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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창극 '적벽가'…소설과는 다른 '민초'들의 이야기

[취재파일] 창극 '적벽가'…소설과는 다른 '민초'들의 이야기
적막한 무대에 우주의 진동이 느껴지고, 바람소리와 물소리 같은 자연의 소리, 이어서 사람 소리와 다듬이 소리 같은 삶의 소리가 더해지며 창극 ‘적벽가’는 막이 오른다. 그리고 유비,관우,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는 ‘도원결의’ 장면이 이어진다. 국립극장이 2015-16 시즌의 문을 여는 개막작으로 선택한 국립창극단의 신작 ‘적벽가’가 15일부터 공연중이다. (19일까지)

 창극 ‘적벽가’는 판소리 ‘적벽가’를 ‘극’으로 만들었고, 판소리 ‘적벽가’는 제목처럼 삼국지연의(나관중)의 ‘적벽대전’ 부분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적벽대전’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명장면 중 하나이다. 적벽에 진을 치고 강남 지역을 노리고 있던 조조군을 주유와 제갈공명이 지략을 모으고, 계절에 맞지 않는 동남풍까지 만들어내 ‘화공 작전’으로 휩쓸어버리는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전투를 통해, 소설 속 제갈공명의 신묘한 재주(‘바람’으로 대표되는 ‘자연’까지 움직이는 능력)는 한껏 강조됐고 조조는 체면을 구길대로 구긴다. 조조는 자신이 도망치는 길목에서 기다리던 관우에게 옛정을 들어 목숨을 구걸해 간신히 달아나니 말이다. 이렇듯 소설 속 적벽대전의 주인공은 명령을 내리고 전략을 짜고 이름이 길이 남는 ‘영웅’들이다.

 그러나 창극 ‘적벽가’의 주인공은 ‘영웅’이 아니다. 영웅들이 짜놓은 전술에, 그 명령에, 재가 돼 스러져간 병사들, 민초들이다. 이번 작품으로 첫 창극 연출을 맡은 오페라 연출가 이소영씨는 “적벽대전으로 희생된 망자를 불러내 그들의 증언을 듣고 기억하는 취지로 작품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조조의 백만 대군이 타죽었다고 하는데,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패권 다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민초들이 희생자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은 요즘 현실과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서라고 한다.

 이런 생각은 창극의 모태인 판소리 ‘적벽가’의 뜻을 잇는 것이기도 하다. ‘적벽가’는 판소리로 만들어지면서, 중국의 이야기는 절반만 빌려왔기 때문이다. 최동현 교수(군산대)는 ‘판소리 길라잡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적벽가’는 이러한 줄거리가 중요한 작품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큰 줄거리 속에서 구체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내용들이다. 예컨대, 전쟁에 동원된 군사 개개인의 애절한 사연이 토로되는 ‘군사설움타령’, 조자룡의 용맹을 묘사한 ‘자룡 활 쏘는 대목’, 적벽강에서 오나라 전선들의 화공으로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어가는 조조 군사들 개개인의 슬픈 사연, 적벽강에서 죽은 군사들의 넋이 새가 되어 운다는 내용으로 된 ‘새타령’, ‘군사점고’에 등장하는 다친 군사들의 모습 등등, 원본 ‘삼국지연의’에는 없는 한국적인 내용들이다. 거기에는 중국인들의 삶이 애환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삼국지연의’는 그저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애환의 구체적인 내용을 표현하기 위해 이용되고 있을 뿐이다. ‘삼국지연의’가 이용된 것은 그 내용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이처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의 줄거리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덧붙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 최동현 ‘판소리 길라잡이’ 中 > 

 그래서 지친 군사들은 ‘내 슬픈 사정을 들어봐라. 고당 위의 백발 부모 이별한 지가 몇 날이나 되며… 규중의 젊은 아내 오늘이나 소식 올거나 기다리고 바라다가 밤낮 근심이 맺혔구나’, ‘만일 길에서 죽게 되면, 게 뉘라서 장사 지내며, 모래밭에 뼈가 흩어져 까마귀밥이 된들, 뉘랴 손뼉을 두드리며 쳐 날려줄 이가 뉘 있더란 말이냐’, ‘사당 문 열어놓고 통곡하며 하직한 후, 어여쁜 어린 자식, 다정한 식구 얼굴 한 데 대고 문지르며, ‘부디 이 자식을 잘 길러 나의 후사를 이어주오’ 생이별 하직하고 전쟁터를 나왔으나, 언제나 내가 다시 돌아가 그리운 자식을 품안에 안고 ‘아가,응가’ 얼러 볼거나, 아이고 아이고 , 내 일이야. 아이고 아이고’ 하며 가슴을 친다. (사설을 우리말로 풀어쓰면 이런 내용이지만, 실제 공연에서는 판소리 ‘적벽가’의 한자어와 사투리를 그대로 살려 부른다. 무대 좌우의 자막을 연신 훔쳐보느라 눈이 바쁘다. )

 또 적벽화전에서 죽은 군사들이 새가 되어, 조조를 원망하며 우는데, 이 ‘새타령’은 ‘적벽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눈대목이다. “적벽화전에서 죽은 군사 원조라는 새가 되어 조승상을 원망허여 지지거려 우더니라. 나무나무 끝끝터리 앉어 우는 각 새소리 도탄에 싸인 군사 고향 이별이 몇 핼런고나무…”(쉽게 풀어쓰지 않은 원래 사설은 이런 식이다. ‘군사설움’과 ‘새타령’ 모두 ‘적벽가’ 프로그램북에서 발췌) 전란에 휩쓸려 목숨 부지하기 어려운 평범한 사람들의 얘기가 길고도 자세히 그려져 있다. 대신 주유와 공명이 어떻게 조조군의 배를 묶는 '연환계'를 성공시키는지, 공명이 어떻게 동남풍을 불게 하고, 주유는 그런 공명을 어떻게 견제하려 하는지 등 적벽대전의 세부사항은 상당 부분 생략돼 있다. (이런 내용을 기대하고 간다면, 관객은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원래의 ‘삼국지연의’와는 사뭇 다른 ‘적벽가’을 이번에 ‘창극’으로 만들면서, 연출가는 극의 순서를 다시 손봤다.  적벽에서 모두 불에 타고, 조조가 도망가다, 관우가 놓아주는 원래의 이야기 순서 대신, ‘새타령’을 끝에 배치했다. 이런 배치 덕에 망자의 원망, 민초의 설움은 관객의 마음에 각인된다.
 ‘적벽가’는 자주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판소리로도 그렇고, 창극으로는 더욱 그렇다. 먼저 소리의 난이도가 높기 때문인데, 예전엔 소리꾼의 기량을 평가할 때 ‘적벽가를 할 줄 아는지’를 기준으로 삼을 정도였다고 한다. 둘째는 전쟁이라는 소재를 멋지게 무대화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립창극단도 50년 가까이 ‘적벽가’를 창극으로 단 세 번 밖에 제작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 ‘적벽가’는 국립창극단이 자신 있게 내놓은 야심작이다.

 작품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판소리가 소리꾼과 고수, 부채와 북 만으로도 세상 만물을 표현하듯, 창극 ‘적벽가’는 번잡하지 않은 함축적, 은유적 무대로 관객의 몰입과 상상을 극대화시켰다. 아름답고, 슬프고, 오싹하고, 극장을 나와도 계속 생각난다. 특히 ‘살아있는 최고의 적벽가 대가’, 송순섭 명창(79세)이 작창과 도창을 맡아 적벽가의 힘있고 우아한 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이번 무대를 놓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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