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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까칠한 완벽주의자 스티브 잡스, 힐링의 메신저가 되다? ②

화제의 전시 '마크 로스코'…깊은 작품 얕은 마케팅

[취재파일] 까칠한 완벽주의자 스티브 잡스, 힐링의 메신저가 되다? ②
스티브 잡스는 사망하기 일 년 전쯤 처음으로 로스코의 작품을 접하고 로스코에 푹 빠졌습니다. 이런 사실은 잡스가 사망한 직후 잡스의 여동생인 모나 심슨이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추모글을 통해 알려졌습니다. 심슨은 추모글에서 잡스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기 위해 미래의 애플 캠퍼스를 로스코의 그림으로 장식하고 싶어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기획사는 이 점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각종 언론과 인터넷을 도배하고 있는 소개글마다 로스코라는 이름 앞에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라는 표현이 붙어 다닙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표현이 영 마뜩찮습니다. '마크 로스코전'인데 홍보자료에도 전시 포스터에도, 전시장 내부에서조차 로스코보다 잡스가 더 두드러지는 탓입니다.

로스코는 현재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몇 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점을 소개하는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적이 있었는데 그 안에 로스코의 작품이 6점 들어있었습니다. 당시 같은 리스트에 고흐의 그림이 7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그 인기가 실감되실 겁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들의 수준도 매우 높습니다. 모두 워싱턴국립미술관이 소장한 작품들인데, 이 미술관의 소장품이 한꺼번에 50점이나 해외 투어에 나서는 일 자체가 거의 드뭅니다. 마침 이 미술관이 내부수리를 하는 기회를 전시 기획사가 용케 잡은 덕분입니다.

역시 제일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건 돈이죠. 이번 전시를 위해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험에 가입하면서 계산한 작품 평가액만 2조 5천억 원에 달합니다. 50점으로 나누면 한 작품 당 평균 500억 원 꼴입니다.

하지만 한국 관람객들만 놓고 보면 로스코는 사실 그리 널리 알려진 이름이 아닙니다. 추상화라는 장르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로스코전은 연일 성황입니다.

개막한 지 20일이 채 안됐는데 이미 3만여 명이 다녀갔다고 합니다. 평일에도 평균 1천 명 이상 전시장을 찾는다고 합니다. 세월호 사건 1주년을 맞아 상당수 전시장에 발길이 뜸한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많은 숫잡니다. 많은 이들은 그 이유로 주최측의 성공한 '잡스 마케팅'을 꼽습니다.

그동안 한국 전시 시장에서 별 관심을 못 받았던 추상화 작품들로 이렇게 인기 전시를 만들어낸 건 분명 기획사의 능력입니다. 칭찬받아 마땅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선 지나친 상업적 마케팅이 불편하다는 목소리들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잡스 때문만은 아닙니다.

제가 취재를 나갔던 날도 오전 11시에 전시장 문이 열리자마자 관람객들이 줄이어 들어왔습니다. 몇몇 관람객들을 만나서 직접 물어봤더니 다들 한결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로스코의 그림을 통해 '치유'받고 '힐링'되는 느낌이었다는 겁니다.

로스코 채플을 본 따 만든 방에서 만난 한 여성 관람객은 "평소엔 좋아하지 않던 검은색으로 가득 찬 캔버스를 보면서 마음이 편안해 지고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교수님의 권유로 전시장을 찾았다는 한 대학원생은 "최근 이래저래 스트레스 받고 힘들었는데 아래는 검은색, 위는 금색에 빨간 테두리가 있는 그림을 보면서 '잘 하고 있다', '언젠가는 잘 될 거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이지 '그림의 힘'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왠지 좀 찜찜합니다. '치유', '힐링', 모든 관람객들이 묻기만 하면 쏟아내는 저 단어들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기시감 탓입니다.

지난 몇 년 간 TV에서 신문에서 닳고 닳도록 봤던 단어들이기도 하지만, 멀리 갈 것 없이 전시장 곳곳의 벽면에서 봤던 바로 그 단어들입니다. '치유'와 '힐링'은 잡스와 더불어 기획사가 이번 전시의 핵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또 다른 '마케팅 포인트'입니다.

전시 개막에 맞춰 펴낸 도록엔 최근 몇 년 동안 엄청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강신주 씨의 해설서가 세트로 붙었습니다. 제목은 '소통 표현주의'입니다. '소통', 치유와 힐링 만큼이나 익숙하고 많이 팔린 단어입니다.

오디오가이드를 빌리면 인기 배우 유지태 씨의 감미로운 목소리로 작품 해설을 들을 수 있습니다. 개막식엔 국회의장을 비롯해 유력 정치인들이 대거 참석해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최근 '인기 최고'인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도 모셨습니다. 한 정치인은 "저희도 많이 힐링하고 가겠습니다" 똑 떨어지는 인터뷰를 하는 센스까지 발휘했습니다.

로스코는 생전에 전시 기획자들 사이에 무척 까다로운 작가로 통했습니다. 전시 때마다 기획사에 조명을 어둡게 하고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를 45센티미터로 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런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작품을 내놓지 않았습니다. 45센티미터는 캔버스의 테두리가 관람객들의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의 거리입니다. 관람객들이 캔버스를 가득 메운 색에 푹 파묻히게 해 달라는 거지요.

“관람자와 내 작품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서는 안 된다. 작품에는 어떤 설명을 달아서도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관객의 정신을 마비시킬 것이다." 로스코의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난 로스코의 작품은 정말 좋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도 많이 했습니다. 또, 어찌됐든 이번 전시를 통해 '인상파'에만 쏠려 있던 한국 전시 문화가 다양해질 계기가 마련된 건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단순함' 속에 담긴 로스코의 깊이와 비교해 말 그대로 '단순'하기만 했던 기획사의 끼어들기는 유감입니다.

로스코의 경고 대로,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 가운데 혹시라도 정신이 마비되는 이는 없을지 걱정스럽습니다. 조용히 오래오래 작품을 마주보며 명상하는 대신, 주최측의 이끄는 대로 잡스를 만나서 힐링하기 위해 가열차게 내달리다 말입니다. 물론 이런 걱정이 제 기우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로스코가 얼마나 훌륭한 작가인지 그의 작품들이 얼마나 감동적인지를 알리기 위해 기획사가 전시장 가득 적어 놓은 말들 가운데 한 구절을 다시 기억하게 됩니다. 역시 로스코의 말입니다. "침묵은 그만큼 정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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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디오 취재파일] 문화부 테라스-'마크 로스코 전'과 스티브 잡스, 그리고 '미움받을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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