내리는 데 성공한 건 인류 역사상 바움가르트너가 처음이었다. 2014년 앨런 유스터스 전 구글 부사장이 41km 자유낙하에 성공하기 전까지 이 분야 최고 기록이었다.

바움가르트너의 역사적인 도전에는 준비 단계에서부터 전 세계의 눈과 귀가 집중돼 있었다. 바움가르트너가 무사히 지상에 발을 딛는 순간, 숨죽이며 지켜보던 세계가 함께 열광했다. 인류 역사에 새 이정표가 세워진 직후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가 물었다. "39km 높이에 섰을 때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어떤 영웅적인 답변이 나올까? 모두의 눈과 귀가 바움가르트너를 향했다. 그때 바움가르트너는 이렇게 답했다. "세상 꼭대기에 서면 겸손해집니다. 기록을 깨겠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 돌아오고 싶었을 뿐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히말라야에서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엄홍길 대장에게 진행자가 묻는다. "흔히 등산을 인생에 비유하기도 하는데요, 지금까지 수많은 산행을 겪으면서 얻게 된 교훈, 이런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엄 대장은 세계 최초로 8천 미터 16좌를 완등한 세계적인 산악인이다. 영화 속 진행자는 물론,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관객들도 모두 어떤 대답이 나올까 잔뜩 기대에 찬 눈빛으로 엄 대장을 주목한다. 그런데 그때, 엄 대장이 진행자에게 반문한다.

"산에 오르면 대단한 걸 찾을 수 있을 것 같죠? 7천 미터 정도 올라가다 보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떠오를 수 있을 것 같고, 8천 미터 정도 올라가다 보면 삶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고...."

하지만, 엄 대장은 답한다. "거기서 절대 그런 거 찾을 수 없습니다. 거기서 느낄 수 있는 건 오직 제 자신뿐입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제가 몰랐던 제 모습이 나옵니다. 그동안 쓰고 있던 모든 가면이 벗겨지는 거죠. 보통사람들은 평생 그 맨얼굴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영화는 2005년 엄 대장이 주축이 됐던 '휴먼 원정대'의 히말라야 원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등반 도중 사망한 동료들의 시신을 찾아 내려오기 위한 목숨을 건 원정이었다. "어떤 명예도 보상도 돌아오지 않을" "산악 역사상 그 누구도 하지 않았던 도전"이었다. 원정대를 꾸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 대장에게 선배 산악인이 "왜 이러느냐?"고 묻는다. 그를 향해 영화 속 엄 대장은 절규한다. "내려와야지. 거기서 삽니까?"

히말라야는 상당 분량을 네팔과 몽블랑 등 고산지대에서 촬영했다. 산을 배경으로 산악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산악 영화'다. 하지만 웅장한 설산을 정복한 영웅들의 성공담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얘기하자면, 산을 오르려 나섰다가 산속에서 목숨을 잃은 이와 그 이의 시신조차 수습하는데 끝내 실패한 동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도 영화관을 찾는 이들이 줄을 잇는 건 사람살이의 많은 미덕은 성공보다 오히려 실패 속에서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바움가르트너가 지적했듯, 인간은 결코 우주와 자연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 자연을 상대로 한 도전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은 그저 살아남는 것뿐이다. 어쭙잖은 등산객들은 자주 '정복'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하지만 '산쟁이'들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왜소하고 보잘것 없는 인간의 모습을 직시하기 위해 산에 오른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리 높은 봉우리에 올랐더라도, 이내 다시 내려온다. 인간이 발붙이고 살 곳은 결국 8천 미터 정상이 아니라 땅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영화 히말라야의 미덕은 '휴먼 스토리'다운 뻔한 감동이다. '동료의 시신을 찾기 위해'라는 거창한 명분이 붙긴 했지만, 사실 희생이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닳고 닳은 상투적이기 그지없는 '감동 코드'다. 그래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이의 준엄한 시선으로 내려다 보면 이 영화는 분명 상업적인 신파다.

하지만, 땅으로 내려와서 주변을 둘러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그 상투적인 신파에 담긴 가치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게 무엇이 얼마나 있을까? 얼마나 거창한 도전이나 성공, 명예나 보상이 그 뻔한 미덕을 능가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눈보라 치는 설산 속에 무택이 고립됐다는 사실을 들은 선배 산악인은 무택을 구조하러 가 달라는 무전 요청에 주저한다. 눈보라가 잦아지면 팀을 이끌고 정상 도전에 나서야 하는 탓이다. 어렵게 얻은 정상 등정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끝내 구조 요청을 외면하는 그에게 선배 산악인이 무전기를 통해 호통을 친다. "사람이 없으면 산이 뭔 놈의 의미가 있노?" 절규에 가까운 호통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깨닫게 된다. 5천 미터가 됐든 8천 미터가 됐든, 땅에 발 딛고 사는 인간들에게 산은 결국 "내려와야" 할 곳일 뿐인 것을. 정상만 쳐다보며 사는 인간들은 그 쉬운 진실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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