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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판결문에 활자로 남은 455명의 이름들

[취재파일] 판결문에 활자로 남은 455명의 이름들
● 판결문 별지에 담긴 이름들

판결문에는 ‘별지’가 붙을 때가 있습니다. 원고나 피고의 이름 혹은 범죄일람표처럼, 판결문에 그대로 담기엔 그 목록이 많은 무언가가 있을 때입니다. 긴 목록만 따로 빼서 판결문 뒤 별도의 종이에 작성하는 건데, 이 종이를 별지라고 합니다.

법원 출입기자이다 보니 판결문을 읽고 기사 쓸 일이 많은데, 마감 시간이 정해져 있는 탓에 판결문을 얼른 읽고 그 핵심을 파악하는 데에도 시간은 늘 빠듯한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별지를 꼼꼼하게 읽는 일은 사실 드물었습니다.
세월호 참사 발생 600일을 맞은 6일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등학교에서 4·16가족협의회와 시민단체 안산시민대책위원회, 4·16연대 회원 등이 희생자 교실(당시 2학년)을 둘러보고 있다. / 사진=경기일보 제공
하지만 149쪽의 판결문 뒤에 이어진 26쪽의 그 별지는 좀 달랐습니다. 303명의 희생자(판결 선고 당시의 실종자 포함)와 152명의 부상자 명단이 담긴 별지였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모두 익명 처리된 목록이었지만, 길게 나열된 그 별지를 한참이고 들여다봤습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물어 기소됐던 이준석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의 1심 판결문이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나던 날, 전례 없는 참사에 당일부터 세월호 선사였던 청해진 해운, 수사 초기 검경합동수사본부가 차려졌던 목포 해양경찰서, 희생자와 실종자 가족들이 머물던 진도체육관, 사고 해역으로 나갈 수 있던 팽목항을 오가게 됐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선사 직원, 선원, 피해자 가족들은 활자가 됐습니다. 175쪽의 판결문 속에 명료하게 혹은 허무하게 말입니다. 

● 세월호 참사가 낳은 ‘첫’ 판결들

-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첫 인정된 세월호 이준석 선장

세월호 이준석 선장
사고 발생 2시간쯤 뒤인 오전 11시쯤, 진도 팽목항에 들어온 구조선에서 한 남성이 내려 간이 진료소로 들어섰습니다. 세월호 선장 이준석 씨였습니다. 이후 속옷 차림으로 세월호를 떠나 경비정으로 몸을 피하는 이 씨의 모습이 담긴 영상이 공개됐습니다. 자신은 대피하면서, 배에 남아 있던 400여 명의 승객들에겐 퇴선 명령조차 내리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판결문에도 명시된, ‘선장’ 이 씨에게 부여된 의무를 스스로 지키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 출항 전 선박이 항해에 견딜 수 있는지 화물의 상태 등을 점검해야 하는 ‘출항 전의 검사 의무’, ▲ 선박에 위험이 생길 우려가 있을 때 선박의 조종을 직접 지휘해야 하는 ‘직접지휘의무’, ▲ 화물을 모두 내리고 여객이 다 내릴 때까지 선박을 떠나서는 안 되는 ‘재선 의무’, 그리고 ▲ 선박의 좌초와 퇴선 및 인명구조 등 비상 상황에서 주어지는 ‘승객 구호 의무’가 바로 그에게 주어진 의무였습니다. 
속옷 차림으로 세월호를 빠져나와 경비정으로 옮겨 타고 있는 이준석 선장의 모습
이 의무를 저버려 재판에 넘겨진 그에게 살인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를 두고 1심과 2심 판결은 엇갈렸습니다. 1심 재판부는 이 씨에게 피해자들의 사망과 상해를 용인하려는 의사가 있었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살인죄는 무죄, 유기치상 및 유기치사 혐의 등은 유죄로 보고 징역 36년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형량도 높여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승객들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한 것을 넘어, 이를 용인하는 의사도 있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1심과 달리 이 씨가 했다고 주장하는 ‘퇴선방송 지시’가 없었다고 본 것이 주요 판단 근거가 됐습니다.

대법원 판단은 항소심과 같았습니다. 이 씨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해 무기징역형을 확정했습니다. 이 씨가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세월호를 탈출하면서, 그렇지 않았더라면 피해를 입지 않았을 승객들이 숨지거나 다치게 됐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대법원은 선고 이후 이준석 선장에 대한 이 판결이, ‘구조조치’ 또는 ‘구조의무’ 위반 여부가 쟁점인 사안에서 ‘부작위에 의한 살인’을 인정한 최초의 판시라고 밝혔습니다.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했을 때 구조의 의무를 지닌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됐다면 살인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건데, 세월호 참사는 그렇게 살인죄가 적용된 첫 번째 사건이 됐습니다.

