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이 시험 앞두고 참고서 사듯, 군이 적 도발 징후에 무기 구입 서두르듯 정보기관은 간첩들 발흥이 우려되면 해킹과 감청 프로그램을 잔뜩 사들이기 마련입니다. 정보기관 나무랄 일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정보기관들이 정상적인 활동을 하는 곳에서만 적용됩니다. 우리나라는 아닙니다.
국정원과 군의 정보기관인 기무사, 정보사, 사이버사 그리고 경찰청의 정보 분실은 숱하게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해 누군가를 엿보고 있습니다. 안보를 위한 본연의 임무입니다. 하지만 이 기관들은 엉뚱한 목적으로 도감청을 했던 전력이 화려하고, 가짜 사건을 만들어 무고하고 훌륭한 시민들의 생명을 앗아가 역사를 퇴보시킨 과거의 죄가 무겁습니다. 뼈를 깎는 반성도 없었고 못된 버릇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음지는 기를 쓰고 피하면서 양지만 좇는 정보기관은 억울하다 싶을 정도로 뭇매를 맞아도 말릴 사람 찾기 어려울 겁니다.
● 정보기관의 흑역사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에도 국정원이 개입했습니다. 지난 2013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씨의 중국 출입경 기록을 조작해 간첩으로 몰아간 사건에 국정원 직원들이 관여한 사건입니다. 두 사건은 최근 일들입니다. 시계를 멀리 거꾸로 돌리면 이 정도 사건은 '애교'입니다. "해킹 프로그램은 샀지만 시민들을 감찰하지는 않았다"고 국정원이 아무리 주장한들 믿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오지랖 넓은 국정원은 군에도 '침투'해 나랏일을 어지럽힙니다. 북한의 핵 시설과 미사일 기지를 선제공격하기 위한 킬 체인(Kill-Chain)의 핵심인 정찰위성의 주도권에 군침을 흘리고 있는 국정원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습니다. 미사일과 전투기도 내놓으라고 나설 태세입니다.
군 정보기관도 국정원 못지않습니다. 사이버사는 국정원과 함께 2012년 정치 댓글 달기에 여념 없었습니다. 명백한 정치 개입입니다. 기무사와 정보사도 정치 댓글 달기에 힘을 모았다는 의혹이 여태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린 지 오래인데 아직도 옛 버릇은 그대로입니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는 컴퓨터 키보드에서 손을 뗄지 믿음이 안갑니다.
● 정보기관, 정상의 비정상화
거듭 강조하건대 정보기관은 해킹과 감청 장비를 반드시 구입해야 합니다. 가장 성능 좋은 최신 프로그램을 사야 합니다. 그래야 간첩도 잡고 북한도 감시합니다. 정보기관들의 지극히 정상적인 임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상 임무가 비정상으로 받아들여집니다. “비정상으로 받아들여진다”라기 보다는 사실 그 임무들이 비정상적일 때가 많았습니다. 모두 정보기관 스스로 책임져야 할, 자업자득일 가능성이 큽니다.
정보기관 본연의 임무만 하도록 예산 삭감하고 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대수술을 하면 정보기관들을 정상화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넘어야 할 산들이 많습니다. 자신들 권력의 기반인 정치 개입과 사찰을 위한 예산과 조직은 그대로 두고 존재의 이유인 대공 조직과 예산만 쳐낼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정보기관들의 속성이 그랬습니다. 그보다 앞서 여러 권력자들이 정보기관을 감시하기는커녕 책 잡혀서 눈치 보기 바쁘니 정보기관을 손대는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난제(難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