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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쉿! 내가 이 그림을 산 걸 알리지 마라!"

[취재파일] "쉿! 내가 이 그림을 산 걸 알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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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5월 31일), 우리나라의 양대 미술품 경매업체가 홍콩에서 잇달아 경매를 열었습니다. 각각 92.63%, 89.5% 낙찰률을 기록하며 성황을 이뤘습니다. 두 업체가 하루 동안 266억 원어치 미술품을 팔았습니다.
 
같은 주말 동안 세계적인 경매업체 크리스티가 벌인 홍콩 경매에도 한국 작가의 작품 43점이 출품됐는데, 한 점만 빼고 모두 낙찰됐습니다. 가격으로는 89억 8천만 원어치입니다. 크리스티 판매액까지 포함하면 주말 동안 홍콩 경매에서만 한국 미술품이 모두 355억 원어치 팔린 셈입니다.

홍콩은 최근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국제 미술품 거래의 빅 마켓입니다. 크리스티와 소더비 등 세계 양대 경매사가 활동하고 있고 아시아권의 최대 아트페어로 꼽히는 '아트바젤 홍콩'이 열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홍콩 경매에서 한국 미술품들이 잘 팔린다고 하면 국제 무대에서 우리 미술품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진 것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장이 열린 것은 홍콩이지만, 경매장을 찾은 이들의 상당수는 한국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시장에선 낙찰된 작품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는 홍콩에 원정 간 한국인 수집가들이 구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인사동이든 강남이든 국내 갤러리 관계자들을 만나 보면 다들 수년 째 이어지고 있는 불황에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아우성입니다. 해외에서 열리는 우리 미술품 경매를 보면 국내 수집가들 사이에도 우리 미술품에 대한 수요는 분명히 있는데, 국내 시장은 왜 몇 년 째 이렇게 얼어붙어 있는 걸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업계에서 꼽는 가장 큰 이유는 국내 미술품 시장의 왜곡된 구조입니다. 그 배경엔 미술품 거래를 둘러싼 편견이 있습니다. 
 
과거, 몇몇 부도덕한 재벌가나 기업에서 비자금 조성이나 탈세 목적으로 미술품을 이용한 큰 사건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국민들 사이에 미술품이라고 하면 뭔가 구린내 나는 돈으로 부정한 목적을 위해 사고파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생겼다는 겁니다. 그렇다 보니 수집가들이 공개적으로 그림을 사고 파는 것을 꺼리는 것은 물론, 갖고 있는 그림조차 주변에 소문나지 않도록 쉬쉬하기 급급한 형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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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얼마전 박수근 작가의 50주기 특별전을 취재하면서 직접 겪었던 일입니다. 박수근은 우리나라 근현대 작가 가운데 작품성으로나 대중성으로나 최고로 꼽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지난 주말 열린 홍콩 경매에서도 박수근의 '목련'이라는 작품이 19억 6천 887만 원에 낙찰됐습니다.

이렇게 찾는 이가 많은 작가이다보니 작품들이 여러 수집가들에게 뿔뿔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 때문에 주최 측에서 여러 수집가들을 접촉한 끝에 어렵게 대표작 50점을 한 자리에 모았습니다. 관람객 입장에선 박수근의 대표작들을 한자리에서 함께 볼 수 있으니 더없이 감사한 일입니다.

흔치 않은 일이다 보니 미술가에선 이 전시가 꽤 화제가 됐습니다. 특정 미술관에서 이번 특별전을 위해 소장품 일고여덟 점을 흔쾌히 대여해 줬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이 때문에 전시 개막에 앞선 언론 공개에서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00미술관에서 소장품을 7~8점이나 내놨다는 게 사실인가요?"

질문한 기자의 의도는 그저 "00미술관이 이렇게 좋은 일을 했다고 하던데, 사실이라면 참 칭찬할 일이군요!" 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주최 측은 상당히 당혹스러워하며 답변이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작품을 빌려 준 소장가들이 신분이 드러나길 원하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전시장에서 그림을 보는 동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개막 행사에 참석한 박수근 작가의 장녀가 한 작품을 가리키며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다른 그림을 구입하려고 집으로 찾아왔던 수집가가 당시 박수근 작가의 가족이 어렵게 생활하는 것을 보고 그 작품을 함께 구입해 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돕겠다는 마음에 예정에도 없던 작품을 더 구입해준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인데, 그렇게 추가로 구입한 작품을 이번 전시를 위해 선뜻 대여해 주기까지 했으니 정말 고맙다고 했습니다.

듣고 있던 기자들이 훈훈한 마음에 그 미담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또 같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당사자가 신분이 드러나는 걸 원하지 않으세요."

이쯤 되면 분명해 집니다. 적어도 현재 한국사회에서 비싼 미술품을 갖고 있다는 건 '죄' 수준입니다. 현행법과 관계없이 이른바 '감정법'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구입한 돈의 출처가 어떻든 어떤 경로로 어떻게 소장하게 됐든 간에 일단 소문나지 않게 꼭꼭 숨겨야 할 특급 비밀입니다.

미술품은 애당초 사치품일 뿐이고, 예술은 먹고 사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비생산적인 잉여노동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 딱히 괘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필요가 정해진 생필품이 아니더라도 예술이 가진 무형의 가치와 효용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상황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편견 때문에 시장이 왜곡되면 작품이 팔리지 않고,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작가들의 작업환경이 나빠지고, 작업환경이 나빠지면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많이 쓰던 표현 중에 '국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국력 못지않게 '국격'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말 그대로 국가의 품격입니다. 한 국가의 품격을 얘기할 때 가장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예술입니다. 얼마나 많은 훌륭한 예술가들을 배출했는지, 국민들의 일상생활 속에 예술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지 하는 것들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미술품에 대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투명한 시장을 만들어서 원하는 사람은 당당하게 그림을 사고팔고, 갖고 있는 그림은 기쁜 마음으로 남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뭔가 합리적이고 획기적인 방법은 없는 걸까요?

비싼 미술품을 살 수 있는 일부 부유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적어도 생계 걱정은 하지 않고 작업할 수 있길 소망하는 절대다수의 예술가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또, 꼭 내 돈 내고 사지 않더라도 어렵지 않게 좋은 그림들 보면서 마음의 여유도 찾고 싶은 저같은 일반 대중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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