● 구조업무 담당자의 업무상 과실치사‥ 해경 123정 정장 김 모 경위

세월호 참사는 이 사건뿐 아니라 또 다른 ‘첫’ 판결도 낳았습니다. 당시 구조 지휘 업무를 맡아 세월호에 가장 먼저 접근했던 당시 해경 123정 정장 김 모 경위에 대한 판결입니다. 당시 123정은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뒤 고무단정으로 이준석 선장 등 선원들을 구조했지만, 승객들이 퇴선하도록 하는 조치는 제대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지휘관으로 지정됐던 김 경위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승객들에게 바다에 뛰어내려 달라는 퇴선방송을 수차례 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이 퇴선방송은 없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퇴선방송 등의 조치가 없었던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함정일지를 허위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해경 123정 정장은 세월호 승객들에게 '퇴선 명령'을 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지만, 실제로 그 퇴선방송은 없었다.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은 김 경위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등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징역 3년형을 확정했습니다.

김 경위가 ▲ 사고 당일 9시 반경 세월호 사고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세월호와의 교신 유지, 상황 파악, 승조원 임무 배치 등의 조치 ▲ 사고 당일 9시 반 이후 선장과 선원의 교신을 통한 승객 퇴선 유도 ▲ 123정 방송 장비를 이용한 승객 퇴선 유도 ▲ 123정 승조원에 의한 갑판에서의 승객 퇴선 유도를 각 소홀히 한 과실을 인정한 겁니다.

이 조치를 취했더라면 승객들이 모두 구조될 수 있었다고 보고, 김 경위의 과실과 피해자들의 사망 또는 상해 사이에 인과관계도 인정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동안 대형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 그 사고 발생 자체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혹은 치상 혐의를 적용해 책임을 묻는 경우는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경위 재판에서는 처음으로 사고 발생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구조업무 담당자에게 그 책임을 물었습니다. 구조작업을 했더라도, 그 작업에 대해 과실이 있고, 그 과실과 피해사실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면 업무상 과실치사 혹은 치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본 첫 판결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수백 건의 판결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어떤 판결 하나가 ‘기사’가 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처럼 유명인들이 원고나 피고로 등장하거나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판결이거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테지만 ‘사상 첫 판결’일 때 종종 그 판결이 유의미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전과는 무언가가 다른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런 ‘첫 판결’이 나오게 됐을 테니까요. 한 판결을 두고 기사화 여부를 검토하는 단계에서 ‘유사한 사안에 대해 비슷한 판결이 나온 적이 없는지’, 즉 ‘그 판결이 첫 판결인지’를 따져보는 건 바로 그 이유입니다.

앞서 밝혔다시피 두 판결은 모두 ‘사상 첫 판결’이었습니다. 이준석 선장에 대한 대법원 선고 결과 기사를 직접 쓴 저도 가장 마지막 문장을 “이번 판결은 구조조치를 해야 하는 사람이 그 위험을 알고도 의무를 다하지 않아 대형 인명사고로 이어졌을 때, 즉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한 최초의 판례로 남게 됐습니다”라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 문장이 쉬이 써지지만은 않았습니다.

썼다 지웠다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결국 그 ‘판결의 의미’는 그렇게 기사 마지막에 남았지만, 왠지 모를 죄책감과 미안함도 함께 남았습니다. 너무나 큰 참사가 소리없이 잘 정리된 판결문을 앞에 두고, 그 의미를 따지는 제가 부끄러워서였을까요. 전례 없는 사고였던 만큼 전례 없는 판결이 나온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 텐데 말입니다.


● 내홍 끝에 열린 사흘간의 특조위 청문회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이석태 위원장이 16일 오전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열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3일차 오전 첫 세션을 마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지난 14일부터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어제까지 3일 동안, 세월호 특별법에 따라 열린 이번 청문회에서는 세월호 참사 초기 구조구난 및 정부 대응의 적정성, 해양사고 대응 매뉴얼 등 적정성 여부, 참사 현장에서의 피해자 지원조치의 문제점 등을 다뤘습니다.

김석균 해양경찰청장, 이춘재 해양경찰청 경비안전국장 등 해경 관계자들과 이주영 해양수산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 등 모두 31명이 증인으로 채택됐습니다(사고 당시 직함 기준). 사고 발생 608일 만의 일입니다.

특조위는 초기부터 삐그덕댔습니다. 예산과 조직 운영을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이 조사와 보고 등 위원회 업무를 총괄하게 한 정부의 직제안에, 특조위는 위원회의 독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반발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지난 7월, 여당 추천으로 합류한 조대환 부위원장이 사의를 표명했습니다. 유족 추천의 이석태 위원장을 포함해 이념적으로 편향된 위원들이 전횡을 휘두르고 있다는 주장과 함께였습니다.

특조위가 꾸려진 지 4개월이 지났을 때에도 제대로 된 조사 활동이 시작되지 못했습니다. 내홍 끝에 특조위는 예산을 확보해 진상조사에 나서는 것이 급선무라며, 특조위 내부 요직에 공무원을 파견하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세월호 침몰 해역에서 수중 선체 조사를 시작하는 등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가 싶었는데, 갈등은 또다시 불거졌습니다. 지난 달 23일 제19차 전원위원회에서 의결된 ‘청와대 등의 참사대응 관련 업무적정성 등에 관한 건’을 둘러싸고서입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 조사’ 논란입니다.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행적을 조사해야 한다는 의견에 맞서, 여당 추천 위원들은 조사 범위를 넘어선 월권이며,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목적이라고 비판하고 전원위원회에서 퇴장했습니다. 이후 청문회에는 여당 추천 위원 4명이 불참했습니다. ‘반쪽 청문회’라는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사흘 간의 청문회에선 그 동안 어렴풋이 추정되던 사실, 혹은 그 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실이 증인들의 입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첫날, 해경의 초기 대응에 대한 질타가 집중적으로 쏟아졌습니다.

현장을 지휘하던 123정 정장 김 경위를 포함해 구조 지휘라인에 있던 해경들이 당시 제대로 세월호와 교신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거나, 123정 정장 김 경위가 퇴선방송을 했다고 한 허위 기자회견은 당시 목포해양경찰서장의 지시였던 것 같다고 말하는 등 답변이 이어질 때마다 가족들이 자리한 방청석에선 한숨과 울분이 터져 나왔습니다.

‘몰랐다’,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쉽다’…. 비슷한 답변이 계속되자 방청석에 앉아 있던, 참사 당시 소방호스를 몸에 감아 학생들을 구조해냈던 ‘의인’ 김동수 씨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말과 함께 김 씨는 자해를 했고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사고 당일부터, 참사 현장에서 실제로 구조에 투입된 인원이 몇 명이었는지를 두고 가족들은 해경의 발표 내용이 실제와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해왔습니다. 청문회 둘째 날인 그제는 이 부분에 대한 추궁이 이뤄졌습니다.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 / 사진=연합뉴스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은 진도체육관에서 구조 소식을 기다리던 가족들에게 ‘어떤 여건에서도 잠수사 500명을 투입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 말과는 다르게 현장에서 제대로 인력이 투입되지 않았다는 지적에, 김 전 청장은 그 인력이 모두 잠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동원된 인원 전체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질문을 던졌던 이호중 특조위원은 “당시 모두의 관심은 ‘몇 명이 잠수를 해서 수색을 하는가’였는데, 그런 의미로 이야기를 했다면 김 전 청장은 정말 나쁜 사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주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 / 사진=연합뉴스
청문회 마지막 날인 어제는 이주영 당시 해양수산부 장관이 증인으로 출석했습니다. 제대로 된 초기 통합 지휘 체계가 가동되지 않았던 이유를 묻는 특조위원들의 질문에, 이 전 장관은 자신에게 다 책임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전날에 이어 현장에 투입된 인력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참사 당일 작성된 해수부 상황보고서에는 수중 수색에 참여한 인원이 16명으로 기재돼 있었다며, 왜 김석균 당시 해경청장이 5백 명을 언급했냐는 질문에 이 전 장관은 전날 김 전 청장과 마찬가지로 전체 동원세력을 언급한 것이었다며 자신의 책임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의도적으로 과장하려던 것은 아니었다며, 여러 상황을 살피러 다니다보니 내용을 세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위증 논란도 벌어졌습니다. 세월호 참사 당일 오후 1시까지 해수부에 ‘350명 구조’라는 보고를 올린 당시 과장급 상황실장에 대해, 우예종 전 해수부 중앙사고수습본부 총괄팀장은 개인 징계를 내린 것으로 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이후 권영빈 특조위원이 감사원 등에 확인한 결과 개인에게 징계가 없었고 기관에 주의 처분만 내려졌다며 반박했고, 우 전 팀장은 뒤늦게 개인에 대한 징계 여부를 정확히 모르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결국 해당 과장급 직원의 징계 내용을 추후에 공개하는 것으로 상황은 마무리됐습니다.

● ‘형사처벌 마무리’…“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냐”
청문회에 출석한 세월호 유가족들 / 사진=연합뉴스
앞서 언급한 2건의 판결이 선고된 뒤 오래지 않아 진도 해상교통관제센터(VTS) 관제요원들에 대한 직무유기 사건 선고도 진행됐습니다. 판결 뒤 여러 기사에서, ‘세월호 현장 책임자 형사 처벌 마무리’라는 문구를 간혹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 문구에, 판결문 별지에 덩그러니 활자로 남아 있던 이름들이, 그리고 1년여 전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갔습니다.

1년여 전 카메라 앞에서 참사의 진상을 밝혀달라던 사람들은, 1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피켓을 들고 카메라 앞에 서고 있습니다.

매일 12시간 가까이 이어진 청문회를 끝까지 지켜보고 난 지난 사흘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증인들의 말에 울분이 일었다는 말과 함께, 아직 부족한 바가 많지만 첫 발짝을 내딛었다는 말을 덧붙이는 그들의 손에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라는 말이 적힌 피켓이 들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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